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은 왜 안시성을 함락 시켜야만 했나?

조회수 2018. 9. 26. 01: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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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알려줌] 안시성 편 (安市城, THE GREAT BATTLE, 2017)
영화 '안시성'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실제 1차 여당전쟁을 알기쉽게 정리해 드립니다.
스포는 없음?
(어차피 교과서가 스포라서...)
출처: 영화 <안시성> 이하 사진 ⓒ (주)NEW
여기, 27살의 나이로 형과 동생을 죽이고 당나라의 2대 황제가 된(626년), 태종 이세민이 있습니다. 집권 4년차(630년)에 동돌궐을 굴복시켜 북방을 평정하고, 집권 14년차(640년)에 고창국을 정벌해 서쪽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당태종은, 이제 마지막 남은 동쪽의 고구려까지 정벌해, 수양제도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자신이 이루겠단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냈는데요.

그러던 중 643년에, 명재상 위징이 죽고, 당태종의 장남이 태자에서 폐위 돼 후계자 문제로 당나라가 혼란 해지자, 이를 수습해야 했던 당태종은 1년전(642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구려의 영류태왕을 시해 한 사실을 문제 삼아, 그런 연개소문을 응징하겠단 명분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포해 버렸습니다.(644년)

한편 고구려의 영류태왕은, 2차 여수전쟁(611년) 당시 500명의 결사대를 직접 이끌고 나가, 평양성에서 수나라 4만 수군을 패퇴시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이끌어낸 전쟁 영웅이었으나, 즉위(618년) 후에는 새롭게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에 저자세를 보이며, 태자를 보내 조공하는 등 친당외교를 펼쳤는데요.
그러나 이는 16년(1차 598년, 2차 612년, 3차 613년, 4차 614년)간의 여수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의도된 화친정책이었고, 사실 천리장성을 쌓는 등 당과의 전쟁을 준비 중이었던 영류왕은, 여당전쟁이 시작되기 전 내부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막강한 무력을 지닌 동부대인 가문의 수장 연개소문을 미리 죽이려 했으나, 이를 먼저 알게된 연개소문에 의해 역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영류태왕과 함께 1백명의 대신들까지 모조리 죽여, 다른 대귀족들까지 초토화 시켜버렸던 연개소문은, 보장태왕을 옹립한 뒤, 28세 나이에 스스로 대막리지에 올라, 이후 24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르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당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 내부엔 연개소문의 반대파들이 여전히 존재했고, 그 대표 세력이 바로 양만춘이 성주로 있던 안시성 세력 이었습니다.
645년 2월, 2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요하를 건너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태종은, 33년 전 수양제가 백만대군으로도 함락시키지 못한 요동성을 단 10일만에 무너트리며, 빠르게 개모성과 현도성, 백암성까지 차지해, 요동 중앙에 주둔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는데요.

하지만 신성 함락에 실패하면서, 영주에서 통정진, 그리고 신성으로 이어져야할 육지 보급로가 차단돼자, 당태종은 오골성을 점령해, 산둥반도에서 비사성, 그리고 대동강까지 이어지는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오골성에서 평양성 까지 직공하겠다는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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