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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전설의 스타 커플

조회수 2019. 3. 14. 01: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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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주의! 화이트데이 특집!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스타들의 실제 러브스토리 1부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와 영원한 사랑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있을법한 이야기일까? 오늘은 영화 못지 않은스타 커플, 연인들의 감동적인 리얼 러브스토리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발렌타인 데이에 이어 이 기사를 읽은 모든 독자분들이 따뜻한 사랑을 이루시길 기원한다. (물론 본 기자도 다시 한 번 그럴날이 오기를 소원한다. ㅜ.ㅜ)

1. "그녀에게 첫 눈에 반했어요." 맷 데이먼의 러브스토리
출처: commons.wikimedia.org

2002년 영화 <붙어야 산다> 촬영을 위해 마이애미로 온 맷 데이먼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한 술집을 들르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한 라틴계 여성 바텐더 루치아노 바로소에게 반하게 된다. 당시 맷 데이먼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그 술집에 들어간 것은 그녀를 봤기 때문이었다." 라고 한다.


맷 데이먼은 그녀와 짧지만 긴~ 대화를 나누다 자신을 찾아온 파파라치 무리를 발견하고 당황하게 된다. 이를 본 루치아노는 맷을 안심시키며 그가 몰래 술집을 나갈수 있도록 비밀 통로로 안내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톱스타인 맷 데이먼이 여러번 루치아노를 찾아가 열렬한 구애를 하게 된다.

출처: redsearch.org
다정하게 현실 데이트중인 맷 데이먼 부부

맷의 끈질긴 구애에 루치아노는 자신에게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이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맷은 전혀 개의치 않고 딸을 입양하겠다고 약속했고, 그의 이러한 적극적인 모습에 감동한 루치아노는 맷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2005년 두 사람은 부부 관계를 맺게 되는데, 여느 스타들처럼 화려한 결혼식이 아닌 시청에서 소박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결혼 후 맷은 루치아노의 딸을 자신의 친딸처럼 키웠고, 영화 촬영 중에도 2주 이상 집을 비우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하는 가정적인 아버지가 되기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두 사람 사이에는 세 명의 딸이 새로 태어나는 사랑의 결실을 맺게된다. 맷 데이먼은 무려 네 명의 딸을 키우는 딸바보 아빠로 등극하게 된다. 두 사람은 공식 석상이나 일상이나 늘 나란히 손잡고 데이트를 하며 행복한 일상을 만끽하는 중이다.

2. "아내는 나의 생명의 은인" 제프 브리지스의 이야기
출처: www.retto.club

60대가 넘은 나이에 뒤늦게 전성기를 맞이한 제프 브리지스. 연기 경력과 재능에 비해 오랫동안 과소평가 받은 그를 지금까지 지켜준 것은 아내 수잔 제스턴 이었다.


아버지부터 형까지 연기자 집안에서 자란 제프는 어린시절 아역배우로 데뷔하여 활동하다 청년 시절이었던 60년대에 마약, 섹스, 음주에 빠져 방황을 거듭한다. 그러던 중 1977년 <란초 디럭스>란 영화 촬영차 방문한 어느 관광용 목장 리조트에서 한 여직원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수잔 제스턴. 순수한 매력의 그녀에게 푹빠진 제프 브리지스는 그동안의 자신이 저질러온 방황을 멈추고 그녀를 아내로 맞게된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변함 없이 사랑을 지켜온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잉꼬 부부가 되었다.


2010년 제프 브리지스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크레이지 하트>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던 순간, 제프 브리지스는 아내 수잔과 깊은 포옹과 키스를 나누며 그녀에게 모든 영광을 돌렸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인생의 동반자이자 자신을 방황으로 부터 끌어낸 '은인' 이었던 것이다.

3. 죽음 앞에서 받아들인 사랑… 라이언 오닐과 파라 포셋의 러브스토리
출처: www.retto.club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라이언 오닐은 할리우드의 모든 여배우와 사귀었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당시 최고의 바람둥이로 명성(?)이 자자했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사랑앞에서 방황하던 그는 1982년 우연히 만난 당대 최고의 스타앞에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녀는 바로 드라마 <미녀 삼총사> 시리즈로 스타로 발돋움한 파라 포셋이었다. 라이언 오닐 말을 빌리자면 "지금껏 여러 여성을 만났지만 심장을 뛰게 했던 건 그녀가 처음" 이었다고.

출처: http://theatrecomments.weebly.com
슬하에 낳은 아들 레이먼드와 함께한 두 연인

하지만 당시 파라 포셋은 <600만불의 사나이>의 스타 리 메이저스와 결혼 후 그의 외도로 인해 이혼상태라 사랑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바람둥이로 정평이 나 있던 라이언 오닐이 다가왔기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하는 그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어 연인 사이가 되었고, 예쁜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


라이언 오닐의 애절한 프러포즈에도 불구,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았던 그녀는 계속 그와의 결혼을 거절했다. 결국 오랜 시간동안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그녀에 실망한 라이언 오닐은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된다. 그러다 6년 후 파라 포셋은 대장암 선고를 받고 기나긴 항암 치료를 받으며 힘든 나날을 보낸다.


그 소식을 들은 라이언 오닐은 모든 스케줄을 정리하고 달려가 파라 포셋의 병간호에 최선을 다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였다. 더는 바람둥이가 아닌 한 남자의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파라 포셋은 이윽고 라이언 오닐의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파라 포셋의 무덤가에 앉아 있는 라이언 오닐

그렇게 결혼식 날짜까지 정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꾸던 그 때, 파라 포셋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라이언 오닐은 그녀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며 묘지에서 마지막 프러포즈를 하며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4. 36살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 부부
출처: thegolfclub.info

전설의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연기, 영화제작의 명성만큼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도 전설(?)이었다. 3차례의 결혼 실패와 여러 여배우와의 스캔들 전력이 있던 그는 1942년 뉴욕의 한 파티장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바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자 이제 막 영화계에 입문한 17세의 신인 배우 우나 오닐 이었다.


53세의 나이로 10대 여배우에게 첫눈에 반한 채플린은 이미 매스컴의 먹잇감이었고 채플린은 우나 오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가 두려웠다. 자신으로 인해 우나 오닐이 당할지 모르는 불이익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런데 의외로 마음의 문을 먼저 연쪽은 우나 오닐이었다. 그녀도 채플린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출처: www.rock-cafe.info

어린 시절 아버지 유진 오닐이 어머니와 이혼하고 떠나버린 탓에 아버지의 빈자리가 컸고, 그 때문인지 그녀는 또래의 남자에게는 전혀 이성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우나 오닐은 자상하고, 재미있고, 똑똑한 찰리 채플린에게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게 되었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이 자신을 이용하려던 것과 달리 진심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우나 오닐에 채플린 또한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껴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1년 후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결혼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매스컴은 36세의 나이 차이를 이유로 두 사람에 대한 연일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내었고, 우나 오닐의 아버지 유진 오닐마저 언론을 통해 딸의 결혼을 반대할 정도로 주변의 방해는 상당했다. 하지만 우나 오닐은 극심한 주변의 걱정과 반대를 뒤로하고 오랫동안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와 의절하며 찰리 채플린과의 결혼을 선택했다.

출처: www.rock-cafe.info

그러나 곧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찰리 채플린의 과거 연인이었던 조안 배리라는 여성이 채플린의 아이를 낳았다며 친자 확인 소송을 건 것이다. 곧바로 언론과 팬들은 채플린을 일제히 비난했고, 어린 아내 우나 오닐 까지 이용하고 있다며 비아냥거렸다. 두 부부의 관계가 흔들릴 법도 했지만, 채플린과 우나 오닐은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사랑하는 사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며 다짐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조안 배리의 아이가 채플린의 아이가 아니라는 유전자 결과가 나오게 되었고, 법정 소송은 채플린의 승리로 끝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의 사회 풍자 영화 제작에 불만을 느낀 당시의 미국 정부는 법정에 압력을 넣었고, 결국 법원은 채플린에게 조안 배리의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출처: www.rock-cafe.info

여기에 당시 미국 정치권을 공포로 물들였던 공산주의자 척결 운동인 '메카시즘' 열풍이 일어 할리우드의 여러 스타들이 미국에서 추방되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찰리 채플린도 그 희생자로 스위스로 쫒기듯 떠나게 된다.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어 충격이 컸지만, 그의 곁에는 진정한 사랑 우나 오닐이 있었기에 그는 남은 생을 버틸 수 있었다. 찰리 채플린이 1977년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때 까지 우나 오닐은 그의 곁을 지켰고, 시신은 스위스 저택의 인근에 안치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찰리 채플린의 시신이 도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우나 오닐은 언론을 통해 울면서 남편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호소한다. 채플린의 시신은 그 후 석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게 된다. 남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우나 오닐은 다시는 남편의 시신이 도굴당하지 않도록 콘크리트를 부어 새 묘지를 만들었고 한평생을 남편의 묘를 지키는데 헌신한다. 그렇게 우나 오닐은 1991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함께 고된 삶을 살며 서로를 지켜준 찰리 채플린 옆에 묻혀 영원한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다.


출처: countryliving.com


2부에서 계속...

damovie2019@gmail.com


사진=IMDB, ※ 저작권자 ⓒ 필 더 무비.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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