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만났네 또 만났어, 한국 대표하는 배우들의 재회
최근 코로나19의 여파를 딛고 개봉한 두 영화 <강철비 2: 정상회담>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공통점. 과거 한 영화에 공동주연으로 만났던 배우들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는 점이다. <신세계>(2013)에서 조직의 부두목과 조직에 잠입한 경찰을 연기해 연인을 방불케 하는 케미스트리를 보여준 황정민과 이정재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먼 이국땅 위에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주인공으로 만났다. <강철비>의 속편 <강철비2: 정상회담>은 남북문제라는 소재와 정우성 곽도원 두 배우를 공유할 뿐, 두 배우의 캐릭터가 국적이 서로 뒤바꾼 채 진행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여러 작품에서 협업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안성기 박중훈
<투캅스>, 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
<라디오 스타>, 2006
시간을 잠시 앞으로 돌려보자. 데뷔작 <깜보>(1986)부터 주연을 맡아 청춘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를 성공시킨 박중훈과 80년대에 한국영화사에 남을 수많은 명작들에 출연한 안성기는, 간판 그림을 그리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두 남자가 예기치 않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는 <칠수와 만수>로 처음 공동주연을 맡았다. 그로부터 5년 후 다시 만난 코미디/버디 무비 <투캅스>는 꼼수 부릴 궁리만 하는 베테랑과 원리원칙을 추구하는 신입 경찰의 투닥거림을 담아 1994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앞선 두 작품에서 동료였다면, 이명세 감독의 야심찬 액션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선 언제나 조용히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범인과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다혈질 형사로 만났다. 한물간 가수와 십수 년간 그의 곁을 지키는 매니저의 우정을 그린 <라디오 스타>는 근 20년간 여러 작품을 같이한 두 배우의 인연이 있어 확실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한석규 최민식
<쉬리>, 1999
<천문: 하늘에 묻는다>, 2019
박중훈과 더불어 90년대 한국영화를 양분했던 배우 한석규는 최민식과 연이 깊다. 제비족 홍식과 그에게 돈을 떼먹힌 시골청년 춘섭 역으로 연기 변신을 꾀한 드라마 <서울의 달>(1994)은 두 사람이 함께 처음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공동주연을 맡은 첫 영화는 블랙코미디 <넘버 3>다. 자신을 늘 조직의 '넘버 2'라고 주장하는 깡패 태주와 입에 욕을 달고 다니는 열혈 검사 마동팔을 연기했다. 대립 관계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초 <쉬리>에서 각자 남한의 특수비밀요원과 북파 공작원 역을 분해 한층 더 뚜렷해졌다. 이후 각자 다른 행보를 보여준 한석규와 최민식은 20년 만에 허진호 감독의 사극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다시 만나, 기존 캐릭터에 비해 한껏 힘을 덜어낸 채로 브로맨스를 방불케 하는 세종과 장영실의 두터운 관계를 보여줬다.
송강호 박해일
<괴물>, 2006
<나랏말싸미>, 2019
송강호를 사랑하는 감독 봉준호는 초기작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 송강호와 박해일을 같이 내세웠다. (당시엔) 미제의 연쇄살인사건을 경유해 80년대 후반의 야만을 보여준 <살인의 추억>에선 형사와 유력한 용의자로 만나 서로의 숨통을 뒤흔들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희대의 명대사가 서로 완전히 지친 두만과 현규가 빗속에서 대치할 때 나왔다. 봉준호의 바로 다음 작품 <괴물>은 '박씨' 형제를 연기한 두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말이야 형제지, 사실상 영화 속 다섯 가족 중에서 가장 서로 간에 친밀함이 떨어지는 관계라 해도 무방하다. 13년 만에 다시 만난 건 사극 <나랏말싸미>였다. 송강호는 세종대왕을, 박해일은 신미 스님을 연기해 한글을 창제하기 머리를 맞대는 이야기를 그려냈지만 역사왜곡이라는 거센 비판에 부딪히고 말았다.
송강호 신하균
<복수는 나의 것>, 2002
<박쥐>, 2009
송강호와 신하균의 연은 전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편애에서 비롯됐다. 지금의 박찬욱을 있게 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선 두 배우 모두 초코파이와 김광석을 좋아하는 북한군을 연기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큰 성공으로 인해 제작될 수 있었던, 박찬욱 취향의 결정체라 할 만한 <복수는 나의 것>은 누나를 살리기 위해 유괴를 계획했다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행을 맞게 되는 청각장애인과 그에게 딸을 유괴당한 중소기업 사장의 악연을 담았다.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나란히 금자를 해하려는 납치범 무리로 카메오 출연했던 그들은, 히로인 태주(김옥빈)의 욕망을 옥죄는 남편 강우와 태주를 사랑하게 되는 뱀파이어 신부 상현 역으로 이상한 삼각관계를 이뤘다.
송강호 이병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
<비상선언>, 2021
송강호와 신하균이 북한군으로 만났다면, 송강호와 이병헌은 북한군과 남한군으로 만났다. 두 분단국의 군인이 만나 일촉즉발의 긴장에 휩싸이지만, 상상치도 못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결국 서로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는 드라마틱한 관계가 걸출한 두 배우의 연기로써 발현됐다. 두 번째 협업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남과 북이 갈라지지 않았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극악무도한 마적단 두목 창이(이병헌)는 '나쁜 놈',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열차털이범 윤태구(송강호)는 '이상한 놈'이다. 흥미롭게도 두 영화 속 두 배우의 캐릭터 관계가 후반부에 갑자기 반전되면서 클라이맥스로 접어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병헌이 특별출연으로 정채산을 연기한 <밀정>(2016)에선 두 배우의 긴장 넘치는 음주 대화 신이 등장한다. 송강호와 이병헌은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한재림 감독의 신작 <비상선언>에 캐스팅됐다.
이병헌 전도연
<협녀, 칼의 기억>, 2015
<비상선언>, 2021
이병헌과 전도연은 <비상선언>에서 세 번째 협업을 하게 된 또 다른 케이스다. 그들의 연은 21세기를 앞둔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도연은 17살 소녀 홍연을 이병헌은 초등학교로 부임한 21살 선생님 수하를 연기했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풋풋한 첫사랑을 그린 작품인 만큼 두 배우 모두 기존의 도회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순박한 면모를 보여줬다. 전도연과 박흥식 감독의 세 번째 콜라보이자, 이병헌과 전도연이 16년 만에 호흡을 맞춘 <협녀, 칼의 기억>에서도 캐릭터의 관계는 로맨스다. 과거 사랑했지만 대의를 위해 서로 떨어져야만 했던 사이. 사극과 액션을 동시에 시도한 빼어난 두 배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약이 심한 서사의 허점을 메우긴 어려웠다. 내년 개봉할 <비상선언>이 그 아쉬움을 씻어줄 수 있을까.
전도연 설경구
<생일>, 2019
전도연과 박흥식 감독의 첫 만남은 산뜻한 로맨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였다. 이 작품에서 설경구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서울 근교의 아파트 상가에서 일하는 학원강사 원주(전도연)는 학창시절부터 지각 한번 안 한 성실한 은행원 봉수(설경구)와 사랑을 키워간다.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배우로서 커리어를 껑충 뛰어오르게 한 <해피 엔드>(1999)와 <박하사탕>(2000) 다음, 담백한 연기를 선보여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을 증명했다. 근 20년이 지나 <생일>에서 다시 만나 부부가 된 전도연과 설경구는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담담하되 확실히 드러내는 경지를 보여줬다.
설경구 문소리
<오아시스>, 2002
<스파이>, 2013
설경구의 연기 파트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배우, 바로 문소리다. 스무 살 청년 영호가 5.18의 상처를 입고 점점 망가져가는 시간을 역순으로 따라가는 <박하사탕>에서, 설경구는 시절마다 폭력성을 더해가는 변화를 보여준다면 문소리는 기억 속 첫사랑처럼 언제나 한결같이 청아한 모습으로 등장해 영호의 파탄을 강조한다. <박하사탕>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은 <오아시스>에서 아주 지독한 방식으로 성사된다. 형이 저지른 뺑소니 죄를 대신 쓰고 복역한 종두는 뺑소니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의 가족을 찾아가 몸이 불편한 공주를 만난다. 그 사랑에 동의할 수 없을지언정, 두 배우가 육체를 불태우면서 선보인 연기에는 이견을 더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다소 무겁거나 불편한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와 달리, 추석시즌을 겨냥한 코미디 영화 <스파이>를 보면서는 설경구와 문소리의 연기를 보면서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김윤석 하정우
<황해>, 2010
<1987>, 2017
빼어난 배우들의 합이란 한번만 보기엔 영 아쉬운 걸까. 나홍진 감독 역시 데뷔작 <추격자>의 김윤석, 하정우 콤비를 2년 뒤 <황해>에서 다시 만나게 했다. 두 영화 모두 아주 징글징글한 추격전. 망가진 전직 형사 엄중호와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지영민은 몸을 던져 추격전을 벌이고, 무적에 가까운 전투력과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면정학은 끈질긴 본능으로 생존해내는 김구남의 뒤를 쫓는다. 저마다 워낙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두 배우지만, 함께 붙었을 때의 긴장감과 시너지가 그들의 능력치를 저 높이까지 끌어올렸다. <황해> 이후 7년 만에 다시 만난 <1987>에서도 김윤석과 하정우의 캐릭터는 대척점에 있다. 정치적 야만이 극에 달한 시대, 경찰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죽고 박 처장(김윤석)은 시신을 화장하려 하지만,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는 이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나홍진의 두 영화가 김윤석이 하정우를 쫓는 이야기였다면, <1987>은 하정우가 김윤석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구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