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1개월 동안 이어진 6·25전쟁 포성이 멈췄다

조회수 2018. 7. 26. 13:1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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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유엔군·공산군 수석대표 판문점서 정전협정 조인

한반도 모든 전선에서 전투행위 중지…불완전한 평화 시작 

전후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선 대한민국, 놀라운 경제성장 이뤄

출처: 국방일보 DB
1953년 7월 27일 오전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조인식

정전협정은 3년1개월 동안 전개된 6·25전쟁의 포화(砲火)를 멈추도록 한 전투중지 협정서다. 정전협정은 65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측 수석대표와 공산군 측 수석대표에 의해 판문점에서 조인됨에 따라 그 효력이 발생했다 그런데 조인식은 자못 심각했다

그날 오전 10시 정각, 제159차 본회의장인 판문점에 설치된 정전협정 조인식장의 동쪽 출입구로는 유엔군 측 수석대표인 해리슨(William K. Harrison) 미 육군중장 일행이 입장했고, 때맞춰 공산군 측 수석대표인 남일(南日) 북한군 대장 일행이 서쪽 입구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양측 대표는 인사는 물론이고 악수조차 나누지 않았다

출처: 국방일보 DB

악수나 인사 한마디 없이 끝난 조인식


정전협정 서명을 위해 양측 수석대표들이 입장하자 곧바로 조인식이 진행됐다. 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협정문서 9통과 부본 9통에 양측 수석대표는 각각 서명을 시작했다. 양측 선임장교는 상대편 대표가 서명한 협정 문서를 서로 교환했다. 양측 수석대표는 교환된 문서에 다시 서명했다. 조인식은 그렇게 말없이 진행됐다. 시종 딱딱한 분위기였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로 서명에만 열중했다. 입장한 지 불과 2분 만인 10시12분 양측 수석 대표들은 서명을 마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흔한 악수나 인사 한마디 없이 쫓기듯 그대로 퇴장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인 해리슨 중장은 그나마 나았다. 그는 2∼3분간 기자들과 대화를 나눈 후, 유엔기지가 있는 문산으로 떠났다. 서명을 마치자마자 퇴장한 남일은 소련제 지프를 타고 조인식장을 빠져나갔다.

양측 수석대표에 이어 유엔군사령관과 공산군 측 사령관에 의한 조인식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행해졌다. 대한민국을 포함해 유엔군 측을 대표한 유엔군사령관은 그날 13시에 유엔기지 내 문산극장에서 서명을 했다.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사령관은 브리스코 미극동해군사령관, 웨이랜드 미극동공군사령관, 테일러 미8군사령관, 앤더슨 미5공군사령관, 최덕신 한국군 대표, 그리고 16개국 참전 대표들과 함께 식장에 들어와 정전협정에 확인 서명했다.

북한군 최고사령관인 김일성(金日成)은 안전을 고려해 이날 22시에 평양에서 확인 서명했고,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다음날인 7월 28일 9시30분에 개성으로 내려와 확인 서명했다. 이로써 3년 1개월 4일, 1129일 동안 전개됐던 6·25전쟁은 멈추게 됐다. 7월 27일 22시를 기해 한반도의 전 전선에서는 모든 전투행위가 중지됐다. 정전(停戰)이었다. 이때부터 한반도에는 정전체제가 형성됐다. 불완전한 평화였다. 

정전협정 체결 후 北 축제 분위기


정전협정 체결이 끝나자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의 반응은 엇갈렸다. 평양에서는 북한군과 중공군 수뇌부가 모여 술판을 벌이며 밤새 춤을 췄다. 그리고 참전한 중공군 50여 만 명에게 북한의 훈장과 표창을 수여하며 은혜에 감사했다. 북한의 ‘조국해방전사’에서는 “조선에서의 정전 실현은, 우리 인민과 인민군대가 강대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고 쟁취한 역사적 승리”라며 정치선전을 했다. 그때부터 북한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을 전쟁에서 승리한 날이라는 의미에서 ‘전승절(戰勝節)’로 삼고 기념했다.

반면 대한민국과 미국은 공산군 측의 반응과는 확연히 달랐다.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휴전으로 끝난 6·25전쟁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딱히 승리라고 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패배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끝난 전쟁’이었다. 그런 탓인지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도 정전협정에 대한 메시지에서 ‘승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전협정을 다만 기도와 감사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도 “미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조인한 최초의 미군 사령관”이라며 침통해 했다. 그 때문인지 전후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6·25전쟁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에서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저평가했다.


출처: 국방일보 DB
육군 최전방 비무장 지대 모습

‘잊혀진 전쟁’에서 ‘잊혀진 승리’로 재평가


휴전을 극렬히 반대했던 대한민국은 더 심했다. 변영태 외무부 장관은 정전협정을 두고 “자유세계가 공산세계에 바친 항복문서”라며 분통해 했다. 국토통일을 목표로 싸운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조국의 분단을 다시 받아들여야 할 정전협정을 놓고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대장은 그때의 상황을 회고록에서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클라크 장군은 비감한 표정이었고, 국군장병들은 침통한 표정이었으나, 그것을 불가항력의 현실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얻는 것 없이 잃기만 한 허망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국민들도 넋을 잃었다. 전 국토는 폐허가 됐고, 국가기간시설과 산업이 무너졌다. 집과 학교도 대부분 파괴됐다. 거기다 무수한 인명이 죽거나 다쳤다. 거리에는 상이군인과 전쟁고아, 미망인이 넘쳐났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은 더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런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났고, 정전협정 체결 후 65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뤘다. 한강의 기적이었다. 세계가 경이로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 무렵 6·25전쟁에 대한 평가도 더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을 도왔던 미국이 먼저 행동을 취했다. 오바마(Barack H. Obama) 대통령이 2009년 7월 27일 정전협정일을 ‘6·25전쟁 참전용사 휴전기념일’로 정하고, 성조기를 조기로 게양하도록 했다. 미국 의회도 2013년 정전 60주년 기념식을 하고, “미국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켰고, 한국은 민주주의와 번영을 일궜다”며 전쟁에서의 승리에 무게를 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사회도 6·25전쟁을 ‘잊혀진 전쟁’ 대신 명예로운 전쟁(Honored War) 나아가 ‘잊혀진 승리(Forgotten Victory)’로 재평가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2013년 정전 60주년을 맞이해 7월 27일 정전협정일을 ‘유엔참전일’로 정하고 기념했다. 6·25전쟁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유엔이 참전한 국제전쟁이라는 의미에 무게를 뒀다. 이는 전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바탕으로 한 굳건한 한미동맹의 뒷받침 속에서 대한민국이 이룩한 급격한 국력 신장 덕분이다.


대한민국 발전의 버팀목, 60만 국군장병


대한민국이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든든한 60만 국군장병들이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체결 후 국군은 북한의 각종 도발에도 끄덕하지 않고 국토방위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국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철통같이 지키고,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국군이 존재하는 유일한 가치이자 사명일 것이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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