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판문점의 역사
판문점(板門店). 이번 주 세계에서 이곳만큼 ‘핫’한 장소가 또 있을까? 오는 27일 여기서 '2018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초특급 이벤트가 열리면서 전 세계 언론의 시선이 이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분단의 상징’에서 단번에 ‘평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판문점은, 그러나 60여 년 전만 해도 인적 드문 콩밭에 불과했다.
판문점이 6·25전쟁 휴전회담을 위해 조성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당초 첫 휴전회담은 개성에서 개최됐다. 하지만 당시 개성이 북한 치하에 있었던 탓에 북한군의 무력시위가 이어지자 유엔군 측은 휴전협상 장소 이전을 제의하면서 인적이 드물고 남북 모두 접근하기 쉬운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의 평범한 시골 마을이 휴전회담 장소로 낙점됐다.
당시 민가가 4채뿐이었던 이 마을은 ‘널문리’로 불리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북쪽으로 피란 가던 선조 일행이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자 마을 백성들이 집집마다 대문(널문)을 뜯어다가 임시로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유엔군 측은 이곳의 이름 없는 주막에 중국 측이 회담 장소를 잘 찾을 수 있도록 널문리의 한자식 표기인 ‘판문점’ 간판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통상적인 명칭으로 굳어졌다.
공식 명칭이 ‘유엔군사령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인 판문점의 중심으로는 흔히 ‘휴전선’으로 불리는 ‘군사분계선’이 지나간다.
하지만 동서로 155마일(248km)에 걸쳐 철책이 세워진 다른 군사분계선 지역과 달리 철책이 없는 이곳의 분위기는 휴전 후 10여 년간 자유로운 편이었다.
쌍방 군사정전위원회 관계자들이 제약 없이 남북 지역을 갔고 남북한 장병들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다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의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정전위는 충돌 방지를 위해 폭 50cm, 높이 5cm의 콘크리트 연석을 설치하면서 자유로운 왕래는 금지됐다.
또 휴전협정 때 포로를 교환했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까지 폐쇄했다. 이후 연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남북 장병의 모습은 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하지만 콘크리트 연석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상징적 경계다 보니 판문점을 통한 귀순·망명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전 국민이 CCTV를 통해 귀순 장면을 목격한 북한군 병사 오청성의 귀순이 가장 최근 사건.
1959년에는 옛 소련의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의 평양 특파원이 취재 도중 귀순했고, 1981년에는 중립국감시위원회 소속 체코군 병사가 귀순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4년에는 김일성대학에 유학 중이던 소련 유학생이 귀순하면서 판문점 사상 최대 규모의 총격전이 벌어져 남북과 유엔군에서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판문점이 마냥 분단과 갈등의 상징에 머문 것만은 아니었다. 한반도 중심에 있지만, 남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위상 덕분에 남북 교류와 대화의 장소로 제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1971년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을 계기로 남북은 각종 회담 장소로 판문점을 활용했다. 1980년대에도 남북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 남북경제회담, 남북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등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남과 북의 중간 지점에 있는 관문 역할도 했다. 1985년 북한 고향 방문단은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갔고 남쪽으로 떠내려온 북한 주민이나 군인을 돌려보낼 때도 판문점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 '2018 남북정상회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판문점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불과 5cm 높이지만, 지난 65년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았던 콘크리트 연석을 넘어 북한 최고 지도자 최초로 남측 땅을 밟게 된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판문점이 한반도 분단과 대치의 상징에서 '평화,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나가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국민과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김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