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덕후가 레깅스를 만들면 생기는 일

조회수 2021. 1. 12. 18: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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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주 대표는 의류, 패션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다. 마케팅을 해본적도 없었다. 그랬던 그녀는 템플레깅스 사업을 시작했다. 기존의 큰 기업들과 차별점을 두기 위해서는 원단을 새로 개발해야 했다. 


자체적으로 원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겪었다. 원단 개발에만 5천만 원 이상의 비용을 썼지만 사기를 당했다. 새로운 원단을 짜기 위해 돈을 썼는데 업체는 원래 있었던 원단을 팔았다. 큰 사기를 당한 덕에, 론칭 직전에는 통장 잔고가 20만 원도 안 됐다.


송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레깅스를 런칭했다. 한 달 만에 5천만 원의 매출을 냈다. 사기당했던 돈을 다 해소한 것은 물론, 1년치 제품이 런칭하자마자 매진됐다. 살려는 사람은 있는데 팔 상품이 부족할 정도였다. 


성공적인 제품 런칭을 시작으로, 템플은 계속해서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다. 첫해 연 매출 3억, 둘째 해 13억 매출을 달성했다. 지금은 어엿한 3년차 레깅스 브랜드가 됐다.


제조업은 경험자가 뛰어들어도 성공시키기 어려운 시장이다. 수많은 경력자, 능력자들이 도전하지만 대부분은 도중에 포기한다. 


패션디자인 전공자도 아니고, 의류 생산 경험도 없었으며, 마케팅을 해 본 적도 없었던 송 대표는 어떻게 레깅스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

첫 사회생활은 월급 137만원 스타트업, 오피니언 리더의 꿈을 꾸며 창업하다

처음 사회생활은 어떻게 시작했나


 대학교 졸업 후 바로 스타트업에 들어갔다. 월급은 세금 떼고 137만 원 정도를 받았다. 했던 일은 단순한 운영업무였다. 고객들 질문에 답변하고, 설문 돌리고 답변 취합하고.


대학교 졸업생 치고 많은 월급은 아닌데, 스타트업에 들어간 이유는


3, 4학년 때부터 대기업에도 원서를 많이 넣고, 언론사에도 원서도 많이 넣었다. 전공이 예술학이라 뽑기 애매했는지, 서류에서 전부 다 떨어졌다.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고민하던 찰나에 스타트업에 들어가면 돈은 못 벌더라도 확실히 배울 게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스타트업 붐이기도 했고.


20대 때는 '돈을 얼마를 버는가'보다 '뭘 배우느냐',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급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2, 3년 안에 급여를 뛰어넘는 돈벌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회사를 다녔던 것 같다.


원래는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건가


나의 말과 글을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오피니언 리더가 되고 싶었다. '오피니언 리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생각하던 중 신문의 사설 오피니언 란을 보게 됐다. 


'000 주필', '000 편집장' 이런 식으로 본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알고 보니 그렇게 글을 쓰려면 신문사에 입사해서 최소 10년 정도는 기자 생활을 해야 가능할까 말까 였다.


사실을 알고 나서는 기자 준비를 오래 하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는 했지만 짧게 했다. 한 1년 정도? 계속 떨어지다보니 합리화를 시키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꼭 기자 생활을 10년 해야 오피니언 리더가 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년 정도만 바짝 준비하고 마지막 지원 서류에서 탈락하는 순간 다시는 기자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오피니언 리더의 꿈 자체를 포기했나


미래에는 신문이라는 매체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 블로그에서 탐사 저널리즘을 하는 곳들이 눈에 띄었다. 


탐사 저널리즘의 활동영역은 블로그였지만 정식 언론사보다 훨씬 더 퀄리티 있는 기사를 썼다. 뉴스보다 신뢰할만한 내용이 많았다. 그 현상을 보면서, 기자라는 직업에 10년을 투자했을 때 오히려 미래와 반대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사 취업을 포기하고, '행간읽기'라는 언론사를 창업했다. 10년 차 기자도 아니고 주필도 아니었지만, 내 의견을 적고 구독자들에게 메일로 전송하는 서비스를 했다. 매일매일 각 언론사의 정보를 취합해서 메일로 전송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서비스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몇 달 만에 구독자가 2만 명이 됐다. 유명한 기자들도 행간읽기에서 글을 쓰겠다고 연락이 왔다. 뉴스레터를 받는 사람들 중에는 대단한 사람들도 많았다. 


행간읽기는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 아니어서 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돈을 버는 사업 역시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접었다.

월급의 10배를 벌게 해 준 에어비앤비 사업

월급 137만 원을 받으면서 85만 원을 오피스텔 월세로 냈다고


그 전에는 친구랑 둘이서 투룸을 보증금 3천에 30만 원 내면서 같이 살고 있었다. 주차 공간이 많이 없는 빌라 건물이었다. 당시 남자친구가 차를 가지고 집에 놀러 오면, 30분 단위로 차를 빼라는 연락이 왔다. 


차 때문에 데이트도 제대로 못 했던 경험이 있어서, 다음에 집을 구할 때는 주차장이 좋은 건물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었다. 그걸 명분으로 '이 정도 집에는 살 수 있는 정도로는 벌자. 뭐가 됐든' 이라는 마음으로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월급 생활자들은 급여에 맞는 월세를 계산하고, 방을 구한다. 나는 '일단 지르면 어떻게든 맞춰진다', '밥은 못 먹으면 피하지방으로 살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웃음).


오피스텔을 에어비앤비로 활용했다


오피스텔에 들어가서 한 달인가 두 달 차에 바로 에어비앤비로 전환했다. 에어비앤비를 시작한 계기는, 운이 좋았다. 친한 언니와 저녁을 먹다가 ‘홍대에서 에어비앤비라는 걸 하고 있는데 되게 잘 돼’ 라는 말을 우연히 듣고 바로 따라 했다.


에어비앤비 사업이 결론적으로 꽤 잘 됐다. 월급의 10배를 벌었는데


회사에 다니는 상태에서 월급 10배의 수익이 났다. 회사의 상사들을 보면 3년 뒤의 내 모습이 대충 예상이 됐다. 얼마를 받고, 어떤 일을 하겠다는 게 보였다. 그래서 퇴사를 결정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에어비앤비를 하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


오래 전부터 감정 일기를 쓰고 있다. 에어비앤비를 하던 초창기의 감정 일기를 보면 거의 100일 중에 70, 80일은 예약이 들어오지 않는 꿈을 꿨던 것 같다. 이번 달에 꽉 차도 다음 달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 다음 달에 꽉 차도 그 다음 달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 불안감을 굉장히 많이 안고 살았다.


에어비앤비 첫 번째 방은 나의 월세방이었지만, 두 번째 월세방은 친구랑 공동으로 투자했다. 친구에게는 투자한 돈과 일정 수익을 배분하기로 보증을 한 상태였다. 추가적으로 이익이 생기면 다 내거였지만, 마이너스가 나도 내가 100% 손해를 떠안아야 했다. 불안함은 항상 내 몫이었다. 친구는 리스크가 없었다. 

갑자기 중국행...? 템플레깅스의 시작 '의복의 미래는 편한 것으로 진화한다'

갑자기 중국으로 이민은 왜 갔나


퇴사 후 4개월 동안 세계 일주처럼 여행만 다녔다. 여행 중 중국을 잠깐 갔었는데, 충격적이었다.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웬만한 나라들은 영어가 통하고, 어느 정도 상식선에서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 기업 등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중국은 전혀 아니었다. 세상은 중국과 비중국으로 나뉜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만의 세계라는 느낌이 있었다.


어차피 앞으로 오래 살 거고, 사업도 오래 할 거기 때문에 중국을 공부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마침 에어비엔비로 경제적 자유를 얻은 상태니까 몇 년은 투자해서 중국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봤다.


중국에서 있었던 1년 동안 얻은 것은


돈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깨달음들을 얻었다. 중국은 언어도 많고, 민족도 많다. 여러모로 복잡다단하다. 외국인들이 많은 곳에 살아서 프랑스, 미국 친구들이 많았다. 그 친구들과 중국의 근대사와 현대사, 중국의 자본주의와 체제 등을 수시로 토론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통찰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한국에 대한 애국심도 강화됐다.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경제적 자유만 추구할 것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해서 더 큰 사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 와서 바로 레깅스 사업을 시작했다


요가를 배우러 인도에 갈 정도로 요가를 좋아했다. 레깅스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인도에서의 경험이었다. 인도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레깅스를 입고 카페, 식당을 자유롭게 다녔다. 


사람들이 요가복으로 레깅스를 입고, 잘 때도 레깅스를 입는 걸 보면서 ‘레깅스가 의복의 미래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에서는 아직 레깅스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였지만, 곧 레깅스가 청바지를 대체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국내의 뛰어난 원단 기술을 활용하면 전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의복은 사람들의 활동성을 더 확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미래 의류는 알 수 없지만 벗고 다니는 것보다 편한 의류가 미래 인류의 의류라고 생각한다. 여자 입장에서는 그게 레깅스다, 남자들도 조거 팬츠가 됐든 편한 옷들이 정장, 슬랙스를 대체하게 될 거다. 

진정성으로 승부하기... '경쟁업체에 신경 쓸 시간에 고객에게 신경 쓴다'

레깅스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시작했던 건


원단을 짜주는 업체들을 만났다.


그때도 국내에 100억 이상의 매출을 내는 큰 레깅스 브랜드들이 많았다. 이 업체들을 디자인이나 마케팅으로 이길 수 있는 포인트는 하나도 없었다. 


고민해보니, 큰 브랜드들은 특정한 가격 존에 맞춰서 제품을 출시하고 있었다. 가장 많이 팔리는 가격대에 제품을 출시하는 걸 목표로 원가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대형 업체들도 더 좋은 원단에 대해 접근할 수 있지만, 인터넷에서 많이 팔리는 가격 존에 들어가야 매출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뭔가를 구매할 때, 생각 없이 사는 가격 존이 존재한다. 


6,900원, 9,900원 짜리는별 고민 안 하고 산다. 5만 원이 넘어가면 고민하기 시작한다. 네이버에서 검색하고, 후기를 본다. 이 과정에서 구매 이탈이 많이 일어난다.


나는 그 가격 존보다 조금 비싸지만 '만 원 더 주더라도 좋은 거 사고 싶어' 라는 니즈를 공략했다. 그렇게 해도 나 하나 먹고 살 만큼은 충분히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포인트는 비싼 원단이었다. 원단이 비싸다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재료를 써서 맛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재료를 어떤 레시피로 어떤 타이밍에 어떤 온도로 요리해서 최상의 결과를 내느냐가 중요하다. 


비싼 원단을 가지고 계속 실험해 봤다. 원단을 하나 완성하는 데 굉장히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일단은 마케팅이고 뭐고 나중으로 다 미뤘다. 일단 원단 업체들부터 찾았다.


공장에서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사기치고, 바가지 씌우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원단은 사람 눈으로 판가름할 수가 없다. 사람 눈으로 알 수 없는 조직도 있다. 원단을 분석하는 기계가 있어야 한다. 현미경으로 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3천 원짜리 원단을 만 원에 팔 수도 있다.


다른 곳에는 2,500원에 납품하고 나에게는 2만 원에 납품할 수도 있다. 원단에 들어가는 원사가 이탈리아에서 온 거고, 가공은 어떻게 했고, 가격은 얼마인지를 다 알 수가 없다. 그냥 '이게 업계 룰이구나' 하고 그냥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돈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걸 깨달은 시점은


지금도 못 깨달은 것 같다(웃음). 아직 원단을 분석하는 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열심히 단가를 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런칭 직전에는 거의 돈이 없었다고 들었다. 마케팅은 어떻게 했나


'제조업', '마케팅' 이런 생각조차 안 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단순히 '내가 원하는 레깅스를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었으니, 살 사람을 찾자. 어떻게 알리면 될까?' 이렇게 생각했다. 

길거리에 놓고 팔 수는 없으니 스마트 스토어를 만들었다. 상세페이지에 레깅스를 개발한 이유와 과정을 솔직하게 적었다.


마케팅도 안했는데 그걸 봐주는 사람이 있었나


다행히 보긴 보더라. 아무 것도 안했는데 백만 원 정도 매출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정성 있는 상세페이지가 가장 큰 무기였던 것 같다. 


레깅스 사업을 시작하는 100명 중 99명은 기존에 동대문에 있던 원단으로 레깅스를 만들어서 팔거나, 레깅스 완사입을 해서 로고만 붙여 판다. 


그런데 나는 원단을 직접 짰다. 원단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소비자가 느끼는 불충분한 느낌을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단부터 고객의 문제에 집중했기 때문에, 글을 통해 진정성이 어필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모든 결과물이 39,000원밖에 안 한다고 하면 뭔가 진정성 있어 보이지 않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판매한 이후 아무도 반품을 안 했다. 후기도 다 좋았다. '이런 구매를 한 건 처음이다', '사진도 없고, 너무 허접해서 반신반의로 샀는데 대박이다' 라면서.

아무리 그래도 13억 매출을 글 하나로 만든 건 아닐텐데, 후속 마케팅은 어떻게 했나


마케팅은 네 컷 만화로 풀었다. '~~~ 이래서 개발했다. 이런 제품입니다.' 라는 내용의 만화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개인 인스타에 만화를 올리고, 일 예산 7천원으로 인스타 광고를 태웠다. 구매가 폭증했다. 원래는 하루에 서너 건 구매가 일어났다면, 광고 이후에는 하루 열 건 이상 구매가 들어왔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뻔한 외국인 모델 사진만 보다가 만화가 뜨니까 신기해서 보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한 거였다. 광고에는 총 1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태웠는데, 설날 시즌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설연휴랑 주말이 붙어서 약 일주일이 쉬는 날이었다. 광고를 하는데도 일주일 동안 구매가 안 들어와서 '망했다', '광고비 날렸다'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날이 지나자마자 주문이 엄청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10분마다 알림이 오는데 신규 주문 6, 7, 30... 처음에는 오류인 줄 알았다.


템플과 비슷한 전략으로 뛰어드는 데도 많을 것 같은데


카피한 업체는 진짜 많았다. 심지어 친했던 친구도 베꼈다. 어느 날, 친구가 엄청 구체적으로 물어왔다. "그게 왜 돈이 돼?", "이게 왜 시장이 돼?", "어떻게 하는 거야?", "너 제품 뭐가 다른 거야?"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거래처한테 연락을 받았다. "친구가 레깅스 런칭하겠다고 연락 왔어요" 라며.


그때 당시는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사실 친구가 뛰어들겠다고 했던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본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계속 카피를 시도했다. 웹툰 마케팅도 따라하고, 내 글쓰기 스타일도 따라하고. 카피라이팅도 따라하고.


카피업체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나


요즘은 관심이 없다. 친구들이 가끔 우리 회사와 비슷한 광고를 보고 '너희 회사인 줄 알았어' 라고 연락을 하면 그냥 'ㅋ' 하나 보내고 만다. 너무 익숙하기도 하고, 경쟁업체에 신경 쓸 시간에 우리 고객한테 집중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템플과 송연주의 비전 '아이템은 일시적이고, 고객은 영원하다'

3년 만에 13억 매출,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는 템플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생각인가


아이템은 일시적이고 고객은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고객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다. 레깅스 중에서도 우리가 제공하는 착용감을 좋아한다거나, 우리의 브랜드 방향성을 좋아한다거나,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우리 브랜드가 신뢰를 쌓으면 그 고객들에게 레깅스가 아닌 것도 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고객들에게 적합한 다른 아이템을 한번 런칭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 회사 이름을 템플나인으로 변경했다. 템플이라는 브랜드로 9개의 사업을 할 계획이다. 운동복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서 건강, 밸런스, 명상, 마음 챙김 등.. . 앞으로는 사람들이 옷을 덜 사고, 보이는 것보다 내면을 채우는 것에 집중할 거라고 본다. 교육 콘텐츠를 듣거나, 경험에 투자한다거나.

송연주와 템플의 목표


개인적인 꿈은 수년 안에 같이 일을 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서 템플을 같이 전개하고 싶다.


기존에는 드러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숨어지냈었다. 클래스 101, 유튜브를 통해 나라는 사람을 노출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이렇게 드러내게 된 만큼, 나라는 사람과 템플이라는 브랜드를 잘 결합하고 싶다. 


나도 템플스러운 삶을 살고, 고객들도 날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면 좋겠다. 다들 건강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템플이 건강, mindfulness 등의 분야에서 얼리어답터 브랜드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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