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빨간 마후라, 그날의 하늘을 말하다

조회수 2018. 6. 24.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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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기간, 129명의 출격 조종사가 난무하는 대공포와 자욱한 포연을 뚫고 조국 영공을 누볐다. ‘조국을 위해 내 목숨 하늘에 바치겠다’는 각오로 창공을 날던 패기의 청년들은 어느덧 100세를 바라보는 노장이 됐다. 


이제 그 귀중한 육성을 들을 수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지 않다. 올해는 6·25전쟁 68주년이다. 백발의 빨간마후라가 들려준 ‘그날의 하늘’에 대한 생생한 회고와 증언을 전한다. 

출처: 국방일보 한재호 기자
공군 6·25 출격조종사 초청행사를 마치고 김두만(가운데) 예비역 대장, 이배선(오른쪽) 예비역 대령, 임동선 예비역 중령이 6·25 참전 당시 조종했던 F-51D 무스탕 전투기 모형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뒤로하고 비행임무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 김두만(92) 예비역 대장이 국방일보와 만나 6·25 전쟁 당시 자신을 비롯한 출격 조종사들의 심경을 이같이 회고했다. 1949년 4월 장교로 임관한 김 장군은 그해 10월 대한민국 공군이 창군하는 시점부터 공군과 역사를 줄곧 함께했다.  

출처: 공군 제공
김두만 예비역 대장의 과거 사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김 장군은 당시 한국 공군이 보유한 유일한 항공기였던 T-6 훈련기와 L-5 연락기를 타고 적진으로 출격했다. 


"1950년 7월 1일 저녁 무렵, T-6 훈련기에 ‘삐라’를 싣고 북한군에 점령된 서울로 향했습니다. 구름 위를 날아 북악산 방면으로 향했고 서울 상공에 도착해 선회하며 삐라를 뿌렸죠. 삐라에는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으니 머지않아 공산군을 격퇴할 것이다. 참고 견뎌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적군의 지배 아래 고초를 겪을 시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서울 상공에서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별이 붙어있는 것을 봤어요. 분통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김 장군은 1950년 10월 2일부터 대망의 F-51 전투기에 탑승해 전투조종사로서 임무를 수행한다. 노장은 무스탕에 처음 올랐던 당시의 느낌을 ‘황홀해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F-51 무스탕을 처음 타게 됐을 때의 감격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힘차게 발사되는 6문의 기관포, 6발의 5인치 로켓, 2발의 500파운드 폭탄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죠. 이 전투기와 더불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출처: 공군 제공
100회 출격을 달성하고 귀환한 김두만 당시 소령에게 동료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있다.

김 장군은 1952년 1월 11일 금강산 일대 적군의 보급기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귀환한다. ‘공군 최초 100회 출격’이 달성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 장군은 기지로 돌아올 때까지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만큼 주어진 임무에만 오롯이 집중했던 것이다. 


"나는 기록(100회 출격)에 대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어요. 그날 작전을 마치고 모기지로 귀환하니 동료들이 달려와 기록 달성을 축하해줬어요. 그때까지는 100회 출격 기록 달성 날이란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죠."  

전쟁 중 비행임무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김 장군은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1951년 8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1951년 10월 대한민국 공군 단독 출격작전, 1952년 1월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 등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사실, 전쟁 중 전투임무를 수행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출격 조종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조국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함께, 위기에 빠진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말겠다는 사명감이 솟구쳤습니다."


공군사관학교 1기로 전시 임관했던 이배선(88) 예비역 대령이 6·25전쟁 첫 출격 당시 느꼈던 복잡한 감정이다. 1949년 6월 공사 1기로 입교한 이 대령은 사관생도 시절 6·25전쟁을 맞았다. 단 한 명의 전투조종사가 절실했던 시절, 이 대령은 비행훈련 과정을 수료한 즉시 강릉에 있는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치됐다. 노장은 모래바람 가득했던 1952년 12월 강릉기지의 풍경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강릉기지는 매우 열악했습니다. 해안가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와 숙소와 식당에 온통 모래가 가득했어요. 제대로 된 휴게실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죠.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출격 준비에만 전념하는 믿음직한 선배 조종사들이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출처: 공군 제공
이배선 예비역 대령의 과거 사진.

1952년 12월 14일 이 대령에게 첫 출격명령이 떨어진다. 사리원 북방 북한군 사단본부와 병력·보급물 집적소를 공격하는 임무였다.


"총 4개 편대 16대로 구성된 공격편대군 중 (나는) 4편대 2번기로 참가했어요. 철원 상공을 지나자 적의 고사포탄 폭발 연기가 전투기를 가득 둘러싸기 시작했죠. 마치 젖먹이 아기가 엄마를 찾아다니듯, 나는 필사적으로 편대장의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쫓아다녔던 것 같아요. 적의 공격을 뚫고 목표 상공에 도달한 이후 편대별 공격에 들어갔어요. 선배 조종사들의 솜씨와 기량에 감탄한 나는 불안과 공포감도 잊은 채 목표물 명중에만 전념했어요. 우리 공격편대군의 폭격에 지상 목표물 여러 곳에서 큰 폭발과 화염이 발생했죠. 임무가 끝나고 모기지로 돌아와 착륙 후 엔진을 끄고 나서야 사선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와 함께,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꼈죠."  


이 대령에겐 죽기 전까지 절대 잊을 수 없는 전쟁의 기억이 있다. 같은 공사 1기 동기생이었던 전우 고(故) 임택순 대위의 마지막 비행이다. 1953년 3월 6일, 이 대령과 임 대위는 함께 출격했다. 그러나 모기지로 돌아온 것은 이 대령 혼자였다.


"당시 나는 임택순 중위(당시 계급)와 같은 편대로서 고성 북쪽 지역 아군 지상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어요. 공격지점에 도달해 2번기 임 중위의 공격이 끝나고 3번기인 내가 공격을 개시했죠. 날개 끝이 목표점을 통과한 후 90도로 급강하 선회해 목표를 조준한 뒤 적절한 고도에서 폭탄을 떨어뜨린 순간, 목표지점 일대에서 큰 폭발과 화염을 목격했어요. 처음에는 적의 탄약 저장소 같은 곳에 폭탄이 우연히 명중된 것이라고 여겼죠. 그러나 공격 이후 임 중위의 2번기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제서야 내가 봤던 폭발과 화염이 임 중위의 전투기가 추락하며 생긴 것임을 깨달았죠. 나의 동기생 임택순의 별명은 ‘딱총’이었습니다. 온화하면서도 순진한 친구로 훈련이 끝나면 휴가 중 만난 사랑하는 애인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곤 했죠. 기지로 귀환해 전사한 동기생의 유품을 정리했던 그때의 비통함과 애절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동료 조종사 모두가 내가 죽은 줄 알고 있다가 살아 돌아온 날 보더니 깜짝 놀라더군요."  


임동선(92·조종1기) 예비역 중령은 6·25 전쟁 전투 출격 임무 수행 중 적에게 피격돼 필사의 탈출로 목숨을 구했다. 1952년 8월 장교로 임관한 임 중령은 그해 9월 강릉 공군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돼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1952년 11월 2일 나는 3개 편대 12대의 공격편대군 일원으로 원산 인근의 적 보급물 집적소를 공격하는 임무를 받고 출격했습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해 일제히 지상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어요, 목표물 일대는 불바다가 되기 시작했으나, 적은 포기하지 않고 우리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죠. 그때, 갑자기 내 전투기가 적의 탄환에 피격돼 시커먼 연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임 중령은 갑작스러운 피격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기수를 남으로 돌려 아군지역으로 비행했다. "적의 탄환이 내 전투기의 연료탱크에 맞은 것으로 보였어요. 엔진의 힘이 점점 떨어져 항공기의 고도가 낮아지고, 불길은 점점 심해졌죠. 시간이 흐를수록 기체는 비행할 힘을 잃었고, 불에 휩싸여 당장 폭발할 것만 같았습니다. 위기의 순간, 저 멀리 아군 지역에 있는 간성 비상활주로가 보였어요."

출처: 공군 제공
임동선 예비역 중령의 과거 사진.

임 중령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비상활주로를 향해 비행했다. 그러나 엔진을 잃은 항공기의 힘이 따라주지 않았다. 임 중령은 결국 활주로까지 미치지 못하고 근처 갈대밭에 비상착륙하게 됐다. "착륙과 동시에 조종석에서 뛰쳐나왔어요. 전투기는 내가 탈출하고 불과 몇 초 만에 폭발해 완전히 불덩이가 됐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임 중령은 그때부터 아군 부대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사고지점부터 4시간을 걸어서 고성에 있는 육군1군단 본부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1군단에서 공군 연락장교로 근무하던 공군 조종사 이강화 소령을 만나 사고 경위를 보고했죠. 이후 1군단 본부에서 빌려준 차를 타고 모기지인 강릉기지로 귀환했습니다. 부대에 가보니 동료 조종사들은 모두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었어요. 나를 보더니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다들 깜짝 놀랐죠. 숙소에 가보니 사물함의 내 짐도 다 치워지고 없었어요."


이렇게 임 중령은 무사히 귀환했지만, 함께 출격했던 최종성 중위(당시 소위)는 임무수행 중 적의 대공포 공격에 전사하고 말았다. 임 중령은 순직한 동료 출격 조종사와 살아남은 자신 사이에 차이점은 오직 행운뿐이었다고 말했다. 


"전투출격에 나선 수많은 동료 조종사들이 적의 대공포 사격으로 인해 하늘에서 장렬하게 산화했습니다. 나는 단지 행운으로 살아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민족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함께 조국의 영공을 지키다 순직한 동료 조종사들에게 감사와 추모를 전합니다."  

출처: 국방일보 한재호 기자
이왕근 공군참모총장이 지난 22일 공군회관에서 열린 6·25 출격조종사 초청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과 공군은 선배님들의 숭고한 헌신 위에 만들어졌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 이렇게 이 자리에 함께해주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왕근 공군참모총장이 백발의 빨간마후라들을 향해 최고의 경의를 표하며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공군은 지난 22일 공군회관에서 6·25전쟁 68주년을 맞아 ‘6·25 출격 조종사 초청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제11대 공군참모총 김두만(92) 예비역 대장을 비롯한 14명의 출격 조종사들이 참석해 공군 구호인 ‘하늘로, 우주로!’를 외치며 그날의 하늘에 대한 기억과 회고를 나눴다.  

출처: 국방일보 한재호 기자
지난 22일 공군회관에서 열린 6·25 출격조종사 초청행사에서 이왕근(왼쪽) 공군참모총장이 김두만 예비역 대장과 악수하고 있다.

6·25 전쟁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창공을 누빈 출격 조종사는 모두 129명으로 전쟁 기간 23명이 순직했다. 


6·25전쟁 100회 전투출격 달성 조종사는 총 39명이며, 최초 달성자는 김두만 장군, 최다 출격 조종사는 203회의 유치곤 예비역 준장이다. 


현재 살아있는 공군 출격 조종사는 25명이다. 생존 출격 조종사의 평균 나이는 정확히 90세로 최연소자는 87세, 최고령자는 94세다. 우리 모두는 이들 백발의 빨간마후라에게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은 바로 오늘 우리가 마음껏 누리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조국의 하늘이다.  

글=국방일보 김상윤 기자
/사진=국방일보 한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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