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드라이빙 메모리 (5) - 현대 쏘나타

조회수 2021. 5. 18. 16: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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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대'의 출발점

프롤로그 – 세계로 눈 돌린 국산차

1980년대는 국산차에 있어서 큰 이정표가 세워진 시기다. 가장 두드러진 이정표는 수출산업으로의 발전이었다. 이 이정표를 따라 새로 난 길을 맨 처음 달려 나간 차는 현대 포니 엑셀이었다. 물론 수출이라면 70년대 포니가 중남미 에콰도르에 수출되고 뒤이어 유럽으로 그리고 포니Ⅱ와 스텔라가 유럽은 물론 안전규정이 가장 앞섰던 북미에 수출되고 있었지만, 말이 북미지 변방인 캐나다 시장에 진출한 정도였다.

현대 포니 엑셀 (북미 수출형)

80년대 당시 가장 크고 기준이 높은 시장인 미국 진출의 물꼬를 튼 것은 포니 엑셀이었다. 포니 엑셀은 미국 소형차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오일쇼크 이후 미국 경제형 소형차 시장을 주도했던 일본 소형차들의 파이를 크게 잘라 왔다.

한편 소형차 중심의 국내 시장에서도 현대는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고급차(중형차) 시장에서 만큼은 대우자동차에 뒤쳐져 있었다. 스텔라로 경제형 중형차(1,500cc급 소형 엔진을 얹은 중형차) 시장까지는 휘어잡았지만 진정한 고급차의 지위를 차지하는 2,000cc급 중형차 시장에서는 로얄 시리즈에 밀리고 있었다.

수출이나 내수 전체 판매량에서 톱의 자리에 올랐지만 상징적 고급차 시장에서의 열세에 현대가 내놓은 대안은 큰 엔진과 호화 장비를 얹은 고급차 소나타였다. 

실패에서 시작해 세계 시장을 겨눈 야심작

현대 소나타 (Y1)

중형차급 체구를 가진 스텔라를 베이스로 범퍼에 크롬 커버를 덧대고 100마력이 넘는 1.8L와 2.0L 미쓰비시 시리우스 엔진을 얹고 여기에 파워 스티어링 휠은 물론 4단 자동변속기에 크루즈 컨트롤, 전동 조절식 아웃 사이드 미러, 헤드램프 워셔, 파워 시트 등 당시로는 신기한 여러 가지 장비를 더한 소나타는 확실히 현대의 기술적 우위를 보여주는 쇼케이스 고급차였다. 

그러나 이전 코티나 마크Ⅴ를 베이스의 작은 차체를 부풀린 스텔라의 차체를 그대로 써 대우 로얄 살롱은 물론 로얄 프린스보다 외관에서 밀렸고 시장에서도 ‘비싼 스텔라’로 비쳤다. 당연히 판매량도 형편없었다. 그렇게 현대의 첫 중형차는 씁쓸한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서울 올림픽을 몇 달 앞둔 1988년 초여름, 당시 자동차 전문지 기자였던 필자에게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 갓 수습 딱지를 뗀 필자에게 울산으로 내려가 새로 발표될 소나타를 타고 서울까지 시승하고 오라는 취재 명령을 받았다. 워낙 죽을 쑤었던 소나타의 후계라니....

현대 쏘나타 (Y2)

먼저 현대는 조립라인과 프루빙 그라운드까지 모두 보여주었다. 당시 울산공장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최신 시설이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공장 투어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마치 두메산골서 평생을 살다 서울역 광장에 처음 선 시골뜨기가 느끼는 그런 감정보다 몇 배나 큰, 신기함을 넘어선 감동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공장 투어의 감동보다는 새로운 소나타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마침내 점심을 마치고 프루빙 그라운드에 세워진 은색 차를 마주하게 되었다. 멋졌다. 매끈한 실루엣에 크면서도 단단함이 느껴졌다. 당시 국산차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의 아반떼보다 작은 차체지만 80년대 후반 세계적인 중형차보다도 더 큰 차체였다. 주지아로 디자인 특유의 덤덤한 듯 비범한 디자인이 주는 느낌은 1년 먼저 등장했던 1세대 그랜저보다 훨씬 현대적(modern)이었다. 

현대 쏘나타 (Y2)

당시 일본차와 국산차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토요타 코롤라, 혼다 시빅에 한참 밀리는 미쓰비시 미라지조차도 현대 포니 엑셀보다 나았던 시절이었다. 세계 시장에서 중형차급의 토요타 캠리나 혼다 어코드는 이미 인정받고 있던 시절, 그런 강자들을 겨누고 등장한 소나타는 시각적으로 오히려 그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 차는 전륜구동 방식의 그랜저를 바탕으로 수출 전략형 중형차로 개발되어 미국 딜러들의 의견에 따라 실패작이었던 이전 소나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큰 차체임에도 0.32라는 수준급 공기저항계수에 120마력 시리우스 엔진에 4단 자동변속기로 시속 174.5km까지 달릴 수 있고 탠덤 부스터를 써 제동력이 높고... 어쩌구...’ 현대 홍보실 직원의 설명은 필자의 귀에 닿기도 전에 울산의 바닷바람에 날려갔다. 

'소나타' 말고 '쏘나타'

'준세이(じゅんせい)'라는 일본말이 있다. 우리말로 하자면 순정(품)이란 뜻이다. Y2 소나타를 보면서 떠오른 단어가 준세이였다. '웬 틀닦질'이냐는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지만 32년 전 그 순간엔 그랬다. 필자같이 60~70년대 국산차를 접해본 사람들은 어렴풋이 공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표현엔 변명 내지는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60~70년대 국산차들은 포니를 제외하곤 모두 외국모델을 들여와 조립 생산한 것들이었다. 이와 함께 일부 부품을 국산부품으로 대체했지만 그 수준이 큰 차이를 보였다. 신진자동차의 크라운이나 코로나와 토요타의 크라운과 코로나는 분명 같은 모양이었지만 만듦새뿐 아니라 디테일이 달랐다. 한마디로 국산차들이 시각적으로도 훨씬 어리숙했다. 

그래서 국산차 오너들 중 몇몇은 일본의 오리지널 파츠를 구해 바꿔 달았다. 단지 라디에이터 그릴, 사이드 미러, 테일라이트만 바꾸어도 확실히 달라 보였다. 그런 차이를 보고 신기해할 때 그 차의 오너들이 자랑스레 내뱄던 말이 “이거 준세이야”였다. 그래서 필자 또래의 꼰대는 ‘준세이’라는 말에서 ‘제대로 만들어진’ 혹은 ‘값어치 있는’ 같은 뉘앙스를 느낀다. 

현대 쏘나타 (Y2)

차에 올랐다. 이미 밖에서 캠리나 어코드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소나타에 오르자 넓은 실내가 반긴다. 캠리나 어코드는 물론 윗급인 그랜저보다 더 넓다. 당시 일본차들은 차체 너비가 1,700mm가 넘으면 대형차로 구분되어 세금을 많이 내게 되는 법규 때문에 대부분의 차들이 1,700mm 미만의 너비를 가졌지만 소나타는 그런 규제에서 자유로웠다. 게다가 체급이 큰 차들이 즐비한 미국 시장을 정조준했기에 더 균형 잡히고 당당한 프로포션을 가질 수 있었다. 

현대 쏘나타 (Y2)

넓은 공간감에 감탄하면서 운전석에 올랐다. 시트의 느낌도 달랐다. 정말 잘 만든 시트였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캠리나 어코드보다 안정감과 안락감이 한 수 위였다. 20년 뒤 필자가 기아 뉴 오피러스를 시승할 때 거슬린 것이 Y2 소나타보다 물렁한 서스펜션과 안락하지 못한 시트였다. 그만큼 소나타의 시트는 상당히 좋았다. 

당시 현대 마케팅팀은 소나타의 한글 표기를 쏘나타로 바꿨다. 분명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자면 소나타가 맞는데 쏘나타로 바꾼 이유가 경쟁사 세일즈맨들이 ‘소나 타는 차’라고 비하해서라는 얘기가 있지만 필자가 당시 현대마케팅팀에 있었어도 쏘나타로 바꾸고 싶었을 정도로 Y1 소나타와 Y2 쏘나타는 전혀 다른 차였다. Y2는 세계를 겨냥한 야심작임에 틀림없었다.

시동을 걸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너무 조용하다. 캬뷰레터 방식인 Y1의 소음과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 정숙성으로 정평난 어코드나 캠리와 같은 수준이었다. 출발도 매끄럽다. 120마력(나중에 출력 표기방식이 바뀌면서 111마력) 엔진이 차를 힘차게 밀어낸다. 5,000rpm의 고회전까지 거슬리는 소리 없이 매끈하게 돈다. 당시 느낌은 엔진이 아니라 전동모터 같은 소리로 느껴졌다. 

갓 지어진 울산 프루빙 그라운드에서 다양한 노면을 달려도 진동을 잘 거스른다. 그러나 선회로에 들어서자 가벼운 스티어링 반응에 더해 차체 안정감의 한계가 느껴진다. 이 상황에서는 캠리·어코드와의 차이가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조차 기특했다. ‘미국 수출형이니까 괜찮아’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현대 쏘나타 (Y2)

울산공장에서 나와 서울로 향했다. 처음 일반도로에 들어선 쏘나타는 가뿐한 반응을 보였다. 선회로에서 보여줬던 불안감은 이내 사라졌다. 물론 횡풍이 불거나 큰 고속버스나 트럭 옆을 지날 때에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여느 국산차보다 나은 거동이었다. 

400km를 달려 사무실까지 올라오는 코스를 일부러 국도와 지방도로도 달려가며 600km로 늘려 쏘나타와의 데이트를 즐겼다. 400km 남짓 달린 상태에서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우는데 33L 정도 들어갔다. 고속도로뿐 아니라 국도나 지방도로까지 달리며 큰 정체는 없었지만 L당 12km 넘는 연비에 또다시 감탄했다. 당시 중형차라면 L당 10km의 기록도 내기 힘든 시절에 공인연비와 거의 일치하는 연비를 보여주었다. 

에필로그 – 자동차 과소비의 원흉(?)

쏘나타는 등장과 함께 큰 인기를 모았다. 출시 당시 가격이 1.8i 모델이 906만 원(5단 수동변속기 기준), 2.0i 모델이 1,206만 원(4단 자동변속기 기준)였으니 아무나 다가설 차는 아니었다. 하지만 쏘나타는 단숨에 현대의 염원이었던 중형차 시장 평정을 이루어냈다. 필자도 당시 기본형을 구했다. 88 올림픽 지원차를 할인해 파는 프로그램을 통해 100만 원가량 할인된 값으로 샀다. 그런 할인 가격도 당시 필자 연봉을 넘었다. 

현대 쏘나타 (Y2, 북미 수출형)

그런데 이제는 쏘나타를 넘어 그랜저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가 됐다. 우리나라 경제나 가계 수준에 비춰 볼 때 자동차에 관한 한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과소비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런 과소비의 출발점은 Y2 쏘나타였다.

사족

아는 분이 대기업 상무에서 전무로 진급하며 업무용 차가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즐거워하셨다. 그런데 업무용 차는 Y2 쏘나타 1.8에서 기아 콩코드 2.0으로 바뀌었다. 그분은 좋아했지만 필자는 안쓰러웠다. 여유로운 뒷좌석 공간을 가진 Y2 쏘나타에서 당시 엘란트라 뒷좌석만큼 옹색한 콩코드에 오르면서 무엇이 좋았을까? 1,000만 원이 넘는 비싼 차라서?

글 한장현 (자동차 칼럼니스트, 대덕대학교 자동차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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