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마저도 클-린하다는 ROTC 출신의 국민 배우

조회수 2020. 11. 4. 17: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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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김명재 객원 기자

국민 배우라는 수식어 외에 그를 더 표현할 말이 있을까.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얼굴을 다 합하면 '한국인'이라는 집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우 안성기는 말 그대로 한국인을 연기했다. 한국 영화 역사를 한 가운데서 관통한 그는 그 자체로 영화계의 역사다. 원본이 주는 아우라가 있다. 안성기의 연기는 원본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기를 기억하고, 따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친 영화계에서 63년이란 시간을 견뎌오며 국민배우에 자리한 배우 안성기. 한국인을 연기한 안성기.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알지 못했던 그에 대한 사실들을 정리했다. 


1957년, 영화 <황혼열차>
아역배우로 데뷔했다.

<황혼열차>(1957)

중후한 신사 모습이 익숙하지만, 그에게도 분명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는 1957년 영화 <황혼열차>의 아역으로 데뷔했다. 1957년은 한국전쟁 후, 한창 복구 중이던 시기였기에 전문적인 아역배우가 없었을 시기였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황혼열차> 김기영 감독과의 인연으로 스크린 데뷔를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역으로서 연기력을 인정받아 이후 영화 <하녀>에 출연했다. 

<하녀>(1960)

한국 최초 해외 영화제 연기자 수상

그는 전후부랑아들을 다룬 김기영 감독의 <10대의 반항>(1959)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도 수상했다. 이는 한국 최초 해외 영화제 연기자 수상 기록이다. 이후 아역 시절 출연한 영화만 해도 70여 편에 다다른다. 이는 웬만한 배우의 평생 필모그래피보다 많은 수준이다.(이 사실을 안 후 필모그래피를 훑을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유년시절을 모두 영화 속에서 보낸 그는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게 오히려 부럽기도 했다고 밝혔다. 네 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할 때도 있었을 만큼 왕성한 아역활동을 했기에 평범한 유년시절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의 유년시절은 영화로 시작해서 영화로 끝난 셈이다. 그는 "영화는 내가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고 그 속에서 호흡하며 자라난 자연스러운 환경"이었다고 덧붙였다. 


조용필과 중학교 동창이다.

연예계 전설적인 동창, 안성기와 조용필은 중학교 동창이다. 경동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용필과 54년 지기다. 인근 동네인 돈암동과 정릉에 산 두 사람은 연예계 죽마고우로 유명하다. 자주 집에 놀러 갈 만큼 학창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두 사람이지만, 그는 학창시절 조용필을 떠올리며 "조용한 모범생이어서 가수가 될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연예계에서 '국민' 타이틀을 달아도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 거장이 된 두 사람은 2013년, 나란히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최고 영예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왼쪽부터)조용필, 안성기(사진 출처 : ystar)

병역도 클-린한 ROTC 출신.

군대 시절 안성기

사춘기가 지나면서 공백기를 잠시 가진 그는 배우가 아닌 삶도 준비를 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입학한 안성기는 ROTC에 지원했다.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대하기도 전에 베트남이 패망했고,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베트남어로는 취업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는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고 그 결과, 자연스레 영화계에 돌아왔다. 그전까지 그는 백수인 채로 2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다. 그 2년의 시간 동안 그는 프랑스문화원에 다니면서 많은 예술 영화들을 보고, 영어공부도 하며, 네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시간이었다. 단단한 배우가 되기 위한 도약의 시간이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했던 준비들이 이후 배우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주었다고 믿는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에게도 무명시절이 있었다.

<병사와 아가씨들>(1977)

어린 시절부터 배우로서 탄탄하게 입지를 다져온 그이지만, 그에게도 무명시절은 존재했다. 성인연기자로 다시 영화계에 입성했을 때, 그는 복귀작으로 <병사와 아가씨들>을 선택했다. 결과는 흥행 실패였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로 그는 무명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그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을 맡아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영화계의 독보적 1위 수상기록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 지금 글의 중반을 달리고 있지만 아직도 흑백영화시절이라는 게 놀랍다.

긴 배우 역사만큼 쌓인 상도 무수히 많다.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것도 모자라 해외 영화제 연기자 최초 수상자이기도 하다. 영화제를 포함해 63번 수상을 기록하며 넘사벽 수상기록을 보여줬다. 그중 남우주연상은 38회에 달한다. 영화계 3대 영화상 중 하나인 대종상 남우주연상은 1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은 9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은 10회다.  


안성기가 꼽은 '연기 인생 최고의 캐릭터'

<라디오 스타>(2006)

한국인을 연기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다양한 배역을 소화한 그는 연기 인생 최고의 캐릭터로 영화 <라디오 스타>의 매니저 박민수 역을 꼽았다. 이유는 '포근하면서 저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박민수의 헌신적이고 편안한 이미지는 확실히 안성기의 분위기와 닮아 있다. 


그에게도 하기 싫은 역이 있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코미디, 멜로,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더 다양한 배역을 연기해온 그이지만, 그에게도 하기 싫은 배역은 있었다. 바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속 살인범 장성민이다. 긴 연기 인생 처음으로 악역을 맡은 그는 처음엔 "싫었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을 받아들인 이유는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는 "그 어떤 역할이든 존재감과 깊이만 변하지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역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오랜 시간 연기를 해왔음에도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뚝심 있게 나아가려는 모습에서 '국민배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 천만 영화 주연

<실미도>(2003)

대한민국 영화 역사 중심에 있었던 안성기는 첫 천만 영화의 탄생 순간에도 함께 했다. <실미도>를 안 본 사람은 있을지라도 "날 쏘고 가라"라는 대사를 모르는 이는 많지 않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덕에 수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하는 <실미도> 속 최재현 준위. 국민적 지지 속에 첫 천만 관객 시대를 연 상징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작품에 중심이 되어 영화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안성기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 같이 연기했던 후배 배우 중 한 명이 '선배님, 이 기록은 잘 안 깨지겠죠?'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그래, 내가 수십 년 연기를 했는데 처음 있는 일이야'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런데 단 두 달 만에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개봉하더라(웃음)"라고 말했다. 


그에게 '연기란'

<종이꽃>(2020)

한국 영화의 얼굴이자, 페르소나인 배우 안성기. 영화인에 대한 인식 자체를 높인 국민배우 안성기는 여전히 여전히 현역에서 연기를 하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를 묻자 "나의 꿈, 나의 행복, 삶 그 자체"라고 답했다. 간결하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답변이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올해에도 영화 <종이꽃>(2020)으로 국민 곁에 찾아왔다. 평생 '종이꽃'을 접으며 죽은 이들의 넋을 기려온 장의사 성길 역을 맡은 그는 이번에 어떤 희망을 국민들에게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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