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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귀'가 나와도 아쉬운 4가지 이유!

[양기자의 영화영수증] <창궐> (Rampan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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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려봄
글 : 양미르 에디터

사회 및 정치 이슈부터, 좀비물이 보여주는 장르적 쾌감, 그사이에 등장하는 신파까지 이 모든 것을 다 집어 놓고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한국산 좀비 블록버스터'의 효시가 된 <부산행>(2016년)에서도 일부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 문제로, 관객의 눈높이가 올라간 시점에 <창궐>은 '야귀'라는 뱀파이어와 좀비의 캐릭터를 합쳐 조선시대로 그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 도전은 '좋음'보다는 '아쉬움'을 더 많이 남겼다.

첫 번째 아쉬움은 <부산행>처럼 스피디한 초반 전개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초반 '야귀'가 창궐하게 된 배경을 보여주던 작품은 갑자기 그 장면에서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조정의 권력 다툼 현장으로 이동된다.

궁중의 여러 인물을 '드라마 장르'의 형식을 차용해 소개하므로, <부산행>처럼 빠른 '야귀 창궐'은 시간이 지나야 등장한다. 더욱이 캐릭터들이 너무나 힘을 잡고 움직이기 때문에, '야귀의 살육'이 더 궁금한 관객들에게는 지루함이 느껴질 수도 있다.

출처영화 <창궐> 이하 사진 ⓒ (주)NEW

두 번째 아쉬움은 '김자준'(장동건)이 '야귀'를 사용한 이유다. 이는 앞서 언급한 '톤 조절' 실패와도 연결된다. 어차피 조금만 더 왕실을 건드리면 '개벽'의 앞날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김자준'은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야귀'를 통해 왕권을 건드리려 한다.

자신도 함께 죽으면서,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미친 과학자' 빌런도 아닌 '김자준'이 '야귀'로 '개벽'을 맞이하려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야귀'들의 왕이 되겠다면, 이해는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아쉬움은 '야귀'를 잡겠다는 팀플레이는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외침을 무시하고, 살기 위해 무기를 든 민초들이 '이청'(현빈)을 구하는 첫 '야귀 대규모 습격'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이런 '팀플레이'가 끝까지 유지된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영화는 어느 순간 '이청'의 '일기당천'으로 넘어가게 된다.

'비디오 게임'의 주인공처럼, '이청'은 단 한 칼에 '야귀'를 제압하고, '최종 보스'와의 결전도 적절한 시기에 버튼을 누르면 회피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이런 과도한 '비디오게임 영상' 덕분에 '액션의 단조로움'을 받을 수 있다.

네 번째 아쉬움은 이제는 지겨워진 '참된 왕의 자세'다.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은 이래야 한다"라는 의미의 작품은 반복되어 등장했다.

특히, 2016년 '촛불시위' 이후, '불'을 상징으로 하는 민중의 모습은 <군함도>부터 <물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볼 수 있게 됐다. 이 작품 역시 근정전의 지붕에서 '이청'이 횃불을 든 백성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문제는 "내가 이러려고 왕이 됐나 싶다"부터 "이게 나라냐"라는 대사는 애교일 정도로, 노골적으로 '왕의 역할'을 대사로 설파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스스로 내렸다는 점이다. 이는 관객에게 작품의 의미를 떠먹여 주는 것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의 자세'만을 보여주지 않고, '국민이 해야 할 행동'까지 보여줬다는 점이다. 민중들이 '횃불'만 들지 않고, '무기'도 함께 들었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할 누군가를 기다리는 세상에서, 자신이 변하면 타인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주고 싶은 감독의 메시지가 아닐까?

2018/10/25 메가박스 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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