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영화는 소설처럼 '매운맛'이 아니었을까?

조회수 2019. 11. 2.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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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교 알려줌] 소설 <82년생 김지영> & 영화 <82년생 김지영>
글 : 박세준 에디터
출처: 영화 <82년생 김지영> 사진 ⓒ 롯데엔터테인먼트
뜨겁던 <82년생 김지영>, 왜 순한 맛이 되었을까?
<82년생 김지영>은 민음사에서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중 13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소설이다. 1982년생 '김지영'의 30여 년 인생을 '남녀'라는 한 가지 사안으로 관찰하는 글이며, 페미니즘 소설의 대표 격으로 분류된다.

이 소설은 꽤 많은 공감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비단 남자 독자에게선 비판을, 여자 독자에게선 지지와 응원을 받았다 하진 않겠다. 물론 통계를 보면 여성 독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 역시 선풍적인 책의 인기와 무관하진 않다.

무조건 착한 소설이란 좋지 않다. 소설과 문학은 시대의 모순을 짚어내고, 핵심을 뒤틀고 꼬집어내야 한다. 문제를 바꿀 순 없어도 독자들로 하여금 인식의 시작은 만들 수 있다.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들이 그러했고, 높이 평가받는 작가와 그들의 글이 그렇게 역사에 남았다. 작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점에서 괜찮은 소설이다.
문학 작품으로서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82년생 김지영>은 지난 10월 23일 영화로 개봉했다. '김지영'(정유미)의 남편인 '정대현' 역으로 배우 '공유'가 캐스팅되자 페미니즘 영화에 출연하는 남자 배우라는 논란 아닌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애초 원작만큼 뜨겁고 불편한 이야기가 될 듯했던 이 영화는 '생각보다 싱겁다'라거나, '소설의 순한 버전'이란 실망스러운(?) 평가가 지배적이다.

더욱더 담담하고 담백하게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잘 풀어냈다는 관객 의견도 없지 않지만, 소설의 센세이셔널한 문제 제기는 영화에서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 어떠한 점이 소설과 다르고, 또 영화는 왜 '순한 맛'이 되어야 했는지 살펴보자.
1. 전달력
조남주 작가의 글은 상당히 직접적이다. 문체가 짧고 표현이 사실적이다. 그 의도가 너무 선명해서 소설이란 형식을 빌릴 뿐 일종의 선동 글을 읽는 느낌이다. 그는 아주 작은 사건부터 현재의 '김지영 씨'의 시간까지 빠짐없이, 그리고 일관되게 '성(性)'을 기준으로 구분했다.

"확실히 여자애들이 더 똑똑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아이들 역시 여학생들이 더 공부를 잘하고 차분하고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 반장 선거를 하면 꼭 남학생이 뽑혔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 듯이", "요술공주 캐릭터가 그려진 두툼한 필통"

여자아이들은 왜 '공주' 캐릭터가 그려진 학용품을 들고 다녀야 하는지, 주민등록번호에서 남자보다 여자의 숫자가 뒤인 이유는 무엇인지, 늘 반장에는 남학생들이 당선되는지 등 당연시하던 일상의 '모순'을 하나하나 꼬집어낸다. "반장 선거에서 꼭 남학생이 뽑혔다"는 건 일반화의 오류다. "여학생들이 더 공부를 잘하고 차분하고 정확하다"는 것도 편견이다.
주민등록번호의 순서는 명백히 모순적인 제도의 단면이다. '남녀', '남학생과 여학생', '남편과 아내', '1남 1녀' 등 남성의 우위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함과 일맥상통하다. '요술공주 캐릭터'는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당연시되어 온 고정관념의 폐해라 하겠다.

이러한 부당함(?)에 김지영의 분노는 적을 찾지 못하고 그저 허공을 맴돈다. 늘 울고 삼키고 속으로 되뇔 뿐이다. 그 되뇌는 억울함과 한탄이 독자들에게 담담히 전해진다.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어불성설이라 판단하기도 한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를 보고도 남녀의 불평등함을 이야기할 것 같은 김지영의 자세에서 묘한 긴장감을 받는다. 소설은 그 긴장감을 동력 삼아 독자를 끌고 간다.

반면 영화에선 그 긴장감을 이어갈 동력이 부족했다. 소설 속 많은 설명을 정유미의 대사와 표정에 실어야 한다. 차라리 <리틀 포레스트>(2018년)의 '혜원'(김태리)처럼 많은 내레이션을 삽입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웬만해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김지영의 성격이 관객에게 좀 더 잘 전달됐을 것이다.
2. 신뢰성
<82년생 김지영>은 소설과 기사의 형식을 동시에 가진다. 소설 사이사이 팩트를 인용해 신뢰를 높이고 자신의 비판을 정당화한다. 수많은 문헌과 통계의 참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작가의 진위를 의심케 하지만, 그것 또한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책에 실린 여성학자 김고연주 씨의 말처럼 "딸 '김지영'의 삶은 어머니 '오미숙'의 삶에서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걸 작가는 보여주고자 했고, 그 근거로 독자를 설득할 '팩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허무맹랑한 이야기, 혹은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닌 하나의 보편성으로 읽힐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런 신뢰성의 형성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마저도 좇지 못한다. 2시간에 걸친 시간 동안 투쟁적인 여성의 삶보단 '김지영' 개인의 감정에만 집중한 결과다.

소설을 완독한 후 영화로 복습한 기존 팬들은 '김지영'의 삶과 고통이 일반 여성의 그것을 대변한다고 이해하겠지만, 영화로 이 작품을 처음 접한 관객은 그녀의 전유물로 치부할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에서 작가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신뢰에 대한 고민이 영화에선 옅어졌기에 영화 속 '김지영'의 삶은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3. 일반화
소설은 끊임없이 '김지영'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한다. '김지영'이 당하거나 맞닥뜨리는 일은 한국 여성이 겪었거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김지영'이 느끼는 감정과 분노는 마치 으레 그러해야 하는 보편적인 생각인 것처럼 말이다.

독자의 감상과 판단도, 그리고 작가의 창작도 모두 개인적 경험에서 나와 일반화의 영역으로 향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러한 일반화는 결국 공감을 끌어낸다. 남성 독자에게는 공감까진 아닐지라도 일말의 연민을 갖게 한다. '에이' 하면서도 '혹시, 그럴지도'하며 소설을 놓지 못하게 한다.

영화는 다시 한번 영상 언어의 한계를 드러낸다. 일반화는 차치하고,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는 '김지영'의 어린 시절이나 대학 시절, 혹은 취업 후 겪어야 했던 차별과 부당함을 관객과의 공통분모에서 찾아내지 못한 형국이다.

소설과 같은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그 맥락에서 감정선은 이어지지만, 여성 관객이 공감하고 남성 관객이 불편해할 작품의 특색을 많이 잃은 듯하다.
4. 불편함과 반발심
소설을 읽는 동안 느꼈던 두 가지 감정은 불편함과 반발심이었다. '김지영'의 감정과 분노는 때론 불편했고, 또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편한 것은 어쩌면 그것이 진실이기에 그렇고, 화가 나는 건 그것의 '억지성'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조건이라면 남성 지원자를 선호한다"는 말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간 사회에서 남자들이 누려온 일종의 특권이 존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자라서 편한 많은 순간을 남자들은 그동안 즐기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정대현 씨의 어머니가 갑자기 두 번밖에 본 적 없는 김지영 씨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예비 시어머니에게 전통차를 사드린 김지영 씨. 그런 김지영 씨에게 배려가 깊다며 칭찬하는 예비 시어머니. 이 작은 교류에서 불편함을 드러내는 '김지영'의 감정은 억지에 가깝다.
또한, "혼인신고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라는 '김지영'의 질문에 "마음이 달라지지"라고 대답하는 '정대현'. "혼인신고를 하면 마음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가 책임감 있는 걸까"라며 생각에 잠기는 '김지영'에게 이질감이 느껴진다.

역설적으로 이 두 감정이 소설의 재미를 끌어냈다. 마치 밀고 당기며 연애를 하듯, <82년생 김지영>은 끌어당겼다 밀쳐내며 독자에게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생각하게 한다. 비판이든 공감이든 하게끔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강렬한 불편함도, 반발심도 없다. 오히려 담담하게, 담백하게 '김지영'의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정유미의 '김지영'은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피폐해진 여성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했고, 마치 이상적인 남성상을 보는 듯한 소설 속 '정대현'은 공유의 모습으로 실사화됐다.
글은 이미지보다 강하다. 성인용 영화보단 성인용 소설이 더 야하고, 공포 영화보단 공포 소설이 더 무섭다. 활자화된 메시지는 능동적으로 읽어 내려가는 주체의 감정을 더 깊게 파고든다. 반면 영상화된 이야기는 수동적으로 흡수된다. 만약 영화가 소설만큼 강한 충격을 주려면, 더욱 강한 장면이나 에피소드를 차용해야 한다.

어쩌면 영화 속 '김지영'과 '정대현'의 대화는 지나치게 일상적이거나 평화로웠을지 모른다. 조남주의 문체로 느꼈던 세상의 부당함이 영화에선 다소 가벼워진다. 이것이 바로 매운맛 소설이 순한맛 영화로 격하된 주된 이유다.

5. 표현의 차이
내용을 떠나 조남주의 표현력은 훌륭하다. 간결하고 아름답다. "빗방울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송이처럼 서로를 쓰다듬었던", "거대한 빙하 위에 온 가족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표현들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감정의 이미지화를 시켜 글을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야기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소설 자체는 풍성해진다.
반대로 이를 영화는 충분히 구현해내지 못했다. 영상은 평범했고, 눈보라 치는 오후 '김지영'과 '친정엄마'의 감동적인 대화에서도 감정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글과 영상 중 어떤 것이 더 표현하기 어렵다 정의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건 <82년생 김지영>에서 글의 표현력을 영화는 좇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연출을 맡은 김도영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가족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확장되기를 바랐다"고 밝혔다.

어쩌면 감독은 관객이 기대했던, 혹은 예상했던 자극적이고 투쟁적인 방식보다 그저 한국 사회 속 여성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담백함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맵고 강렬했던 소설과 생각보다 순했던 영화 중 어떤 것이 좋았는지는 독자와 관객이 직접 평가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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