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살림집, 한옥의 뿌리를 찾아서

조회수 2019. 6. 24. 15:3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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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쉬는 건강 주택, 한옥

최근 한옥韓屋, 즉 우리 집의 뿌리 찾기에 한창이다.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해방 후엔 미국 중심의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잃어버린 우리 집인 ‘한옥의 정체성 회복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동안 한옥이 널리 보급되지 않는 이유는 춥고 불편하며 비싸다는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보존해야 할 문화재 전통 한옥과 달리 한옥 고유의 아름다움과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접목한 고성능 저비용 보급형 한옥 개발이 필요하다.

윤홍로 기자

한옥과 양옥은 이란성 쌍둥이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조선집·한식집)”_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일제 강점기 이후 양식과 일본식 건축과 구별하여 전래된 전통적인 집을 한옥이라 부르기도 한다.”_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전적 정의를 보면 한옥은 양옥洋屋이나 일본식 주택과 상대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옥이란 용어가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지 알려면, 먼저 한옥과 상대되는 양옥과 일본식 주택이 이 땅에 지어지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옥과 양옥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콜로니얼Colonial 양식_17~18세기에 영국,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이 정복한 식민지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 본국의 양식을 반영하면서 각지의 풍토에 맞는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했다.

1873년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강력하게 표방해온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5년 이 틈을 타서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함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 포격 사건이 발생(운요호 사건)한다. 1876년 일본은 이 사건을 트집 잡아 조선에 군대를 보내 조선 정부를 무력으로 압박해 부산항과 원산항, 제물포항을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한다. 그 후 개항장에 외국인의 거류지가 정비되고 서양풍의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바로 한옥과 상대되는 양옥이다. 당시 조선에 지어진 양옥은 서양 본토의 건축물과는 모양이나 형식이 달랐다. 바로 식민지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개항 초기에 제물포를 중심으로 양옥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또한 조선과의 마찰을 고려해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개화 초기에 ‘서양풍’ 주택을 건립했는데, 이를 ‘양옥’이라 할 수 있다. 서양식주택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조적식 구조이다. 따라서 전통 가구식架構式 목구조와는 크게 달랐다. 양옥은 대부분 벽돌조 건물로 식민지 양식 주택의 일반적인 특징인 중복도 형식을 취했으며, 접객 공간, 홀, 계단의 위치 등에서 건물 주인이나 기술공의 출신국별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었다. 형태상으로 전면의 베란다, 회랑과 포치, 아르누보식 실내장식, 권위를 상징하는 화려한 장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양옥은 이후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 주택의 기능·구조·재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


데크, 베란다, 포치, 퍼걸러, 뾰족지붕과, 뻐꾸기창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양옥의 특징은 엄밀히 말해 18세기 식민지 양식이자, 조선에 지어진 양옥의 모습이다. 당시 이 땅에 많은 양옥이 지어지면서 이것과 우리 고유의 전통 가옥과 구별하기 위해 한옥이란 용어가 등장한다.한옥이라는 단어는 융희2년(1907)년에 작성된「가사家舍에 관한 소복문서照覆文書」에도 등장하는 꽤 오래된 이름이다. 돈의문에서 배재학당에 이르는 정동길 주변을 기록한 약도에 영관領館 교당敎堂 학당學堂 등의 용어와 함께 한옥韓屋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영관이나 학당이나 교당이라는 용어는 개항 이후 새롭게 등장한 건물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건물들은 외국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기관으로, 그 이름에 건물의 주체와 용도와 성격이 함축되어 있다. 당시에는 ‘주가住家’나 ‘제택第宅’등과 같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한옥이라는 단어는 정동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새롭게 등장한 건축물을 가리키는 용어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대한제국의 ‘한韓’과 집을 뜻하는 ‘옥屋’으로 이루어진, ‘대한사람의 살림집’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뜻에서 사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


그러면 당시 누가, 왜 양옥을 지은 것일까.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은 조선 왕실을 회유하기 위해 종친과 측근들에게 귀족 작위를 부여했다. 새로운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유럽이나 일본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머리도 단발을 하고 옷도 양복을 입었다. 그렇게 겉모습은 서양식으로 꾸몄는데 온돌방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생활하려니 아무래도 어색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선 사랑방만 양식으로 바꾸었다가 나중에는 아예 양옥을 지었는데 신분이 귀족이었으니 주택도 유럽의 귀족 주택을 모방하여 지었다. 3)

조선사회가 해체되고 일제 치하에 들어가면서 일반 사가에서도 왕족이 누렸던 호사를 누리게 된 사회상을 반영한 충남 예산의 개량 한옥

문화주택의 또 다른 이름 개량 한옥

양옥이 확산되면서 한옥은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건축 양식으로 전락한다. 1921년 제중원 의사인 홍석후 씨가 동아일보에 쓴 글이다.


조선 사람이 고칠 것은 조선의 가옥 제도이다. 제일로 폐지할 것은 조선의 행랑방이니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그 불결한 행랑방이 있는 것이 비상히 불쾌할 것이며, 행랑방을 지나서 들어서면 안마당에서 안부엌이 보이고, 또는 수채가 보이며 뒷간도 보인다. 이것도 위생에 좋지 못하고, 또 조선 부엌은 매양 안방에 달려있음으로써 안방 뒷문 밖이 부엌이 된다. 그래서 내버린 더러운 것이 그곳에서 썩어 악취를 발할뿐 아니라 겨울이면 그것이 얼어붙었다가 봄이 되면 풀리어 그 습기는 전부 방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이 습기로 인하여 류머티즘 같은 병에 걸리는 일이 많다. 4)


일제 강점기에 건강한 삶에 대한 사회적 욕구 해결을 위해 등장한 위생을 매개로 문화주택이 한인 지식인과 일인 중심으로 보급된다.


문화주택은 화양절충和洋折衷 주택이었다. 즉, 일본식 화和와 서양식 양洋을 절충했다는 뜻으로, 1층은 거실과 서재, 식당으로 구성해 소파와 테이블, 식탁을 놓아 서양식으로 꾸미고 2층에는 침실을 두어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꾸몄다. 그런데 메이지시대의 일본 역시 서양의 제국주의를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식이라기보다 식민지 양식, 즉 콜로니얼 양식에 가까웠다. 5)당시 건강하고 편리한 삶은 한옥의 개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인식한 한인 주택업자에 의해 개량 한옥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도시 한옥이 일제 강점기에 문화주택의 한 유형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서울에서는 주택개발업자들이 개발한 한옥을 일반적으로 ‘개량 한옥’이라 불렀다. 개량 한옥은 전통 한옥과 비슷하지만, 도시의 새로운 주거 생활에 맞도록 개량됐다. 개량 한옥에는 벽돌, 유리, 함석 같은 외국의 건축 자재들을 활용하고, 철근콘크리트 기초를 도입하거나 지붕 아래 현대식 단열재를 넣고 공조 설비를 매립하기도 했다. 당시 유행한 개량 한옥의 설계도 해설이다.

일제 강점기 개량 한옥인 문화주택 설계도

가족 수가 많은 중류 주택이다. 건평 26평 6홉, 가족은 부부 2명, 노인 1명, 아동 1명, 학생 2명, 식모 1명이다. 구조는 기초 콘크리트, 요대부腰帶部는 기와로 하고 주요부는 나무로 한 기와집이다. 서재 겸 응접실은 양풍으로 취급하여 벽과 천장은 양회로 칠한다. 그 외 각 방은 온돌, 내부는 순조선식 현관, 주방, 목욕실엔 콘크리트로 바른다. 중요한 각 방은 남향으로 하여 일광을 충분히 들어오게 하고 노인실은 아동실을 겸한다. 주방은 선반과 음식을 만드는 선반을 설치한다. 6)

콘크리트 숲에 둘러싸인 한옥

문화주택은 해방 후 점점 더 대중화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많은 주택이 손실됐고, 1960년대부터 재건의 바람이 급격히 불었다.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농촌을 떠나 서울로 몰려드는 이촌향도의 물결이 치던 시기였다. 갑자기 인구가 불어나자 주택 부족이 심각해지면서 문화주택을 지어 파는 집장사가 생겨났다. 이렇게 새로 지어진 문화주택은 대부분 고유의 한옥이 아니라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 주택이다. 해방 후 서구 물결과 함께 달라진 생활양식은 실용적이면서 심플한 주택 구조를 요구했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 고유의 한옥을 극히 귀족적이며, 유교의 도덕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비과학적이고 비기능적이라고 보았다. 절충식 주택은 서양식에다 로컬 컬러라 하여 고유 한옥의 아름다움을 가미한 형태였다. 한 지붕 밑에 응접실과 거실, 화장실, 목욕탕 등을 함께 설계해 동선을 단축하고, 벽돌과 완자창, 흰돌 등을 사용하고 마루와 온돌을 놓았던 것이다. 

토담만 쌓아 그 위에 지붕을 덮은 토담집

1970년대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새마을운동의 각종 사업 가운데서 주거 문화 개선의 일환인 주택 개량 사업은, 우리 고유의 살림집인 한옥을 허물어 사라지게 하고, 대신 정체불명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로 뒤덮어 버렸다. 또 인구의 도시 집중과 주택난으로 아파트 신축 경향이 부쩍 늘어났다. 이러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과 복부인의 투기에 힘입어 아파트 붐이 일면서 아파트 공화국이니 아파트 문화니 하는 말이 생겨났다. 당시 한옥이 콘크리트 숲에 밀려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건축가도 적잖았다.


우리의 주생활은 수천년 동안 이어 내려온 조상의 혈통과 맥박을 느낄 수 있는 민족의 슬기와 마음가짐의 표상이다. 비록 벽촌의 모옥삼간茅屋三間이라도 소박하고 자연과 합일되는 민간 건축의 아름다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근래에 서구 기계문명의 무비판적인 애용과 경제발전의 세찬 물결 때문에 한옥의 가치가 경시되고 있고 심지어 멀지 않아 자취마저 찾아보기 어렵게 될 것이라는 기우마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_윤장섭 건축가, 경향신문, 1978


한민족이 알뜰히 가꾸어온 주생활 양식엔 민족의 얼이 간직돼 있다. 더욱이 온돌문화란 세계에 유례없는 주생활 방식이어서 시간에 따라 공간의 성격을 달리하고 계절감에 민감한 삶의 즐거움을 안겨다 준다. 대청의 대들보와 서까래가 연출하는 공간 구성은 우리만이 간직한 격조 높은 예술의 극치이며 민화와 사군자 등을 문틀에 배접하여 완자창과 겹창으로 흘러내리는 곡면을 사뿐히 받힌 초가지붕의 운치는 그 위에 올린 박이나 고추의 색을 빼고도 전 세계에 으뜸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의 보존 내지는 복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민족 숙원사업이라 하겠다. _김중업 건축가, 동아일보, 1981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얹고 귀를 맞추어 층층이 얹고, 그 틈을 흙으로 메운 귀틀집
일정 간격으로 자른 원목과 흙으로 쌓아 올린 목심집

한옥 당대 새 지평을 열다

한옥은 1990년대 들어 삶의 질이 나아지면서 가족의 건강을 위한 자연과 어우러진 생태적인 주거 공간으로 황토집, 개량 한옥, 현대 한옥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생태 건축이라 하여 구조체(뼈대) 없이 황토벽돌로만 지은 집, 또 귀틀집이나 목심집 등도 지어졌다. 이러한 구조의 집은 나무와 흙이 수축하면서 틈새가 발생해 단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현대 한옥, 즉 황토집은 으레 그런 것이거니 하는 편견이 자리했다.

민간 중심으로 현대인의 생활양식에 맞춰 지어진 현대 한옥

2000년대 들어서 한스타일韓Style 바람이 불면서 전통 한옥을 고집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 한옥은 전통 한옥이라기보다 한식韓式과 양식洋式을 접목한 개량 또는 절충 한옥에 가까웠다. 이들 한옥은 뼈대와 지붕을 짜는 방식은 전통에 근접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현대인의 삶을 담기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무거운 지붕으로 인해 부담스러워 보이는 외양, 기능성과 실용성이 떨어지는 공간구성, 나무기둥과 흙벽 사이의 틈, 전망 및 단열과 관계된 창호, 난방 방식, 주방과 화장실의 기능적인 마감 문제 등 현대인의 요구를 담아내기엔 부적합한 요소들이 많았다. 7)

2010년대 들어 한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한옥을 살림집으로 선호했다. 하지만, 한옥은 춥고 불편하다는 인식으로 보급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국가한옥센터를 중심으로 한옥 활성화를 위한 신한옥 모델을 연구하고, 한옥 등 건축 자산을 보전·활용하거나 미래의 건축 자산을 조성하기 위한「한옥 등 건축 자산의 진흥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국가한옥센터는 “신한옥을 한국의 전통적인 목구조 방식과 외관을 기본으로 하되, 복합적인 구조 방식과 혁신적인 시공 방식, 성능 향상된 재료 등으로 구축된 건물”로 정의한다. 그리고 신한옥의 필수 조건으로 “현재 한옥이 널리 사용되지 않는 이유로 설비로 인한 생활의 불편, 유지 관리의 어려움, 신축에 필요한 높은 비용으로 조사됐다”면서 “현대의 새로운 한옥은 이를 반영해 한옥의 설계 및 시공을 현대화, 산업화, 대중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최근 신도시와 뉴타운에도 한옥마을을 건립하는 등 신한옥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신한옥이 기존의 한옥이 가진 장점을 살리면서 현대 생활에 필요한 요구를 계속 수용해 간다면, 신한옥에 대한 높은 관심과 좋은 반응은 더욱 증대될 전망이다.

정부 주도로 전통적인 목구조 방식과 외관을 기본으로 하되, 복합적인 구조 방식과 혁신적인 시공 방식, 성능 향상된 재료 등으로 구축된 신한옥

참고문헌: 1)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2) 임창복, 돌베개. 〈한옥의 정의와 개념 정립〉, 송인호.) 3) 5)《집에 들어온 인문학》, 서운영, 들녘. 4) 홍석후, 동아일보 1921. 6) 김윤기, 동아일보, 1930. 7) 《황토집 바로 짓기》, 이동일, 전우문화사

살아 숨쉬는 건강 주택, 한옥

01 우리의 살림집, 한옥의 뿌리를 찾아서

02 옛 전통 마을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은평한옥마을

03 법규로 살펴본 한옥 건축 기준

04 단아한 멋과 품위를 즐기다! 강릉오죽한옥마을

05 북촌 근대한옥과 사랑에 빠진 데이비드 킬번

06 한옥 대중화를 위해 앞서가는‘기라성한옥’(6월 29일 업로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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