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전쟁, 적을 제압하는 종이폭탄 삐라

조회수 2019. 6. 27. 08: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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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전단, 인터넷, SNS 속 솔깃한 문구와 영상들….’

눈만 뜨면 쏟아지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광고는 언제 어디서나 피할 수 없는 존재다.

사람의 마음을 확 사로잡기 위해 탄생한 광고. 이 광고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일까?

세월을 거슬러 69년 전 발발된 6·25전쟁 당시에도 이 땅에는 총칼 못지않게 치열한 광고 전쟁이 펼쳐졌다.

출처: DVIDS 제공
6.25전쟁 때 삐라 살포하는 美 C-47 수송기. B-29 슈퍼포트리스도 사용되었는데, 비행당 100만 장의 전단지를 배포할 수 있었다.

"적을 삐라로 묻어버려라"… 3년간 종이폭탄 40억 장 살포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는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 때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은 공산군에 맞서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그리고 이 때 유엔군이 전투 못지 않게 주목했던 것이 바로 삐라 제작 및 살포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왜 유엔군은 삐라에 주목했던 것일까.


바로 지금의 광고 카피처럼 사람들의 관심과 욕구를 자극해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삐라는 적에게는 엄청난 공포와 무력감을 동시에 준다.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며 "이에 착안한 미군이 6·25전쟁 당시 심리전의 도구로 삐라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고 전쟁기념관 서원주 해설부장은 말한다. 

출처: DVIDS 제공
6.25전쟁 때 삐라 살포를 준비하는 군인들.

당시 미 국방부 장관 프랭크 페이스는 "적을 삐라로 묻어버려라"는 말로 삐라 살포를 지시했다.

매주 전투기로 북한에 뿌려진 삐라는 2백 만장. 절정기엔 매주 2천 만장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6·25전쟁이 벌어졌던 3년 동안 자극적인 문구가 적힌 삐라는 무려 40억 장 정도 뿌려졌다. 이는 한반도 전체를 수십 번 덮을 수 있는 실로 엄청난 물량이다.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6·25전쟁에 참전했던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예비역 대장)은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당시 T-6 훈련기에 삐라를 싣고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로 향했다. 북악산 방면으로 향하던 중 서울 상공에 도착해 그 일대를 선회하며 삐라를 뿌렸다."고 증언했다.

소리 없는 전쟁… ‘종이폭탄’의 효과


삐라는 자극적인 문구와 삽화가 가득하다.

그래서 한번 보면 뇌리에 깊숙히 자리잡는다.

요즘 세대에겐 낯설지만, 과거 마을 뒷산 등지에서 삐라를 주워본 경험이 있는 중장년이라면 ‘작지만 강렬한’ 삐라의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남아있을 것이다.

이는 삐라 속 문구들이 적군의 의식 변화를 줘 행동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철저한 계산 아래 제작됐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당시 삐라를 살펴보면 ‘유엔은 제군이 넘어오기를 대환영이다. 얼어 죽기 전에, 다쳐 죽기 전에, 굶어 죽기 전에, 어서 도망하라!’고 공포를 심어주기도 하고,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선택은 자유다’며 문구로 적의 전투의욕을 꺾었다.

특히 보급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군을 겨냥한 맞춤형 전략도 주효했다. 바로 북한군이 삐라로 담배를 말아피는 것을 착안, 삐라 종이를 담배를 말 수 있는 재질로 제작해 살포한 것. 이는 한 번이라도 더 북한군의 눈에 띄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적군의 귀향과 투항을 유도하는 효과로 이어졌다.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6.25전쟁 때 사용된 삐라.

서 해설부장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라’라고 설득해 적들의 전투 의지를 꺾고, 또한 북한 주민들에게는 북한 정권의 실상을 알려 국군과 유엔군에게 협조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며 "특히 ‘안전보장증명서’라는 형식의 삐라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투항하는 기능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삐라는 단순히 적을 동요시키는 ‘종이폭탄’으로 6·25전쟁의 휴전 협정까지 대한민국을 지키는 숨은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긴 세월만큼 이제는 전쟁기념관 전시실 한 켠에서 역사의 한 조각으로나마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지만, 전쟁의 상흔을 딛고 한반도 평화 시대를 열어가는 우리에게 삐라의 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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