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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포털 계의 일인자였던 "야후 코리아"가 은근슬쩍 사라진 이유

조회수 2020. 1. 9. 16: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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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이후, 국내 포털 시장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심마니, 프리첼, 넷츠고, 엠파스 등 국내 태생 포털부터 외국계 기업까지 있어, 어느 사이트를 이용할지 고민할 정도였다. 이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건 단연 ‘야후 코리아’다. 야후 코리아는 한국 상륙 이후 빠르게 국내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한다. 포털 계의 일인자였던 야후가 2012년 한국에서의 모든 서비스를 종료했다. 한때 대한민국 포털 시장을 이끌었던 1세대 야후 코리아는 왜 한순간에 몰락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일 것일까.


국내 포털 위협했던 야후 코리아의 위엄

1990년대 초반, 스탠포드 대학원생이었던 데이빗 필로와 제리양은 논문에 들어갈 정보가 있는 사이트를 정리한 웹사이트 리스트를 만들었다. 당시 인터넷은 원하는 사이트 주소를 직접 쳐서 접속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러한 불편함이 해소된 두 사람의 리스트는 스탠포드 대학원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1년 만에 100만 명의 접속자를 얻게 됐다.


한 벤처 캐피탈은 그들의 가능성을 높이 사 4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후 19995년 데이빗 필로와 제리 양은 ‘야후!(Yahoo!)’라는 이름으로 해당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사업화하게 된다. 야후는 검색 엔진을 넘어 이메일, 뉴스 등의 서비스를 도입하며 승승장구한다. 창업하던 해 매출은 무려 140만 달러 (16억 원)였다. 1년 뒤에는 1,970만 달러, 1997년에는 6,740만 달러 (767억 원)을 기록하며 1990년대 후반 인터넷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1997년 9월 야후는 소프트뱅크와 손을 잡고 한국에 ‘야후 코리아’법인을 세웠다. 인터넷이 막 발전하던 시기였던 한국에서 야후의 기능은 혁신 그 자체였다. 세련된 UI 역시 야후 코리아의 인기에 한몫했다. 그 결과 야후는 서비스 런칭 첫날에만 5만 페이지뷰를 기록하는 기념을 토한다. 1999년에는 국내 최초로 2,000만 페이지뷰를 넘기며 인터넷의 대명사임을 증명해냈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던 야후의 통찰력

그러나 야후 코리아의 독주는 얼마 가지 않았다. 2002년 네이버가 지식인 서비스를 도입하면서부터다. 인터넷 발달이 상대적으로 느렸던 한국은 웹상에 검색 결과를 보여줄 만한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하지 않았다. 데이터베이스의 부족은 곧 검색을 통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네이버 지식인은 이러한 단점을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사용자들 간의 Q&A로 원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이렉트로 제공받고, 이를 통해 웹상에 데이터를 쌓아가며 검색 결과도 확보할 수 있다. 지식인은 서비스 출시 1년 만에 165만 건의 Q&A를 만들어 냈다. 또한 네이버는 문장 검색 기능을 도입해 검색 결과의 정확성도 높였다. 자체 콘텐츠가 부족했던 야후 코리아는 결국 네이버의 기세에 눌려 2003년 검색 엔진 1위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2005년 다음에 2위까지 빼앗긴 뒤로 야후 코리아 이용자 수는 점차 감소해갔다. 자체 콘텐츠 없이 그저 외부 트래픽을 빌려 오는 데 그쳤던 야후 코리아는 검색 엔진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위기를 느낀 야후 코리아는 2004년 지역 검색 서비스 '거기!'와 UCC 서비스 '야미'를 야심 차게 출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국내 포털 사이트에 힘을 빼앗긴 야후 코리아는 2012년 한국을 도망치듯 떠나게 되었다.

본토에서도 외면? 이도 저도 아닌 신세

야후가 웹과 이용자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다. 1998년 야후는 이미 구글에게 미국 검색 사이트 1위를 빼앗긴 상태였다. 일방적인 검색 결과와 광고로 넘쳐나는 야후와 달리, 구글의 검색 기능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심지어 무료였다. 야후의 질 낮은 유료 서비스를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야후는 급감하는 이용자를 붙잡기 위해 구글 검색 엔진 기술을 받아들였으나,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뒤처진 야후는 계속해서 변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2008년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450억 달러에 인수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CEO였던 제리 양은 ‘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하고 만다. 2012년엔 구글 출신 머리사 메리어가 CEO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적극적인 인재 도입과 경쟁력 없는 서비스 중단, 카테고리 개편 등 과감한 행보를 보여주며 2013년 야후를 다시 한번 방문자 수 1위 사이트로 만들어 냈다.


부활의 신호탄은 불발됐다. 모바일 시장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야후는 페이스북과 스냅챗에 밀려 다시 고전을 겪는다. 결국 2016년 야후는 48억 달러에 인터넷 사업 부문을 버라이즌에 넘겨주었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제시했던 금액에 비하면 무척이나 터무니 없는숫자다. 1세대 인터넷 사업의 선두주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국내 포털 사이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야후 코리아. 그러나 알맹이 없는 서비스만 들이밀었던 이들은 결국 웹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본토 미국에서도 찬밥 신세가 된 건 마찬가지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생긴 결과다. 한때의 기업이 아닌, 계속되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면 야후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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