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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렸을까?

조회수 2019. 11. 28.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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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부터 뭉크까지. 세기의 예술가들이 그린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여러분은 어떤 순간에 셀카를 찍으시나요?


오늘 좀 멋져보일 때?

새로 찾아간 카페 분위기가 마음에 들 때?


아니면...

ㄱ ㅏ끔... 눈물을 흘릴 ㄸㅐ....★


셀카를 찍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고,
하나로 이거다! 하고 규격화 할 수는 없지만요.

그래도 공통점을 하나 찾자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아요.
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을 선택해 화면에 담고,
필요하다면 보정을 하거나 왜곡해서라도
‘진정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미지를 찾으려고 하죠.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카메라도 셀카도 없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자화상이 있었습니다.
자화상은 14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졌는데요.

물론 이전에도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여러 화가들이 자화상을 남겨
하나의 조류를 형성한 게 바로 이때였죠.
중세는 신 중심의 사회였고
때문에 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요구받았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는
신 대신 인간에게 주목하자고 말해요.
개인의 욕망을 마음껏 표현해도 된다고 말하죠.
그래서 예술가들도 자신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딱딱딱
자신의 얼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 되게 그린 건 아니었어요.

자기 얼굴을 그린다는 건 아직 좀 쑥쓰러운 일이었고
사람들의 무리를 그리면서 그중 하나에 자신을 그려넣었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09~1511)이 이를 잘 보여주는데요.

라파엘로는 플라톤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로
헤라클레이토스를 미켈란젤로의 얼굴로 그리면서
여기, 귀퉁이에 자신의 얼굴도 그려 넣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라파엘롭니다.
네덜란드의 얀 반 에이크는 더 교묘했습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그림인데요.
확대해 보면 파란 옷을 입은 반 에이크와
빨간 옷을 입은 그의 조수
그리고 부부의 뒷모습이 거울 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 위엔 이렇게 적혀 있죠.
“얀 반 에이크가 이곳에 있었다. 1434년”
초기의 자화상은 이처럼 숨은그림찾기 같았습니다.
화가의 얼굴이 최초로 전면에 내세워진 건
알브레히트 뒤러,부터였어요.
이 그림에서 그는 위엄있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어두운 배경, 위쪽에서 떨어지는 빛은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하죠.
뒤러의 옆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영원한 물감으로, 자신을 그렸다.”
화가로서의 강한 자신감과
자기애가 느껴지는데요.
자신의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화가도 있었어요.
17세기 영국 왕실의 궁정화가였던 안토니 반다이크.

주황색 새틴을 입고 한손에는 황금 사슬을
다른 한 손으로는 커다란 해바라기를 가리키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해바라기가 태양, 그러니까 왕을 상징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그림에서 반다이크는 왕실을 그린 대가로
황금을 선물받았음을 드러내고 있죠.
자기가 꽤 잘나간다고 으스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 건
그저 자신의 멋진 모습을 자랑하려는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자화상을 그릴 때 화가들은 홀로 일했습니다.
혼자 일한다는 건 우리가 다른 이들을 의식할 때 짓는 사회적인 표정,
그걸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어떤 초상화 속 인물도 앞머리를 쓸어올리거나
흠칫 놀란 얼굴을 들이밀고 있진 않죠
오직 자화상만이 그 일을 했고
자화상에는 화가의 자아가 막힘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어떤 화가들은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기도 했어요.
모델을 구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든
모두 떠나버려 홀로 남았든
사정이 어떻든 혼자가 된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리면서
내면의 표정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인기있는 초상화가로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말년에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렘브란트.
그의 얼굴은 지친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데요.
치부욕과 명예욕으로 점철되었언 삶.
그 무상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의 가까운 추종자였던 다비드.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이후 감옥에 갇히는데요.
그는 의자에 앉아 있지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고
붓과 팔레트를 지나칠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죠.

자신에 대한 적의가 가득했던 공간에서
그가 느꼈을 당혹스러움이 드러나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 연인의 배신, 그림자처럼 달라붙던 질병.
온갖 불행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뭉크는
자신이 지옥의 불길 속에서 발가벗고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뭉크는 삶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는데요.
불길 속에서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죠.
고통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거지만
의연한 자세로 그 고통을 견뎌낼 것임을 보여줍니다.
말년에 뭉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겨운 삶이었지만 한 번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어...”
슬픈 일들이 더 슬퍼지는 건 언제일까요?
우리가 그 슬픔을 홀로 견디고 있다고 느낄 때가 아닐까요?
일상에서 나의 슬픔에 꼭 공감해주는
사람을 찾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죠.
저는 제 인생이 어떤 벽에 부딪혔다고 느낄 때
자화상을 봅니다.
어떤 그림은 경쟁심을 자극하고
어떤 그림은 저와 함께 울어주고
어떤 그림은 다시 한 번 일어설 용기를 주죠.
우리보다 먼저 무언가를 견뎠던 얼굴이
내보내는 그 내밀한 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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