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죠, 올 한 해 수고한 당신을 위한 영화 5

조회수 2020. 12. 31.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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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김명재 객원 기자

오지 않을 것 같던 2020년에도 끝은 찾아왔다. 2020년, 인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하루하루를 살았다. 사실, 버텼다는 말에 더 가까운 한 해였다. 눈앞의 하루하루를 쳐내는 것조차 버거운 나날들이었기에 더욱 위로가 조심스럽다. 어쭙잖은 위로가 더욱 마음을 상하게 하진 않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한 해 수고한 당신을 위해 영화 5편을 준비했다. 영화를 보는 그 2시간만큼은 잠시 소란스런 세상은 잊고 온전히 스스로를 보듬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다시 문밖에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2021년은 더 나아질 거란 희망을 얻길 바라며 영화들을 소개한다. 


다가오는 것들
L’avenir, Things to Come

감독 미아 한센-러브

출연 이자벨 위페르, 에디뜨 스꼽

<다가오는 것들>(2016)

시련은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예고도 없이, 일상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한 사람의 인생에 급습한다. 그 누구도 2020년이 코로나 한마디로 요약될 거로 예측하지 못했듯이, 불행은 예측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그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갑자기 찾아온 시련에 대한 한 여자의 태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영화 초반, 꽤나 안정적인 일상을 보낸다. 애틋하진 않아도 편안한 남편과의 관계, 교과서를 집필할 정도로 명망 있는 철학 교사란 지위. 나탈리의 엄마가 불안증으로 인해 계속해서 그를 호출하는 것도 나름 버틸 만 하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을 거라 믿었던 일상은 아주 간단하게, 그 균열을 보여준다.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가 갑작스레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며 이혼을 선언한다. 불안증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결국 자살 시도 후 요양원에 들어가고 만다. 오랜 시간 철학 교재 저자로 참여해 올 만큼 명망 있는 철학 교사지만, 개정판을 내면서 참여에서 배제당한다. 그를 지탱하던 축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철학 교사지만 그도 결국 한 사람이다. 한꺼번에 몰려온 인생의 위기에 그는 당혹스러움과 자기연민으로 휩싸인다. 영화는 쉬운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렵지만 다시 한번 균형을 찾아 나간다. 노년이라고 완전한 삶을 이룬 건 아니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안전하며, 위태롭다. 갑작스레 다가온 위기에 그는 지난날 자신의 발자국을 돌이켜 보며 나아갈 방향을 알아간다. 


원위크
One Week

감독 마이클 맥고완

출연 조슈아 잭슨, 리안 바라반, 캠벨 스콧

<원위크>(2009)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최대 2년입니다. 최소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원위크> 주인공 벤 타일러(조슈아 잭슨)는 혈액, 간, 림프샘에 암이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생존율은 겨우 10%. 그는 치료받기 보다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실어 무작정 서쪽으로 가는 걸 택한다. 오토바이를 극도로 싫어하는 약혼녀 사만다(리안느 바라반)도 제치고, 가족에게는 말기 암이라는 사실도 숨긴 채 오롯이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다.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는 <원위크>는 캐나다의 풍경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캐나다의 모을 충실히 써내려간다. 화려하진 않지만 흔들림 없는 영화의 시선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자아를 찾아 떠나는 벤의 여행기에도 적용된다. 점점 더 멀리 나아갈수록 소중한 것들에 대해 깨달아 가는 그를 보면, '그의 마지막 여행에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생에 마지막, 단 일주일이 주어진다면 그때 우린 무엇을 할까. 얼마 남지 않은 2020년을 떠올리며, 한 번쯤은 고민해 봐도 좋을 듯하다. 


태풍이 지나가고
海よりもまだ深く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아베 히로시, 키키 키린, 마키 요코, 요시자와 타이요

<태풍이 지나가고>(2016)

떠난 사람은 말이 없다. 남겨진 사람들만이 그 시간들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는 료타(아베 히로시) 아버지의 죽음과 료타와 쿄코(마키 요코)의 이혼이라는 두 가지 상실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타 영화와 다른 점은 이 두 가지 사건이 제대로 서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미 떠나간 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보다, 사건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비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물을 선하게만 그리지 않는다. 따뜻한 줄 알고 손을 뻗으면 의외로 단단하고 차가운 질감에 놀라고 마는, 그런 영화에 능한 감독이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고>는 감독의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여타 작품들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온건하다. 료타는 소설가를 꿈꾸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흥신소에서 남의 뒤를 캔다. 이마저도 소장이나 고객들을 속이며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다. 악인까지는 아니지만, 마냥 선량하지도 않은 소시민. 사실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을까. 아마 어렸을 때 상상했던 어른은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뤄지지 않은 꿈을 품은 채 살아간다. 꿈을 이룬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나는 무엇인가 부족했던 건 아닌가, 내 삶은 실패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는 그런 이들에게 따스운 위로를 건넨다. 꿈을 이루지 못한 게 삶의 실패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패터슨
Paterson

감독 짐 자무쉬

출연 아담 드라이버, 골쉬프테 파라하니

<패터슨>(2017)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매일 아침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일어나고, 매일 똑같은 구간에서 버스를 몰고, 퇴근 후엔 강아지 산책을 가고, 바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쓰고, 잠이 든다. 음악시간에 배웠던 동요 구조 aa'ba처럼 영화의 전개는 예측 가능하다. 그나마 다른 b 부분에서도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진 않는다. 주인공 패터슨이 쓴 시 공책이 찢어졌을 뿐이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나열했을 때, 이 영화는 지루하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패터슨>을 사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지루한 일상을 시의 언어로 풀어내는 힘이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 마치 운율 같은 이 말처럼 영화는 전체적으로 시를 닮아 있다. 성냥갑 하나로 며칠에 걸쳐 고민하고, 퇴고를 하며 시를 쓰는 패터슨의 모습은 여느 시인 못지않다. 몇 번이고 곱씹는 언어 속에서 새로운 운율을 발견하며, 그는 시를 써내려간다. 시내버스 기사란 특성상 만나는 사람도, 풍경도 거의 비슷한 일상이지만, 그는 매일 조금씩 다른 부분을 발견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조금의 차이를 발견하는 아름다움, 그게 바로 시 아닐까. 그래서 그의 일상은 시적이다. 우린 때로 변하지 않는 일상에 염증을 느낀다. '내 인생은 쳇바퀴 같아'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은 조금씩 변한다. 애정 어린 눈으로 고요한 일상을 바라보면, 생각보다 더 많은 시적인 순간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와일드
Wild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 토머스 새도스키

<와일드>(2014)

나의 우주와 같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면. 영화 <와일드>는 삶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주인공 셰릴(리즈 위더스푼)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PCT(Pacific Crest Trail,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자신과 동생을 구해낸 엄마를 깊이 사랑하고 있던 셰릴은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방황한다. 마약에 찌들어 가며 '살아야 한다'는 이유도 의욕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던 그는 다시 한번 살아보기 위해 4285km에 달하는 PCT 여정을 떠난다. 

매 순간 '그만둘까' 라며 좌절하지만, 그는 결국 한 발 더 내딛기를 택한다. 발톱이 빠지는 고통과 '혼자'라는 불안감을 극복하면서 고난 앞으로 나아간다. 걷는 과정에서 그는 해탈을 경험하지 않는다. 때로 누워서 "난 배고프지 않다. 난 음식이 그립지 않다. 타코와 칩스와 마가리타가 그립지 않다"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여전히 흔들리고, 고통을 느끼며 분노에 차오른다. 다만 바뀐 건 잃어버렸던 자신의 시간을 발견한 것. "아무렇게나 흘려보낸 시간은 얼마나 야성적인가" 라는 대사는 무기력과 슬픔, 번아웃, 절망 등으로 흘려보낸 시간들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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