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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작품 속에 '자화상'이 많은 이유

조회수 2020. 1. 31. 12: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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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칼로 작품엔 왜 자화상이 많을까?
'프리다 칼로'
 
이국적인 화풍과 강인한 묘사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는 눈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프리다 칼로는 독특한 화풍으로 현대와 전통의 경계를 허물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작품 뿐만 아니라 프리다 칼로의 불운했던 삶도 많은 이들 사이 회자되곤 하는데요.
 
자신만의 색채를 맘껏 뽐내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 속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화상'이 많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프리다 칼로 작품 속엔
자화상이 많이 많을까요?
프리다 칼로 작품 속에는 자화상이 정말 많습니다.
 
모두 정면을 응시한 프리다 칼로의 얼굴을 볼 수 있죠.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은 초기작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습니다.
다시 말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던 처음부터 자화상을 그렸다는 뜻이죠.
 
프리다 칼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 친구인 한 인쇄공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이 시기부터 아버지의 친구는 프리다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는데요.
 
하지만 이 당시 프리다 칼로는 예술가의 삶을 꿈꾸진  않았 죠.
과학과 신체에 관심이 많아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6살이 되던 1925년,
프리다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방과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프리다가 타고 있던 버스가 옆에서  달려오던 차와 크게 부딪힙니다.
아주 큰 사고였죠.
 
버스 안의 승객들 중 몇몇은 목숨을 잃었고 프리다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버스의 철제 손잡이는 프리다의 골반을 관통했고 쇄골과 다리, 갈비뼈 등 온몸이 골절됐죠.
 
이 사고는 프리다에게 평생 하반신 마비를 안겼죠.
사고가 발생한 후 3달 동안은 아예 침대에서도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이 사고로 인해 간절히 꿈꾸던 의사의 길 또한 포기해야 했죠.
 
하지만 프리다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학과, 또 그림을 합쳐 의학 서적에 신체 등을 그리는 삽화가를 꿈꾸게 되는데요.
프리다의 가족들은 이런 프리다의 꿈을 위해 침대 위에 새로운 선물을 준비합니다.
 
침대에 누워서도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치.
 
그 위에는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거울을 달았죠.
 
긴 병상 생활에서 그림 그리기는 프리다에게 깊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눈을 뜨면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
 
프리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죠.
 
그러면서 프리다는 캔버스 속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습니다.
 
이 당시 그려진 프리다의 초기작들 속에선 프리다가 어린 시절 접했던 전시들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있는데요.
당시 멕시코에선 유럽사회의 예술들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프리다도 어린 시절 유럽의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었죠.
 
어린 시절 본 보티첼리같은 르네상스 장인이나, 입체파와 같은 현대 화풍은 프리다의 영감이 됐습니다.
 
프리다는 여러 영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나갔죠.
오랜 병상생활 속에서 프리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고된 재활훈련을 거쳤죠.
 
그 결과 보조기를 통해 걷는 것도 가능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병상을 벗어날 수 있게 되자, 프리다는 사람들을 만나며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시기엔 대학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생 운동에도 참여했는데요.
 
당시 멕시코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움직임에도 동참했죠.
 
이 시기엔 한 사회주의 정당에 들어가 정치 활동가로, 또 예술가로 활약하기도 합니다.
 
한참 사회주의 활동을 이어가던 프리다는 한 당원의 소개로 같은 당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를 만나게되는데요.
그의 이름은 ‘디에고 리베라’였죠.
 
당시 디에고 리베라는 이미 멕시코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벽화 화가였습니다.
 
디에고는 멕시코의 전통과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벽화들을 선보였는데요.
 
당시 멕시코는 급격하게 기존 전통을 바꾸려 하는 서구 사회의 문화와 자본주의 흐름에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디에고는 작품을 통해 이런 멕시코인들의 민족 정신을 대변하고 있었죠.
 
멕시코가 존경하던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 프리다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판단해 달라 물었죠.
 
디에고가 후에 남긴 말에 따르면, 당시 프리다의 작품을 보고 "틀림없는 진짜 예술가"가 될 거라 확신했다합니다.
이후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는 예술과 사회주의 활동을 함께하며 관계를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둘은 곧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죠.
 
결혼 이후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의 화풍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서구 문명의 정복적인 이상에 맞서 멕시코의 전통을 그리던 멕시카니즘 화풍도 자신의 그림 속에 녹이기 시작하는데요.
멕시카니즘은 당시 멕시코인들의 민족 수호의지가 담겨 있기도 했지만, 반대로 현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멕시코의 전통을 녹여내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이 시기 그려진 프리다의 그림들은 한 편으론 현대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전통적인 느낌을 두루 풍기죠.
 
뿐만 아니라 당시 디에고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 속에 상징을 담아내는 화풍을 접목시키기도 합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거대한 벽화 곳곳에 멕시코의 전통을 상징하는 상징물들을 그려넣어 어떤 기호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선보였는데요.
 
프리다도 이로부터 영감 받아 자신의 작품 곳곳에 다양한 상징물들을 그려 넣죠.
 
때로는 멕시코 사회를 또 때로는 자신의 삶을 그려넣으며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에 선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이로인해 프리다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 화풍이란 평가를 받게 되죠.
 
하지만 프리다는 자신의 작품을 ‘초현실’이라 부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멕시코 국민들의 축복 속에 결혼했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결혼 후에도 함께 작품활동과 사회활동을 지속했는데요.
 
디에고의 여성 편력이 문제였죠.
디에고는 프리다와의 결혼 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바람을 폈습니다.
 
세간에는 프리다와 가장 절친한 친동생인 크리스티나 칼로와도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죠.
 
뿐만 아니라 프리다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프리다는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어린 시절 겪은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모두 유산하게 됩니다.
 
이는 프리다에게 큰 충격을 줬죠.
반복되는 유산과 디에고의 불륜 속에 프리다와 디에고는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합니다.
 
프리다의 삶은 악순환의 연속이었죠.
이 시기 그려진 프리다의 작품 속엔 신체적 고통과 디에고에 대한 애증.
갖지 못한 아이 등을 상징하는 기호들이 가득합니다.
 
절망의 시기 프리다에게 있어선 작품 활동만이 유일한 위로였죠.
하지만 프리다는 자신이 처한 불행한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직시합니다.
온갖 고통 속에도 또렷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눈.
 
프리다는 고통스럽고 황량한 분위기의 기호 속에 올곧이 서있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넣었는데요.
 
몰아치는 삶의 불행 속에서 도망치기 보다, 똑바로 응시하고 마주하는 모습을 그려 넣고자 했죠.
 
삶의 불행을 직면하고자 한 것입니다.
찢어질 듯한 신체적 고통과 비극적인 삶의 고난 속에서도
프리다는 작품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병상 속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그려 나갔죠.
 
프리다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마주하고 견뎌 나갔습니다.
일생동안 자화상을 그려왔던 프리다의 마지막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물화'였습니다.
 
수박 그림이었죠.
 
작품의 이름은 <Viva la Vida>
우리 말로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인데요.
 
프리다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프리다는 이를 슬픔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자신이 처한 삶을 직시했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죠.
 
때문에 우리는 프리다의 작품 속에서 작품 너머 프리다가 느꼈던 감정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1954년 프리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 여행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과 존재를 그리고자 했던 프리다 칼로.
 
여러분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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