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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게 제2의 '곡성'이라고 말하다니!

[영화 리뷰 알려줌] <변신>과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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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예민
글 : 박세준 에디터

1. <곡성>의 아성
명작들은 회자된다. 관객들에게 시간이 흘러도 다시 찾게끔 하고, 볼 때마다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그 재미가 각자의 해석을 낳고, 심지어 토론에 이르게 된다. 영화와 감독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거나 시대와 문화적 흐름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곡성>(2016년)이 그러한 명작의 반열에 들 정도인가 하는 부분은 의문이 있다.

하지만 거대한 영화들이 가지는 특징은 <곡성> 역시 소유하고 있다. 바로 이미지다. <곡성>은 공기(Atmosphere)다. 마을을 둘러싼 자욱한 공기와 대기 그리고 연기가, 푸른 새벽빛을 받아 은은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2010년이 지난 초현대사회에서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한국식 공포가 가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싱글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인간의 선한 마음을 다뤘다"라고 말한 나홍진 감독은 결국 인간을 '성선설'에 기초한 나약한 존재로 인식하는 듯했다. '신'은 창조자이자 구원자이면서 방관자이기도 한, 인간의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는 중의적 존재처럼 그려진다.

출처영화 <곡성> 이하 사진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종구'(곽도원)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자 아버지다. 가부장적이면서도 소탈하고, 때론 허세가 깃들면서도 쉽게 겁에 질리기도 하는 일반인의 전형이다.

관객은 그런 '종구'의 방황을 보며 동질감을 느끼고 때론 안타까워한다. '낚시'와 '미끼'라는 능욕적 단어가 설명하듯 악귀는 '효진'(김환희)을 노리고 가족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악귀의 추종자가 누구인지 추적하는 관객의 눈에서 영화는 생명을 얻는다.

답이 없기에 답을 찾을 수 없다. 영화는 끝나고 관객은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는다. 호불호는 갈렸지만, 오프닝과 동시에 결말이 예측되는 진부함에서 탈피한 <곡성>이었다.

<변신>은 이 지점에서 <곡성>과 차별된다. 다름이 아니라 좀 더 못났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중수'(배성우)의 구마가 실패함을 보여주고, 이내 자신을 믿던 소녀의 죽음을 목도케 한다. <검은 사제들>(2015년) 속 '김 신부'(김윤석)의 트라우마와 똑 닮은 '종수'의 그것은 영화의 결말이 다소 예측 가능함을 일깨워준다.

한국형 오컬트 영화에서 악귀와 맞서는 신부는 늘 나약하고, 트라우마를 가진다. 일종의 성장기라 할 수 있지만 그렇기엔 늘 같은 상처와 같은 역경을 내디딘다. 그래서 훌륭한 배우들의 표정은 늘 같고, 악귀의 대사는 닮았다. <변신>이 새롭거나 신선치 못한 이유다.

나홍진 감독이 인간의 '선'을 전제하고, 그리려 했다면, <변신>의 김홍선 감독은 좀 더 관찰자적 시점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김 감독은 '스포츠투데이'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의 본성이나, 관계에서 오는 갈등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여기서 나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저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라며 경험보단 관찰이나 호기심이 구조의 바탕임을 이야기했다. 관찰과 호기심은 상상을 낳는다.

출처영화 <변신> 표지 및 이하 사진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결국 영화 속 관계의 근원은 상상이며 갈등도 마찬가지다. 악의 영양분처럼 인식되는 '분노'는 상상에서 출발한 감정의 결과여서, 보다 현실적이지 않고 오히려 조금 이질적이다.

예컨대, 늘 화난 듯 보이는 '현주'(조이현)의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강구'(성동일)와 '명주'(장영남)의 갈등은 무엇 때문에 그간 수면 아래 잠식되고 있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저 평소엔 평범하던 사람과 가족이 악귀의 의도대로 분노하고, 해체된다. 이런 연유로 '강구'보단 '종구'가 인간적이고, 그래서 '종구'의 나약함과 부성애가 강하게 느껴져 온다.

2. 맥거핀과 클리셰
영화엔 몇 가지 전문용어가 있다. '맥거핀'이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종의 장치로 그 역할을 다하고 소멸해버리는, 일종의 '환기'다. <변신>에선 '강구'네 새집 옆 의문의 가구가 그런 맥거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집의 사연과 '강구' 집으로 침투한 악귀가 무관하다 할 수 없지만, 주의만 끌 뿐 별다른 전개 없이 소멸했으니 맥거핀으로 봐도 무방하다.

<변신>에선 오컬트물의 필수조건이 수없이 등장한다. 이른바 클리셰다. 우선 이사한 새집이다. 새집이라며 좋아하는 가족들의 말과 상반되게 집은 상당히 오래되어 보인다. 어딘가 으스스하고, 사연이 있어 보인다.

지나치게 낮은 가격의 이 경매물은 그 연유를 알아보지 않은 '강구'가 어리석어 보일 정도다. 마치 '꼭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집'에 찾아 들어가는 그간의 공포영화 속 아둔한 가족들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지하실이다. 이런 집엔 꼭 어둡고 의문스러운 지하실이 있다. 신부 삼촌의 십자가를 지하실에 내려놓는 것부터, 꼭 지하실을 내려갈때면 한 줄기 비치는 빛에 의존하거나 촛불 혹은 가련한 전구가 전부다.

'현주'의 잠을 깨우는 이불 역시 공포영화의 흔한 클리셰다. 이불을 끌어내려 인물을 괴롭히는 장면은 <컨저링>(2013년)을 비롯한 수많은 공포영화에서 사용된 방식이다. 영화의 유일하면서도 신선한 아이디어는 제목처럼 달라지는 악귀의 모습이다.

가족 구성원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악귀의 자유자재함은, 그나마 장르의 새로운 영역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영화 포스터나 제목에서 악귀가 변신한다는 설정은 공개돼 있기 때문에 그리 놀랍지 않다.

오히려 가족으로 스며든 악귀가 서로를 증오하려 만들기 위해 행하는 '장난'이 더욱 공포스럽다. '강구'가 '현주'의 이불을 들치고 몸을 살피며 "우리 딸 잘 컸네"라며 히죽 웃는 장면은 가족 호러물에서 발현 가능한 시도라 하겠다.

3. <변신>의 변신이 필요하다
대중은 흔히 영화를 이분법적 잣대로 판단한다.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 '볼 만하다' 혹은 '볼 필요 없다' 정도다. 그것은 영화라는 컨텐츠가 여가 활동 중 2시간 여 동안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간편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곡성>은 재밌고, <변신>은 재밌지 않다. 해석의 여지도 <곡성>이 많지만, 1차원적인 재미 역시 3년 전 개봉한 나홍진의 전작이 더 우수하다. <변신>이 지루하거나 공포스럽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플롯과 장면들, 예측 가능한 결말, 배우들의 대단한 연기에도 희석되지 않는 인물과 관계 속 갈등의 단순함 등은 이 영화를 과연 '제2의 곡성'이라 불러도 좋을지 끊임없이 의심케 한다.

<변신>의 개봉 소식을 듣고 극장을 찾았을 때, 감독과 배우에게 기대한 건 흔해져 버린 한국식 오컬트의 재현이 아니었다. "아빠로 변한 악마가 딸에게 접근하는 방식 등은 너무 과한 것 같은 부분들은 다 지금 버전으로 조절했다"라는 감독의 말에서 유추하듯,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그저 그런 공포의 복제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좋은 소재와 배우를 가지고도, 수 년 전 영화보다 못한 확장과 서스펜스 그리고 철 지난 '희생된 소녀' 클리셰를 반복한다면 한국 공포 영화의 '변신'은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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