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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는 어떻게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됐나?

[알지 미디어 투고] <캐롤> (Carol,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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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를 그려봐
글 : 드미트리

캐롤(케이트 블란쳇)이 장난감 매장에 장갑을 두고 오지 않았더라면. 테레즈(루니 마라)가 캐롤의 주소로 장갑을 돌려보내지 않았더라면. <캐롤>의 원작 소설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을 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이 중 어느 하나도 이루어진 적 없는 현실을 살았다.

그는 첫 번째 소설을 펴낸 지 2년 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백화점 장난감 매장에서 일했고, 어느 날 밍크코트를 입은 중년 여성이 걸어 들어와 딸들에게 줄 인형을 주문하고 갔다. 여인은 장갑 혹은 그 비슷한 것도 두고 가지 않았으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그날 밤 열에 들뜬 채 2시간 만에 캐롤과 테레즈의 이야기를 구상했다.

원작소설이 나왔던 시대이자 작중 배경이 되는 195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시기로 여성의 인권은 물론 성소수자의 인권에 관한 인식도 많이 부족했다.

출처영화 <캐롤> ⓒ (주)더쿱

캐롤의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는 캐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소유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캐롤이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을 두고 '윤리 조항'을 들먹이며 딸 린디의 양육권을 위협해 캐롤을 곁에 끌어다 놓고, 캐롤의 정체성을 병처럼 여겨 심리치료를 지원한다.

테레즈를 '테리'라고 부르는 리처드(제이크 레이시)는 캐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는 테레즈를 향해 '고등학생'처럼 여자한테 반했다고 착각하는 거냐고 몰아붙인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완벽한 남편감을 연기했을 뿐이면서 테레즈가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한다.

하지나 리처드가 드러내는 사회의 편견은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을 지우려 들지만,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카메라에 가득 담긴다. 캐롤과 테레즈 사이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언하는 듯한 대니(존 마가로)의 말처럼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테레즈는 분명 캐롤에게 이끌리고 캐롤은 분명 테레즈에게 이끌린다.

캐롤은 이미 합의된 양육권이 위협받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지언정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테레즈에게 분명 호감을 느끼고 다가선다. 리처드가 묻는 말에는 우물쭈물하던 테레즈는 자석에 이끌리듯 캐롤을 따라다닌다. 집으로 놀러 오라는 캐롤의 초대에 당장 응하고, 갑자기 먼 길을 떠나자는 캐롤의 제안에 일말의 고민 없이 따라나선다.

한편 여성이자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두 사람 사이에도 위계가 뚜렷하다. 20대에 막 들어선 테레즈에게 세상은 낯설고 두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 테레즈의 눈에 비친 캐롤은 우아한 상류층 여성으로 자신보다 한참 앞서 세상을 살아가며 경험과 취향을 쌓아 올린, 모든 것에 능수능란한 사람이다.

식당에서 무엇을 먹고 마실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척척 주문할 줄 알고, 테레즈 집에 선물로 카메라를 발로 밀어 넣으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다. 어쩌면 캐롤과 함께라면 온통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해답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여행길에 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린디의 양육권이 위태로워진 캐롤은 그런 걸 찾는 건 당신이 어리기 때문이라며 당신을 놓아준다는 말을 남기고 테레즈를 떠난다.

테레즈는 원래 자기 발로 먼 길을 이동한 적이 없다. 리처드가 페달을 밟은 자전거 뒤에 매달려 내리막길을 내려가거나 캐롤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부드럽게 오르막길을 오르지만, 어느 경우에도 두 발을 땅에 딛고 있고 있지는 않았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모르는 채 이리저리 휘둘리던 테레즈는 캐롤이 선사한 황홀경과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통과한 뒤 단단해진다.

이전에는 사진작가를 꿈꾸면서도 렌즈를 사람에게 향하기는커녕 사람을 마주하기도 힘들어했으나, 캐롤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포착하며 카메라에 사람을 담는 법을 배웠다. 드디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뉴욕타임즈에 다니게 된 테레즈는 두려울 것 없는 걸음으로 자신의 일터를 향한다.

그 모습을 양육권 조정 자리에 가는 길인 캐롤이 차창 너머로 목격한다. 캐롤이 린디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하나둘 포기하고 있는 동안, 자기가 늘 차에 태워주고 이끌어 주어야만 할 것 같던 테레즈가 자신의 보폭을 찾은 것이다.

캐롤은 아무도 없는 집을 견디기가 더더욱 힘들어지고 있으며 힘들 때면 가장 먼저 찾았던 애비(사라 폴슨)도 자신의 삶을 꾸리는 중이다.

테레즈에게는 모든 걸 다 아는 어른 행세를 하며 이별을 고했지만, 테레즈를 향한 마음은 제대로 꽃을 피워본 적도 없이 가슴속에 늘 웅크리고 있었다. 홀로 만개한 테레즈를 본 캐롤은 더 이상 자신을 부정하기보다는 자기 심장 한 켠을 떼어내서라도 자신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양육권을 포기한다.

I love you. 테레즈는 재회한 캐롤이 내미는 담배를 처음으로 거절하고 같이 살자는 말도 거절했는데 캐롤의 고백에 머리가 얼어붙는다. 사랑을 고백하는 가장 정확하고도 식상한 말이지만, 밀도 높은 시선을 교환하면서도 그 감정을 무어라 감히 표현하지 못하던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이 말은 단순한 사랑 고백 이상이다.

사실 나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처음이고 무서우니 부디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를 지우려 드는 사회 속에서 함께 꿋꿋이 버텨보자는 결의 같은 것까지도 그 한 마디에 꾹꾹 눌러 담겨 있다.

이전까지 테레즈는 자신보다 늦게 나오거나 자신을 데리러 오는 캐롤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캐롤은 기약 없이 기다리고, 테레즈는 자신을 막으려는 식당 지배인을 뿌리치고 캐롤을 향해 걸어간다. 영화 내내 대체로 안정된 움직임을 보이던 카메라가 테레즈를 따라 동요한다. 테레즈는 캐롤을 바라보고 캐롤은 테레즈를 바라본다.

그 장갑 일부러 두고 나왔어요. 알고 있어요. 어린 당신을 내가 끌어당겼어요. 알고 있어요.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했던 캐롤이 모든 걸 내려놓고 테레즈와 눈을 맞추는 모습을 상상한다. 테레즈가 동경은 내려놓고 혼란이나 두려움 없이 캐롤을 향한 사랑을 감각할 모습을 상상한다.

만약 캐롤이 장갑을 두고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테레즈가 그 장갑을 캐롤의 주소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그 중년 여성과 다시는 못 만났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가능성 안에서 캐롤과 테레즈는 지금 다시 시작한다.

* 위 글은 '드미트리'님이 알지 미디어에 투고한 글입니다. 위 글의 저작권은 '드미트리'님께 있고, 무단복제 및 전재 –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알지 미디어 오피니언 섹션에 알찬 비평·리뷰를 투고해주시면, 네이버 포스트, 카카오 1boon 등 당사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홍보해드립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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