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야 집이 숨 쉰다, 영동 김참판 고택

조회수 2020. 11. 23.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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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미려한 뒷산을 배경으로 차분히 앉혀진 김참판 고택은 현 소유자의 6대 조부인 김기현이 예조참판을 지내다 낙향하면서 이 집을 구입하여 이주했다고 한다. 이 집 대공에는 문원십이세손중수文元十二世孫重修 당년삼십육정묘사월當年三十六丁卯四月이라는 명문이 기입돼 있다. 문원은 사계 김장생(1548~1631)과 회재 이언적(1491~1553)의 시호다. 누구 집안의 후손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한 연대를 밝힐 만한 자료이니 잘 찾아볼 일이다. 이 집은 17세기 말에 건축됐다고 한다. 원래 안채와 별당 형식의 안사랑채만 남아 있었으나 최근 곳간, 안뒷간, 후원 곳간이 복원돼 옛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최성호

사진 전원주택라이프 편집부

충북 영동군 양강면 괴목리에 위치한 김참판 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142호로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뽐낸다. 관리하고 있는 분의 증언에 따르면 이 집은 규모가 매우 컸다고 한다. 우선 안채 형태가 지금과 같은 ㄷ자가 아니고 부엌 쪽 몸채 쪽에 ㄴ자 형태로 사랑채가 붙어 있어 안채 모습이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였다고 한다. 사랑채에는 방과 대청이 각각 2칸이 있어 총 4칸 규모였다고 한다. 또한 지금 안채 옆에 새로 지은 욕실 터에는 원래 사당이 있었고 사당도 지금 배치의 직각 방향으로 놓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대문 앞쪽으로도 건물이 쭉 늘어서 있었으며 집터가 지금 관리인이 거주하는 집에까지 뻗쳐 있었다고 한다. 집 맨 앞에는 누마루가 있었고 그 앞에는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연못 안에는 섬이 있었고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주변 상황으로 볼 때 큰 연못은 아니었겠지만 꽤 신경을 써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또 다른 대문이 남쪽에도 있었다고 하니 이를 종합해 보면 예전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큰 대가였음이 분명하다.

안채에서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자 문간채가 보인다. 가운데 화단이 있는데 원래는 사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0년대 가세 기울면서 집도 쇠락해

지금 ㄷ자 형의 안채 일부가 헐려나갔을 가능성은 현재 안채의 구조를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안채를 보면 완전한 ㄷ자 형태를 하고 있지만 좌측과 우측 날개 지붕이 전혀 다른 모습이다. 우측 날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완결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좌측 날개는 맞배지붕 모습으로 서까래가 드러나 있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부엌 쪽을 맞배지붕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이러한 경우 앞에 건물이 있어 맞배지붕 형태가 밖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거나 부엌으로 끝나 기능적으로 격이 낮을 때 처리하는 방법이다. 지금 상태는 아무리 삼량구조 집이라지만 측면 처리가 매우 어설퍼 보여 의도하지 않았던 상태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측면이 보이는 구조였다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우측 날개처럼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였을 것이다. 관리인의 증언으로는 사랑채와 안채 지붕은 이어져 있었다고 하며 사랑채는 60년대 초 너무 퇴락하여 헐렸고 대부분의 부재는 팔려 다른 곳으로 이설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부터 이 집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 모습이 어떠하였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현재 화단이 옛날 사랑채 기단이었으며 안사랑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샛문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안채로 들어가는 문도 왼쪽 날개 아랫방과 맞물리는 쪽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옛 사랑채를 복원하여 볼 때, 옛집은 지금보다 훨씬 더 짜임새가 있는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안채나 안사랑채 집 구조로 보아 전후툇집 또는 최소한 전툇집의 구조였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도 측면에 위치하여 당대의 집 구성 원칙인 내외의 모습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휑한 모습이 아니라 사랑채, 안채, 안사랑채, 곳간, 대문채가 서로 유기적으로 짜여 지금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현재 안채나 안사랑채를 보면 집 수준은 매우 높은 편이다. 만일 사랑채가 지금까지 남았다면 지금보다 더 안정되고 품위가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안채 내부. 워낙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 수 있을 정도다.
몸종이 기거했을 것으로 보이는 안사랑채 모퉁이방 입구.
길게 늘어선 안사랑채 툇마루로 안사랑채는 주방향이 남쪽인데 원래는 별당이었을 것이다.
보기 드문 마루를 깐 건넌방

안채의 몸채는 전후툇집으로 규모 있게 지어졌다. 부엌은 길게 3칸으로 꾸며 크게 잡았으나 1칸 폭이라 조금 좁은 듯하다. 과거 평면과 사진을 보면 뒷마당 쪽으로 반 칸을 내 이곳에 그릇을 올려두는 찬장인 살강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좁은 부엌의 유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으로 살강 쪽에도 문을 내 뒷마당과 연결했다. 현재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고쳐졌다. 아무리 요사이 보수가 제멋대로라지만 너무 무성의하다. 이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으로 매우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의 중심은 안방 2칸 대청 2칸으로 구성됐다. 전후툇집으로 전면에는 툇칸을 두고 후면 툇칸은 방과 대청으로 사용하여 방의 규모를 키웠다. 안방은 현재 트였으나 예전에는 둘로 나뉘어 있었고 안쪽 방은 툇칸을 나누어 뒷방으로 사용했다. 안방 천장은 다른 곳과 달리 격자로 틀을 짜고 가운데 반자를 들였다. 반자는 합판을 대고 도배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의 특징은 건넌방 부분도 마루로 깔았다는 점이다. 건넌방에 마루를 설치하는 경우가 가끔 있으나 이처럼 2칸 모두를 마루로 구성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건넌방 마루와 대청 사이는 들어열개로 구성하여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곳은 사당 또는 제사 공간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관리인이 이 집을 사서 들어올 당시에는 사당이 없었다는 말로 추정해 볼 때 애초에 있던 사당은 안채로 썼을 것이고 외부에 별도의 사당을 지었을 것이다.

안채 전경. 전후툇집으로 안채 중심은 안방 2칸 대청 2칸으로 구성돼 있다. 규모가 제법 되는 규모로 건넌방 부분도 마루를 깐 것이 특이하다.
최근에 복원된 후원 곳간.
안 사랑채 옆에 위치한 항아리를 놓아두는 저장고에서 안채를 바라본 모습.
안사랑채 뒤편. 안사랑채는 19세기에 지어졌는데 집을 지은 솜씨나 품격이 매우 높아 당시 이 집안 재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별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사랑채

안사랑채는 4칸으로 된 전후툇집이다. 현재 마당에서 보는 모습은 뒷모습이다. 안사랑채의 주 방향은 남쪽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집은 남자들이 쓰던 공간이 아니고 별당채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담이 없으나 예전에는 담이 있었고 없어진 사랑채 사이에 쪽문이 있었다는 관리인의 말로 볼 때 별당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얼마 전까지 안주인이 거처하였다는 관리인 말로 미루어보아 여성을 위한 별당이었을 것이다. 안사랑채는 대청 한 칸 방 두 칸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끝 부엌 쪽 구조는 전후툇집 특성을 충분히 활용해 뒤쪽은 부엌, 앞쪽 남향받이는 방으로 꾸며졌다. 모퉁이 방에는 이곳에 거처하는 분의 몸종이 살았을 것이다. 


뒤편 부엌 쪽은 조금 변형된 듯하다. 지금은 뒤 쪽마루가 부엌까지 연결되고 툇마루에 기둥을 세워 문을 설치해 부엌과 방을 구분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예전에는 부엌 쪽에는 뒤퇴가 없고 부엌 앞 기단에서 뒤퇴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아마도 옛 상태가 맞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엌에서 작업을 고려할 때 앞쪽에 어떠한 공간이 있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뒤퇴를 문으로 막은 것은 이 안사랑채가 별당으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채가 있었다면 사랑채에서 안사랑채가 바로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안사랑채는 19세기에 지어졌다. 집을 지은 솜씨나 품격이 매우 높아 당시 이 집안 재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짝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 담겼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짜여진 문이며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용자살이나 세살무늬가 아닌 아자亞字 문양을 넣어 품격을 높인 실내 창이 그렇다.

정면에 문간채가 보이고 왼편에는 안사랑채가 오른 편에는 곳간이 놓여 있다. 문간채 사이에 대문이 있다.
복원된 곳간으로 크기가 매우 크다.
안채 우측 후면에서 바라본 모습. 안채 쪽에 장작이 쌓여 있는데 관리인은 적어도 3일에 한 번씩은 청소하고 불도 때 주고 있다. 그래서 집 상태가 아주 좋다
안채 후면.
사람이 살고 있는 듯 보전 상태 좋아

역사를 보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상복구이다. 지금 대부분 고택들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간 한국전쟁, 구한말 이후 생활의 변화, 화재 또는 가세가 기울어가면서 집의 규모가 축소되거나 또는 많이 변형되었다. 집이 변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사회문화 현상의 관점에서 볼 때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된 집을 보고 옛날에도 늘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해석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집을 볼 때 우리는 항상 이 집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왜 그러한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집을 보는 올바른 태도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칫 잘못된 해석으로 생각이 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김찬판댁을 돌아보았다. 돌아보면서 지금도 사람이 살고 계신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방도 잘 정리되어 있고 청소상태도 좋았으며 마당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티끌 하나 찾기 힘들 정도다. 지금이라도 당장 들어가 산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관리인의 말로는 적어도 3일에 한 번씩은 청소하고 불도 자주 때 준다고 한다. 이러한 정성이 있기에 이러한 상태로 보존되는 것이다. 우리 문화재 보전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같은 영동에 명색이 관리인을 두고 관리한다는 규당고택이나 소석고택과 너무 비교되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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