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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세가 위엄이 느껴지는 제월당·옥오재

조회수 2020. 7. 27.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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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월당 霽月堂은 조선 숙종 때 대사헌을 지낸 송규렴 宋奎濂(1630~1709)의 별당이고 옥오재玉吾齋는 사랑채다. 제월당은 송규렴의 호이고 옥오재는 송규렴 아들인 송상기 宋相琦(1657~1723)의 호인데 호를 따라 당호를 지은 특이한 경우다(제월당과 옥오재는 시도유형문화재 제9호). 제월당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는 쌍청당 雙淸堂에 연원을 두고 있다. 쌍청당은 송규렴 선조인 조선 초 유학자 송유宋愉가 지은 것으로 박팽년이 쓴 쌍청당 당기 堂記에 있는 제월 霽月을 따온 것이다.

최성호

사진 전원주택라이프편집부

시도유형문화재 제9호인 제월당과 옥오재는 각종 개발로 지맥이 끊기고 대지는 잘려나가 옹색해졌으며 경관도 훼손됐다. 명문세가 기품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에 대한 배려가 아쉽다.

집은 전체적으로 남남동을 바라보며 배치됐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중문이고 그 안쪽에 송규렴이 지은 제월당이, 뒤로 아들 송상기가 지은 사랑채 옥오재와 안채가 놓였다. 우측은 전면 세 칸 측면 칸 반 규모의 사당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은 다른 곳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사당은 안채나 사랑채와 같은 방향으로 놓는 것이 원칙이어서 이곳은 남쪽을 향하고 있어야 하지만 다른 건물 옆을 바라보는 서향으로 배치됐다.


이렇게 된 것은 제의적 원칙에 충실하기보다 대지가 전체적으로 서쪽으로 경사졌기에 그 흐름에 충실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즉 대지에 순응해 사당 앉힐 자리를 잡았다.

대사헌을 지낸 송규렴의 별당인 제월당은 둘러싼 담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연못도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 여섯 칸 모두 사용할 수 있게 한 점으로 보아 접객 공간으로 쓰였을 것이다.
솟을대문 너머 중문이 보이고 그 뒤가 제월당이다.
행랑채에서 본 모습으로 위치가 바뀌어 담이 놓였다. 경부고속도로와 고택 앞 8차선 도로가 뚫리면서 이런 변화가 생겼다.
송규렴 宋奎濂의 별당, 제월당

집 건물들은 건립 연대가 조금씩 다르다. 특히 안채 안방과 대청은 1900년대 들어와 지은 것으로 예전과 많은 차이가 있다. 제월당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 서쪽으로는 8차선 도로가 뚫리면서 과거 모습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 제월당은 여전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솟을대문과 행랑채 담 등은 위치가 바뀌고 장서각이 새롭게 들어섰다. 제월당을 둘러싼 담도 없어졌다. 앞으로 연못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참고로 별당에 담을 두르는 방식은 대전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데 보물로 지정된 동춘당, 쌍청당, 송애당 등이 그렇다.


남향으로 배치된 제월당은 ㄴ자 평면으로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몸체에 좌측 뒤로 다락 한 칸이 붙었다. 다락 아래 아궁이가 설치됐으며 뒤로 돌출된 부분이 없었다면 동춘당이나 쌍청당 평면과 같은 모습이다. 가장 먼저 들어선 쌍청당 평면을 기본으로 다른 별당들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월당은 굴도리 집으로 격식을 높인 반면 구조와 평면은 단순해 단아한 기품을 준다. 몸체를 이루는 여섯 칸 중 좌측 두 칸이 온돌방이고 나머지 4칸은 넓은 대청이다. 방과 대청 사이 문은 들어 열개로 돼 있어 필요에 따라 여섯 칸 모두 널찍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제월당은 생활공간이라기 보다 접객 공간으로 쓰였을 것이다.

사당 옆에 놓인 장서각은 후대에 지은 것이다.
사당은 안채, 사랑채와 같은 방향으로 놓는 것이 원칙이나 이곳은 대지에 순응하고자 다른 건물 옆을 바라보는 서향으로 배치됐다.
전면 일곱 칸 반 규모인 안채는 마당 깊이가 여섯 칸 반에 폭이 세 칸 반으로 워낙 깊어 중후함이 느껴진다. 압록강 목재가 보급되면서 나무도 넉넉히 사용했다.
기세등등 제월당… 관아 건물을 보는 듯

제월당은 높은 외벌대 기단 위에 올라앉아 있는데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이다. 외벌대 기단이라도 높이가 높다. 일반 사가 私家에서 예를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돌 크기와 솜씨가 대단하다. 마치 관아 건물을 보는 듯 위엄이 느껴진다. 이런 돌을 사용했을 정도라면 집을 지을 당시 가문 위세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송준길에게 학문을 배운 송규렴과 송시열에게 수학한 송상기, 2대에 걸쳐 제상 반열에 올랐으니 당대 대단한 가문이었다.


제월당 뒤쪽에는 사랑채와 안채가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한 몸을 이뤄 ㄷ자 형태를 이루는데 앞쪽에 세 칸 규모 중문 겸 광채를 합치면 전체적으로 ㅁ자다. 현재 중문은 사랑채 서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한국건축문화재(충남편)에 소개된 평면을 보면 서쪽 광채는 원래 두 칸으로 집 구조가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고 중문도 사랑채 동쪽에서 몸체와 만나는 부분 중 한 칸을 사용한 것으로 돼있다.


중문을 옮겨 지은 것이다. 재질이나 기법으로 보아 솟을대문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는 사랑채 앞쪽 벽을 봐도 알 수 있다. 동쪽 세 번째 기둥에는 사랑채 툇마루가 돌출된 길이만큼 벽이 돌출돼 중문으로 드나드는 사람과 내외하도록 했다. 지금은 중문 박공면을 보고 들어가는 구조로 전통한옥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다. 따라서 동쪽 두 번째 칸에 있던 중문을 폐쇄해 광으로 개조하고 대신 중문은 사랑채 서쪽으로 옮겨 놓았다. 이것은 제월당을 둘러싼 담의 철거와 장서각을 새로 만든 것과 관계가 있다. 장서각이 들어서면서 사당 출입이 불편해져 제월당 서쪽으로 담을 쌓아 자연스럽게 현재의 중문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다.

제월당 너머로 보이는 옥오재.
제월당과 옥오재가 앞뒤로 서 있다.
내외벽 없는 옥오재와 안채

제월당 뒤 사랑채인 옥오재는 높은 기단 위에 놓였으며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에 반 칸의 퇴칸을 둔 전퇴집으로 매우 단출하다. 서쪽 두 칸이 대청이고 이은 두 칸이 방, 동쪽 한 칸 상부는 다락, 하부는 부엌이다. 사랑채 대청이 서쪽 끝에 위치한 것은 앞에 위치한 제월당 때문이다. 경관상 제월당을 피해 대청 자리를 잡다 보니 한쪽 끝으로 몰리게 됐다. 다른 집과 조금 다른 점은 사랑채에서 안채와의 내외가 그렇게 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곳에서 사랑채 뒤 안마당이 들여다보일 때는 내외벽을 만드는 경우가 많으나 이곳은 그런 시설을 하지 않았다.


안채는 전면 일곱 칸 반 규모다. 마당은 깊이가 여섯 칸 반이고 폭이 세 칸 반으로 장방형인데 워낙 마당이 깊어 다른 곳에서 접할 수 없는 중후함이 느껴진다. 역시 뼈대 있는 가문이다. 안채를 살펴보면 목재를 옥오재에 비해 훨씬 풍족하게 사용했을 뿐 아니라 목재를 다루는 기법도 사랑채와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당시 압록강 목재 보급 후 자재가 풍성해진 후에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랑채인 옥오재는 높은 기단에 섰으나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에 반 칸 퇴칸을 둔 전퇴집으로 단출한 평면을 하고 있다.
인도와 맞닿은 외부 담으로 도로가 생기면서 지은 것이다.
배치도

제월당을 돌아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천박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현재 제월당 동쪽 언덕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서쪽으로는 8차선 도로가 뚫렸다. 제월당은 우선 경부고속도로 인해 계족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지맥이 끊겼고 앞쪽 대지는 8차선 도로 때문에 잘려나가 집 전체가 옹색해졌다. 여기에 주변 개발로 제월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광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이는 제월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전 시내에 있는 동춘당, 남간정사, 쌍청당 등 모든 문화재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 우리 문화재를 무시하는 태도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한 번 잃어버린 문화 가치는 되찾기 힘들다. 남아있는 문화재만이라도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4대강 사업에서도 문화재는 뒷전이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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