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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궁을 산책하는 방법

조회수 2020. 8. 16.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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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과 북촌에 사는 이들에게 궁촌 산책에 대해 물었다.

최성우 보안여관 대표 

생명이 없는 사물에도 나름의 음악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걸은 길에는 그 길의 음악과 리듬이 있을 것이다. 1억8000년 전 중생대 화강암인 선바위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의 리듬은 무엇일까? 지금은 아스팔트로 덮인 땅 아래서도 살아 있을까? 산책은 ‘보안1942(보안여관)’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이 심었다는 백송 터를 지나 115년 된 배화학당(배화학원), 100년 된 매동초등학교를 지난다. 선바위로 올라가는 갈림길에서 만나는 인왕산 남쪽 능선은 화강암 풍화지형의 극치다. 이 길에서는 두 다리를 일정한 보폭에 맞추려는 주체적 노력을 잠시 중단한다. 땅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나를 걷게 하는 리듬을 타며 걸어본다. 박완서 선생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현저동 옥바라지동네에서 매동초등학교로 가는 길에 들었다’며 언급한 굿당 소리는 국사당에서 나는 소리였을 것이다. 국사당과 선바위를 바라보자. 흔들리는 신(神)들이 판상절리와 수직절리의 화강암 바위 속에 숨어 들려주는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자. 첫새벽, 석굴암에 올라 구름 위에 앉은 듯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서울의 옛 도성 자리를 바라보자면, 익숙한 서울이 신천지로 다가온다. 

손정민 일러스트레이터 

산책은 아이처럼 자란다. 산책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집에서 나와 청운초등학교 삼거리에서 무궁화동산 쪽으로 걸어가 윤동주문학관까지 올라간 뒤 청운문학도서관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다시 집으로 왔다. 그러다 청운공원 너머에 있는 인왕산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조금씩 산책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는 그 계절, 그 시기에만 볼 수 있는 꽃을 기다리는 기쁨에 빠졌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난한 겨울의 끝이 오면 청운중학교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있는 목련 나무에 꽃이 피길 기다린다. 윤동주문학관으로 올라가는 길 양편으로 가득한 아카시아, 라일락을 기다리고, 청운 벽산빌리지 옆을 가득 채우는 연보라색 등나무꽃, 벚꽃과 겹벚꽃, 청운문학도서관 담벼락에 하늘거리며 잠시 피었다 지는 분홍과 흰색의 작약, 노란 대문 집의 으아리꽃, 초봄 가온다리에서 보면 인왕산 사이사이에서 반짝이는 진달래, 색색의 장미꽃과 인왕산 숲길 곳곳에서 진한 향을 내뿜는 찔레꽃을 기다린다. 옥인동 주택가에는 국경일을 지켜 집 앞에 꼭 태극기를 꽂아두는 하늘색 대문 집이 있다. 그 집엔 올가을에도 빨간 가을 장미꽃이 필 것이다. 그날의 산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안동선 프리랜서 에디터 

서촌에는 다채로운 시간의 겹이 드리워져 있다. 1936년 스물두 살의 서정주가 기거하며 함형수, 김동리 등과 전설적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호를 만든 보안여관에서 산책을 시작한다. 영추문을 등지고 좌회전해 팩토리2, 리안갤러리 서울,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살핀다. 6차선 도로를 건너면 다시 한 세기 전의 풍경이 펼쳐진다. 우리은행 뒷골목에 이상이 큰아버지 댁에 입양되어 스물네 살 때까지 지낸 이상의 집이 있다. 화가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가 야수파의 강렬함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절친인 ‘모던 보이’ 이상과 ‘조선의 툴루즈 로트렉’ 구본웅이 걸었을 거리를 지나 배화여자대학교 못 미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이상범 가옥이 나온다. 이상범이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해 한국적 산수화를 완성한 30대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던 집의 꽃담이 정겹다. 수성동 계곡으로 향하는 길 어귀,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다. 이상범을 사사한 박노수가 1970년대부터 30년간 지내며 작품 활동을 한 이층집, 현재는 박노수미술관이 된 곳이다. 그곳에 걸린 화가의 그림은 인왕산 기슭의 청명한 여름을 유감없이 담고 있다. 

한량 작가 겸 에어비앤비 호스트 

걷고 싶을 때면 일단 커다랗게 펄럭이는 깃발을 향한다. 초록색 바탕에 노란 마름모, 그 안에 푸른 지구가 떠 있는 브라질 국기. 여름밤에 걸맞은 색채다. 브라질 대사관 앞에서 청와대 검문소를 만나면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조선 시대에 8명의 판서가 나왔다는 동네, 팔판동이다. 고개만 들면 경복궁이니 당시 판서들의 입지야말로 진정한 직주근접이라 할 수 있겠다. 길지 않은 골목에는 1940년 문을 연 유서 깊은 정육점, 조그만 슈퍼, 김밥집이 있다. 그 사이사이 편집숍과 갤러리, 프렌치 레스토랑, 공방이 숨어 있다. 익숙하고 편한 가게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들뜬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팔판길 끝에서 총리 공관을 오른편에 두고 오르면 분위기가 한결 고즈넉해진다. 어린이집과 나란히 자리한 갤러리들. 늦은 밤이면 전시를 준비하는 작가의 등을 엿볼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사교성 좋은 고양이가 무릎 아래서 서성일지도 모른다. 춘추관 앞 횡단보도를 지나 경복궁의 등을 따라 걷는다. 뒤를 돌아보면 북촌의 언덕, 왼편으로는 궁궐의 돌담, 오른편으로는 청와대다. 신무문을 지나면 봉황이 날개를 편 분수대가 보인다. 공원에서는 동네 꼬마들이 여름밤을 가쁘게 보내고 있다. 킥보드와 자전거가 뱅글뱅글 돌고 그 위로 셔틀콕이 난다. 24시간 경계 근무를 서는 경호원들, 총총 걷는 강아지들, 모두의 이마 위에 공평히 드리운 인왕산. 북촌의 밤이 흐른다. 

박세회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북촌에 집을 마련하고 새로 생긴 습관이 산책이다. 예전 같았으면 농구공이나 테니스 라켓을 들고 코트를 찾을 주말 아침에 반드시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걷는다. 산책의 거점은 거의 매번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주변에서 열리는 미술 전시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경복궁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현대갤러리, 금호미술관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학고재갤러리, 아라리오갤러리, 국제갤러리가 기다리고 있다. 급속 충전 장치가 설치된 테슬라의 슈퍼 차저 스테이션처럼 갤러리 고어들을 위한 감성 충전소 밀집 지역인 셈이다. 다만 산책의 시작부터 아이스커피를 사면 귀찮아진다. 대부분의 갤러리가 음료 반입을 금지하기 때문. 갈증을 참고 바라캇 서울을 지나 삼청파출소를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올라가다 간판 없는 드립 커피숍에서 아이스커피를 한 잔 사서 바로 옆에 있는 세계장신구박물관 쪽으로 꺾어 언덕을 올라가면 북촌의 랜드마크인 삼청동 코리아게스트하우스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그 언덕에서 석양이 드리울 때 서촌 쪽으로 보이는 궁촌 풍경은 눈물 나게 아름답다. 한적한 정독도서관 뒷길, ‘찐’ 한옥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 내려오면 김태희와 비가 결혼한 가회동성당이 있는 가회동 길이 나오고, 그 거리에는 나들이객이 잔뜩 있다. 이 비밀의 길을 돌아 나들이객과 합류해 우드앤브릭과 정독도서관 정문을 거쳐 다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한다. 정독도서관 뒷길에서 내려와 북촌에서 가장 번화한 이 길을 나들이객과 함께 걷다 보면, 현지인만 아는 비밀 루트를 미리 탐험한 우쭐한 관광객의 기분을 즐길 수 있다.

 

노준구 일러스트레이터

북촌은 외국인의 여행 가방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덕분에 낮에는 여행하는 기분에, 밤에는 한옥들이 자아내는 고즈넉한 정취에 한껏 빠져볼 수 있다. 저녁을 먹은 후 동네 한 바퀴를 느긋하게 걷는다. 종로1번 마을버스 ‘빨래터-고희동미술관’ 정거장에서 출발해 원서고개와 중앙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오르막길 왼편에 난 첫 번째 골목길로 접어든다. 북촌로12길이다. 가회어린이집을 지나 큰길인 북촌로가 나오면 왼쪽으로 돌아서 걷는다. 모퉁이에 있는 GS25에서 왼쪽 골목길로 들어가 재동초등학교 후문을 거쳐 조금 걷다 보면 계동길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두루카페가 있다. 딱히 무엇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새로운 풍경을 그저 따라간다. 한옥집들 사이에 난 좁은 골목길, 잔잔한 조명으로 밝아진 작은 공방과 카페, 궁궐의 돌담과 그 안에 자리한 나무숲의 어두운 실루엣은 오래되었지만 낡지 않았고, 익숙하면서도 매번 새롭다. 카페가 있는 골목길로 들어가 아주 좁은 골목길을 지나면 대동세무고등학교 후문으로 연결된다. 가끔은 낮에 같은 길을 걷는다. 낮과 밤의 모습은 확연하게 다르다. 조용한 밤 산책을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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