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문을 낸 북비고택北扉故宅

조회수 2020. 2. 24.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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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비고택北扉故宅(도지정 민속문화재 제44호/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21)은 한개마을에서 충절의 표상이라 일컫는다. 사도세자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북으로 문을 내고 매일 그를 기렸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여러 집들이 들어서면서 어느새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북비고택은 한자 그대로 북쪽에 문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훈련원 주부 이석문이 사도세자가 죽은 뒤 조선 영조 50년(1774)에 이곳으로 내려와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사도세자를 기리며 이곳에 은거하며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북비댁과 한주종택은 매우 인연이 깊다. 두 집안은 양자관계로 얽혀 있는데 한주종택에 거주하는 이석문의 동생인 석유가 동생이 후사가 없자 석문은 둘째아들을 석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 양자마저 후손이 없자 석문은 작은손자마저 양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런데 4대째에서는 석문가문에 후손이 없어 석유가문에서 석문가문으로 양자를 보냈다고 한다. 따라서 한주종택과 북비댁은 모두 석문의 후손인 것이다.

세를 과시하고자 원기둥과 주두를 사용하고 첨차까지 쓴 안채.
1866년 이원조가 중수한 사랑채. 큰 사랑방은 주인이 쓰고 작은 사랑방은 서재 겸 손님방으로 사용했다.
두 번에 걸친 큰 변화로 지금의 모습 갖춰

한주종택에서 양자로 온 응와凝窩 이원조는 공조판서에 이를 정도로 크게 성공해 북비고택을 크게 번성시켰다. 이원조는 북비댁뿐만아니라 한주종택이라는 당호가 붙게 한 한주寒洲이진상을 키우기도 했다. 이원조가 이진상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두 가문이 양자관계로 종법宗法으로 본다면 다른 집안이었지만 실제로는 같은 뿌리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북비고택은 이석문이 이곳에 자리 잡은 후 두 번 크게 변화된다. 첫번째 변화는 석문의 손자인 규진奎鎭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어 현재의 기틀을 만든 것으로 순조 21년인 1821년이다. 이는 안채 대청 묵서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변화는 1866년에 원조가 이 집을 중수重修한 것으로 이때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866년에 지어진 집 배치는 지금과 달랐다. 우선 안채 앞에 다섯 칸 중 문채가 안채와 같은 방향으로 남쪽에 배치됐고 안채 동쪽에는 세 칸광이 있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를 했는데 중문채와 광채는 한국전쟁 때 소실돼 지금의 배치가 됐다. 또한 안쪽에도 건물 외에 동쪽 담장 쪽으로 세 칸 규모 장판각이 있었으나 삼일운동이 있었던 1919년 즈음에 멸실됐다고 한다. 또한 1866년에 단칸이었던 사당을 현재와 같이 세 칸으로 고쳐 지었다.


솟을대문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에 북비라는 자그마한 현판이 걸린 문으로 향하면 방 두 칸 대청 두 칸인 네 칸짜리 남향의 맞배지붕 기와집을 볼 수 있다. 이석문이 낙향해 자리 잡으면서 문을 북쪽으로 돌려 놓았다고 한다(원래 이곳에는 이석문 아버지와 자신이 머물던 대초당大草堂이라는 재실이 있었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예전에는 북향집이었던 것을 남향집으로 개조한 것이라 한다. 한남대학교 한필원 교수가 규진이 이곳을 서재로 썼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때 북향집이었던 살림집을 남향집으로 바꾸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동쪽 담에 있던 건물도 장판각으로 개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 앞에 놓인 장독대와 작은 연못.
대문 밖과 안에서 본 모습으로 북비고택은 정갈하게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우월함을 드러내려 한 안채

안채는 다섯 칸 전후퇴집으로 동쪽으로부터 부엌 한 칸,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한 칸으로 이뤄졌다. 안채는 1821년 규진이 지은 것으로 높은 기단 위에 놓여 한주종택이나 교리댁 안채보다 한층 권위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높게 지은 것은 대지에 경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후대에 건립한 이 집이 앞서 지은 마을 내 다른 집보다 우월하게 보이려 한 의도가 짙다고 봐야 한다. 

먼저 지은 교리댁 안채가 방주에 민도리집이지만 이 집은 원기둥과 주두를 사용하고 장혀를 받치기 위해 첨차를 쓴 것을 보아 분명 교리댁보다는 한 단계 높은 화려함을 보여주고 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세를 과시하려는 예는 후대에 지은 같은 마을 월곡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월곡댁은 1910년대에 지은 집이다. 당시 개화기에 돈을 많이 번 이전희는 한개마을 내 다른 곳과는 다른 차원의 집을 짓는다. 마을 전통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곳곳에 보인다. 북비댁도 이처럼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정 2품 공조판서, 지금으로 말하면 건설교통부장관이 됐다는 자부심을 표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먼저 지은 교리댁은 노론이었던 반면 북비댁은 남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파 색이 집을 짓는데도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한다.

안채 부엌은 교리댁과 같은 구조로 다락은 환기를 위해 2/3 정도만 설치했다. 안채 측면 벽체는 한주종택 사랑채와 같이 마치 담장처럼 방화벽 상부에 기와를 얹었다. 이것을 한주종택 소개에서도 언급했던 영역의 연속성을 위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사당 마당 쪽만이 아니라 부엌 쪽, 앞에 있는 안행랑채 벽체 양쪽 모두 같은 형식으로 한 것으로 보아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안채 평면은 전형적인 전후퇴집 모습이다. 그러나 부엌만은 뒤에 퇴가 없고 앞쪽은 전퇴까지 부엌으로 꾸몄으며 뒤퇴는 칸을 작게 해 벽장을 설치했다. 후면 벽장은 완전히 퇴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처마하부에 뒀다. 전후퇴집에서 후면에 있는 퇴칸 규모를 작게 해 지붕 밑에 설치하는 예를 많이 보는데 이는 완전한 퇴칸을 구성할 경우 간살이 길어져 공사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사랑채의 날개채로 뒤쪽은 칸 반의 작은 사랑방이고 앞쪽은 한 칸 누마루다.
한주종택 사 랑채와 유사하게 방화벽에 기와를 얹었다.
세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사당을 세 칸으로

사랑채는 1866년 이원조가 중수했다. 현재 ㄱ자 형태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돌출된 누마루 뒤로 반 칸 뒷간이 있어 전체적으로 ㅏ자였다. 몸체가 전면 네 칸 측면 두 칸이고 앞으로 날개채가 두 칸 반 돌출돼 있다. 몸체는 동쪽에 대청 한 칸, 큰 사랑채 두 칸, 부엌 한 칸이며 날개채는 칸 반의 작은 사랑채와 한 칸의 누마루가 있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은 주인이 사용하는 방이고 작은 사랑방은 서재로 사용하다 손님이 올 경우 숙소로 썼다고 한다.


사당은 앞서 말한 것처럼 원래 한 칸이었다. 그런데 이원조 때 세 칸으로 늘렸다. 한개마을에서 사당이 있는 집은 한주종택, 교리댁, 월곡댁 그리고 이곳 북비고택 4곳이다. 사당이 있는 집은 종택이거나 국가에 공을 세워 불천위를 제수받아 파종택을 만든 경우다. 그리고 사당을 여러 칸으로 만드는 것은 불천위가 있을 때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 가문에서 높은 직위에 오른 사람을 기리기 위해 스스로 불천위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 뜻이 훼손됐다. 어쨌든 이곳 한개마을 어른 말에 의하면 2품 벼슬을 지낸 분이 있으면 불천위를 모시는 개념으로 세 칸 규모의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결국 북비댁도 이원조가 정 2품 벼슬에 오르면서 그 세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사당을 세 칸으로 늘린 것이다.

서재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집. 북비문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다.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해 짓지만 단순히 사는 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와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서도 집을 짓는다. 즉 자기과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과거 집을 짓는 사람 마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한때 아니 지금도 충절의 표상이라고 자랑하는 북비고택, 그러나 그것은 이름뿐 집은 어느 순간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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