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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준 판결에 국민이 분노한 결정적 이유

조회수 2019. 7. 13.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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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알려줌] 대법원의 유승준 '비자 발급 거부 위법 판정'
글 : 박세준 에디터
출처: 2019년 1월 공개된 유승준의 앨범 <Another Day> 자켓 사진. 이하 ⓒ 유승준 인스타그램
지난 7월 11일 오전, 갑작스레 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바로 대법원의 유승준에 대한 '비자 발급 거부 위법 판정'이었다. 2002년 2월 2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한 지 6,369일, 만 17년 5개월 9일 만의 일이었다.

6,000여 일이 지난 지금 여전히 국민은 분노하고 유승준에 대한 상처에 이를 갈고 있다. 글을 통해 과연 유승준에 대한 이런 감정은 정당한 것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스티브 승준 유
유승준은 필자가 아직 어렸던 시절, 마치 이번 대법원 판정처럼 '갑작스레' 나타난 스타였다. 당시 1세대 아이돌스타들은 그 몇몇이 미국에서 건너온 '유학파'이거나 '이민 2세대'였고, 그들이 소유한 특유의 세련미와 유창한 영어 실력은 국내 청소년들에게 쉽게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

전후 세대 일본 내 청소년들에게 발견되던 '문화 사대주의'가 외환위기 직후 우리에게도 투영되었다면 너무 억지일까? 당시를 경험했던 한 명으로써 외국에서 넘어왔던 앞선 '문물의 선구자'를 우러러봤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출처: 1997년 발매된 유승준 1집 <West Side>(왼쪽), 1998년 발매된 유승준 2집 <For Sale>(오른쪽) 앨범 커버.
만 12세의 나이에 미국 '오렌지 카운티'로 가족과 함께 이민 간 유승준은 백인들로부터 심한 인종차별을 당하며 방황의 시절을 보냈다. 당시 방송에서도 언급했듯, 폭력 사건에 연루되거나 담배를 흡입하는 등 이후 유승준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백인보다는 흑인들과 어울려 지내며 자연스레 그들의 노래와 춤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는 유승준의 음악적 역량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된다. 방황을 끝내고 가수의 꿈을 꾸던 유승준은 자신의 노래와 춤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제작했고, '철이와 미애'의 신철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가수로 발탁하게 된다. 가히 전설의 시작이다.

유승준의 성공은 천재 작곡가들과 함께했다. 그중 윤일상이 거의 전곡에 참여한 2집이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최고라 할 수 있다. 1집 데뷔곡 '가위'는 이윤상 작곡가가 만든 희대의 명곡이지만, '사랑해 누나', 2집의 '내가 기다린 사랑', '악마', '오락가락', 'Oh! Happy day', 3집의 '부탁해' 등 유승준 특유의 미성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잘 어우러지는 명곡들이 모두 윤일상의 작품이다.

유승준의 성공 가도의 중심엔 윤일상이 있었고, 그와 작별한 후 이현도가 참여했던 4, 5집은 유승준을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출처: 1999년 발매된 유승준 3집 <Now Or Never>(왼쪽), 유승준 4집 <Over And Over>(오른쪽) 앨범 커버.
한 방송을 통해 유승준 콘서트 뒷면을 살폈던 장면이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왜 오빠는 콘서트(concert)를 커언설트라고 해요?"라며 유창한 유승준의 영어 발음을 질문하던 소녀는, 미국 문화에 흠뻑 빠져있던 당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극적인 예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시력이 나빠지신 할머니를 위해 딱 한 번 노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는 유승준은 그만큼 바르고 정직한 이미지의 대명사였다.

자신이 방황하던 시절 흡연의 경험으로 그것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고 있으며, 제발 한국 청소년들은 흡연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아침 방송에서 해대곤 했었다. 덕분에 기존 아이돌들과는 달리, 팬들의 부모 세대와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까지 아우르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유승준은 마치 완벽한 아이돌 상이었다. 아니, 아이돌이라는 단어로 규정하기엔 부족할 정도로 '만능 엔터테이너', 혹은 그저 '연예인'이란 직업에 정답과 같은 인물이었다.

외모, 춤, 노래, 예능감, 그리고 이미지까지 말 그대로 '역대급'이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논쟁을 낳았듯, 과연 유승준이 군대를 다녀왔다면 '비'의 아성을 넘을 수 있었을까?

아쉽지만, 가수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가수로서 유승준의 생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유승준은 빠른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중이었고, 이미 두 번의 앨범 실패로 새로운 도전 혹은 휴식이 필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방송인'으로선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생각해보라. 현재 <런닝맨>에서 유승준과 김종국이 서로의 이름표를 뜯으려 싸운다면 그만큼 이상적인 그림도 없지 않겠는가. 일 년에 한두 개의 발라드 혹은 댄스곡을 발표하며 예능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은 오래된 팬의 입장에선 설레고도 아쉬운 상상이다.
어쨌든 이런 와중에, 유승준은 연예계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을 저지르고 만다. 바로 그토록 가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하고 약속했던 군대를 가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취득하곤 나타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것이다. 유승준은 왜 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또 우리는 그토록 분노했을까? 그 당시는 우리도 정확히 몰랐다. 그 이유를.

군대
한국인에게 군대는 그저 '하나의 의무'가 아니다. 군대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헬조선'이라는 국가적 불행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최근에야 헬조선이라는 정립된 단어로 표출되었지만, 늘 한국인들 마음속엔 '불의'에 대한 '불만'이 내재되어 있었다.

생각해보자. 불공정이 판치던 조선 말기 왕족 시대를 거쳐, 35년간 일제 치하에서 일반 백성 혹은 국민들은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고, 또 죽었다. 일제가 물러가자 군부 독재가 난립했고, 총칼에 맞서 민주주의를 획득하고자 또, 싸웠다. 독재자가 물러나자 그 권력을 쥔 건 또 그 독재자의 친구였고, 사람들은 또 한 번 절망했다.
출처: 2002년 2월, 유승준이 공항에 도착해 취재진을 만났다. ⓒ MBC <섹션TV 연예통신> 캡처
먹고살기 힘들어 우선 경제부터 살리고 보자는 욕구가 강했고, 한국은 부유하고 강한 나라로 다시 일어났다. 단, 그곳에 정의는 없었다. 일제에 붙어먹던 반민족 친일세력을 처단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군부 독재를 응징할 시간도 없었으며, 외환 경제 위기의 책임자를 엄벌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사건들은 유야무야됐고, 결국 한국은 '돈 있으면 살기 좋은 나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을 해야 한다'라는 불의의 정의가 판치는 국가가 됐다.

이런 헬조선에서 군대는 어찌 보면 국민들에게 정의에 대한 최후의 보루와 같은 것이다. 계층, 연령, 지역을 넘어 모두가 공명하고 정대하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의무의 영역은, 군대라는 2년의 시간이 가장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 가지는 유일하고 강력한 공통된 '유대감'이자,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우리 사회 마지막 정의, 그것이 바로 군대인 것이다. 스티브 승준 유는 몰랐을 것이다. 한국인에게 군대란 무엇인지. 유승준 이전엔 우리도 몰랐다. 군대라는 상징성이 가지는 폭발성을.
출처: 2002년 2월, 유승준이 '입국 금지' 조치를 받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 MBC <섹션TV 연예통신> 캡처
2002년 2월 2일
군대, 바로 그 뇌관을 유승준이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악랄하고 교활했다. 그저 다른 수많은 검은 머리 외국인처럼 시민권을 '정상적으로' 받았다면 비판은 있었을지언정 비난은 없었을지 모른다. 유승준은 수차례 공언했다.

요즘 말로 이른바 '어그로'를 끌었다. 군대를 가겠다. 신검을 받겠다. 대한민국 성인 남자라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둥 지금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말과 행동을 대놓고 했다. 그리고 공연을 빌미로 출국했다. 알고 보니 그 전인 2000년경 이미 시민권을 신청한 상태였다. 기만도 이런 기만이 없었다.

미국인으로 귀환한 유승준에게 국가는 '출입국 관리법 11조'를 들어 '영구 입국 금지 대상자'로 지정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유승준에게 카메라가 집중됐다. 입국을 막은 건 어찌 보면 유승준을 위한 법무부의 배려였다. 그 상태로 서울 시내에 진입했다면 돌팔매를 맞을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난 유승준은 10여 년이 지난 2014년 다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입국을 원하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른바 '한반도 평화 판독기'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북한의 미사일 사태 등 급변 사태가 있으면 잠잠하다 평화 분위기가 고조되면 다시 인터넷 방송 등을 통해 사과와 함께 국내 입국을 요구하는 영상이 올라오곤 했다.
출처: 2015년 유승준이 아프리카 TV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 아프리카 TV 방송 캡처
국내에도 유승준 입국을 허가해야 한다는 찬반 의견이 있고, 금번 판결을 통해 그것의 가능성이 커진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17년이다. 왜 이렇게 아직 분노의 감정이 잦아들지 않았을까?

바로 유승준은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자신의 죄를 잘 모를 가능성이 크다. 이건 감정의 문제다. 유승준으로선 한국인 특유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군대를 가겠다 하고 시민권을 취득한 경우가 그렇게까지 나쁜 일인지, 이토록 긴 세월 동안 미워할 정도인지에 대해 말이다.

군대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한다면 유승준이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차마 한국에 내비치지 못할 것이다.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일 것이다. 그것이 여전히 국민의 10명 중 7명이 그의 입국을 반대하는 절대적 이유이기 때문이다.
선례
유승준의 입국 동기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각종 루머와 추측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저 '한때' 행복했던 추억을 고국에서 만끽하고 싶은 개인의 소회일 수도 있다. 유승준이 돌아온다고 해서 그의 방송 복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강력한 반발심에 그가 국내에서 영리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혹자들은 (약간의 동정심을 더해) 입국 허용을 주장하기도 한다. 개인적 연민이야 누구나 같다. 필자 역시 팬으로서 개인이 감당했어야 할 유승준의 상처가 안타깝고 슬프다.

문제는 선례다. 유승준은 일종의 기준이 되었고, 이후 연예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까지 그 기준은 상당히 강하게 적용됐다. 우리가 지키고자 한 이 마지막 정의는 모종의 방어기제처럼 발동해서 성역과도 같이 자리했다.

싸이는 군대를 두 번 다녀와야 했고, MC몽은 사실상 사회적 격리 중이다. 그 시발점이었던 유승준이 돌아온다면 그것은 마치 이 성역의 오염으로 인식될 수 있다. 유승준의 입국은 단순한 개인적 귀환이 아닌 불의와 정의 사이 위치한 한국민의 고집과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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