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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러리·2016.07.29. 작성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눈으로 보는데 귀로도 들리면 그게 명작"

뮤지션 김수철 "36년 해온 국악 공부 이제 무대에서 보여줄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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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르게 사는 사람 곁에는 책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해서 살아보겠다는 뜻의 다른 말입니다.

그 사람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의 독서 근황을 알아보는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코너가 예측 불허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일기 릴레이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서 뜻밖의 독서 취향을 발견하고 의외의 책과 조우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소설가 김연수->'영혼의 슬픔' 저자 이종영->출판기획자 조원식->만화가 박흥용->임지훈 카카오 대표->이준익 감독->박정민 배우->임정욱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김봉진 '배달의 민족' 대표->에피톤 프로젝트의 차세정->김주환 연세대 교수->뮤지션 한희정->김대현 작가->서동원 바른세상병원 원장->이재민 그래픽 디자이너->재즈 보컬리스트 허소영->영화배우 안성기-> 북바이북의 김진양 대표편까지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영화배우 안성기 씨가 추천한 가수이자 작곡가인 김수철 편입니다.


가수 김수철 씨를 추천합니다. 영화 '고래사냥'에도 같이 출연했습니다만 그전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입니다. 꾸준히 한길을 가는 고집과 끈기를 좋아합니다. 늘 철들지 않은 아이 같은 모습도 좋구요. /안성기 씨의 추천의 말

가수 김수철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시는지요?

아마 연령대에 따라 낯선 이름일 수도, 반가운 이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대 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던 '작은 거인'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못다 핀 꽃 한송이' '내일' 같은 발라드를 애절하게 부르던 솔로 가수. 국민 가요 '젊은 그대'의 싱어송라이터. 영화 '고래 사냥'의 순진무구한 병태. '치키치키 차카차카초'로 시작되는 만화 영화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가의 작곡가. 온 국민을 울린 우리 영화 '서편제'의 작곡가.

그 밖에 86 아시안게임부터 88 올림픽, 2002 월드컵, 2010 G20 정상회의 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국제 행사의 음악감독과 작곡도 도맡았습니다. 이 모든 기록이 한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합니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원래 인터뷰를 잘 안 하는데 친형처럼 생각하는 안성기 형님 부탁이라니까..."라고 했습니다. 둥근 뿔테 안경에 모자를 눌러쓰고 펄렁이는 8부 바지, 컬러풀한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환갑을 앞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개구장이 같은 웃음소리도 여전했습니다.

책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만났지만 그가 걸어온 긴 음악 여정을 듣다 보니 마치 마술사의 모자에서 오색끈이 딸려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가수 김수철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 같았습니다. 수면 아래에 잠긴 이면에는 우리 소리 현대화에 바친 36년의 노력이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국악 현대화와 세계화를 위한 공부와 작품 쌓기에 몰두해 왔다면서 이제 본격적인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의 모습은 노래 제목처럼 여전히 '젊은 그대'였습니다. 길지만 한번 들어보시지요.

-요즘은 TV에서 보기 힘든데요, 먼저 근황을 들었으면 합니다.

아마 가수 활동을 오래 안 하고 지내다 보니 그러실 겁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최근 몇 달 사이에 KBS '7080' 500회 특집, '불후의 명곡' 200회 특집, '올댓 뮤직' 200회 특집, '열린 음악회', EBS '공감' 같은 프로에 출연을 했어요.

영화 음악으로는 최근에 임권택 감독의 '화장'을 작곡했고, 지금 SBS에서 하고 있는 주말 연속극 '그래 그런 거야' 주제곡도 작곡했어요.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는 일은 많아요.

-가수 김수철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대중가요 외에 어떤 작업들을 해오셨지요?

금년으로 국악 현대화 작업을 36년째 하고 있어요. 운이 좋게도 국내에서 열린 세계적인 행사 7개의 음악 감독과 작곡을 다 맡아서 했어요. 그런 경험도 있고 해서, 교수들 대상으로 강의도 했고...

강연 같은 경우엔 2010년 서울대 법대 교수님들 앞에서 한 게 처음이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국민대, 서울대 의대에도 가서 했죠. 우리 소리 문화를 주제로 한 건데 동서양의 소리를 비교해 보여주는 거예요. 가령 영화 '서편제' 같은 음악의 작곡 배경도 설명해주고 들려주고하는 거죠. 그런 걸 6년간 해왔어요.

-서울대 법대 강연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학교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로서는 우리 문화를 알릴 기회도 되고, 특히 교육자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으니까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응했죠. 처음엔 후회를 많이 했어요. 법대 교수들이 따분해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강연 중에 기립박수를 받았어요. 저도 놀랐죠. 그게 소문이 나서 국민대, 서울대 병원 같은 데도 가서 했죠.

그동안 국제 행사 음악을 맡아서 일을 하면서 세계가 보는 한국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 경험과 공부를 토대로 한 여러 내용을 강의 속에 넣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더군요. 하지만 그런 일에 시간을 너무 뺏길 수는 없어서 강연은 선별적으로만 해요. 그 외엔 주로 작곡에 전념해요.

-우리 소리 현대화 작업은 얼마나 해오셨죠?

1980년부터 해왔어요. 그러니까 올해로 36년째가 됐어요. 이게 어려워요.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돈은 안 되는데. 실험도 많이 해야 하고.

하지만 우리 문화를 현대화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사진이든, 우리 문화의 뿌리 위에서 현대화한 것만이 세계에 나가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워낙 서양의 다양한 문화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세계에 나가서 보여주려면 우선 작품이 웬만큼 쌓여야 해요. 화가로 치면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림이 많아야 된다는 얘기예요. 지금 당장 보여줄 300점, 만일 가능성을 인정받아서 세계적인 프로듀서가 붙을 경우 그 다음에 보여줄 300점, 또 인정받으면 그 다음 작품. 이런 식으로 일단 작품이 충분히 누적이 돼야 이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나이 50까지는 작곡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우리 소리를 다양한 장르로 현대화한 곡을 써왔어요. 그러는 동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인터뷰도 잘 안 했으니까 잘 모르실 거예요. 영화 서편제나 올림픽, 월드컵 개막식 음악 같은 큰 행사야 알려졌지만.

한국 무용 음악이랑 현대 무용 음악 작곡도 했어요. 기타를 국악에 응용한 '기타 산조'라는 것도 제가 곡을 만들고 이름을 붙인 새로운 장르예요.

그러는 도중에도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곡 주문받은 것도 하고 공부도 병행하다 보니, 이미 나이가 50을 훌쩍 넘겼어요. 그래도 이제 시기가 무르익어서 좀 움직여 보려고 해요. 그동안 작곡한 것들을 이제 공연으로 보여주고 들려주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일반 사람들이 '와- 이런 게 있구나' 하겠지요.

-지금 젊은 세대는 김수철이 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나마 '치키치키 차카차카초' 이 노랫가락은 많이들 알아요. '날아라 슈퍼보드' 만화영화 주제가는 워낙 알려져서.(웃음) 그리고 가요 '젊은 그대'의 경우에도 세대와 관계없이 많이들 불리고 있어서 젊은층에서도 아는 것 같아요.

-사실 일찍 대중적으로 유명해지셨잖아요. 밴드 '작은 거인' 시절부터로 기억하는데요.

방송으로는 내년이 데뷔 40주년이 되지요. 대학 들어갔을 때 기타를 남들보다 조금 잘 쳤어요. 그게 알려져서 1학년 때 KBS에 나가서 방송을 처음 했어요. '젊음의 찬가'라는 프로에 나가서 내가 작곡한 '내일'이랑 팝송 대여섯 곡을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MBC 대학가요제가 있기 전인가요?

대학가요제는 그 후에 생겼죠. 대학가요제는 두 번이나 떨어졌어요. 1회는 안 나갔고 2회는 예선에서 탈락했죠. 아마 당시로선 제일 시끄러운 음악을 해서 그랬을 거예요. 헤비메탈에 속하는 걸 했거든요. TBC 해변 가요제에서도 탈락하고. 그래서 '나는 대학가요제는 아닌가 보다' 생각했죠. 그러던 차에 대학축제 경연대회인가 TBC 생방송에서 상을 받으면서 알려지게 됐어요.

-대학 때 전공은 어느쪽으로 하셨죠?

통신학과로 들어갔어요. 아버지가 앞으로는 기술이 중요하다면서. 전자통신, 전자공학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공부는 수학 부담이 커서 많이 힘들었어요.(웃음)

-기타는 취미로?

고등학교 때도 밴드를 했으니까요. 부모님 몰래몰래.(웃음). 그때 부모님들은 문화예술은 무조건 다 딴따라로 봤어요. 그림은 환쟁이, 철학 문학은 글쟁이, 이러면서 싫어하던 세대였어요. 아버지가 조그마한 개인 사업을 하셨는데 엄청 보수적이셨어요. 시끄러운 것 싫어하시고. 자식도 안정된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이 되길 바랐죠. 그래서 기타는 몰래몰래 할 수밖에 없었어요.

-몰래 치신 실력이 그 정도였다는 얘긴가요?

내가 '김석봉'(어머니가 촛불을 끄고 글씨 시험을 보게 한 한석봉에 빗댄 별명)이었다니까요.(웃음) 이불 속에 들어가서 기타 연습을 했어요. 기타 줄 사이에 종이를 끼워서 소리가 안 나게. 머리 속으로 음을 생각하면서 연주 연습을 했어요. 기타는 당시에 집집마다 한 대씩은 다 있었으니까. 형들이 사놓은 걸 가지고.

-대단하네요.

대단한 게 아니라, 너무 좋아하면 그렇게 되죠.
그래서 사실 고교 시절부터 기타로 조금 소문이 났어요. 명동성당에서 1년에 한 번씩 청년들을 위한 음악회를 했는데 밴드로 나가서 알려졌어요. 대학에 들어갔더니 섭외가 오더군요.

-그때부터는 승승장구하셨지요.

승승장구한 게 아니에요. TV에 출연할 때도 부모님이 알아챌까 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계속 무대에서 왔다갔다 했잖아요.(웃음) 그러다가 결국 어느날 들통이 난 거예요. 보통은 TV 화면에 대학 그룹 '작은 거인'으로만 자막이 나가는데 하루는 제 이름까지 나간 거예요. 기타는 누구 베이스는 누구 드럼은 누구, 이런 식으로. 이걸 보시고 "쟤 우리 아들 맞느냐" 이렇게 된 거죠.(웃음)

아버지가 화를 내시니까, 엄마가 "너 이제 아버지가 알게 됐으니 그만해라" 하시더군요. 대학 졸업하고는 몇 년을 놀다가 공부하겠다면서 대학원 행정학과로 들어갔어요. 아버지한테는 "이제 음악 안 할께요" 하고서는. 그래도 결국에는 음악을 놓을 수가 없더군요.

-영화 음악은 언제부터 하셨죠?

대학 때 이미 친구들과 돈을 모아서 영화를 만들곤 했어요. 6-7명이 모여서 한 일곱여덟 작품 했어요. 지금은 장비가 좋아졌지만, 그때는 소형 영화도 만들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어요. 그때 영화 음악 공부하려고 한 달에 비디오를 20-30편씩 보고 그랬어요.

그때 영화를 만들면서 안성기 형도 알게 됐죠. 그때 형도 무명이었어요. 한때 잘나가던 아역 출신이긴 하지만 미래는 불투명하고 고민이 많을 때였죠. 그 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국악 공부는 언제부터?

대학 때부터 손을 댔어요. 락음악을 하면서. 계기가 있는데, 영화하면서 음악을 만들던 초기에 '탈'이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이걸 프랑스 세계 청소년 영화제에 재미 삼아 보내봤는데 본선까지 진출한 거예요.

한국 젊은이의 한 단면을 그린 작품이었어요. 본선에 올라갔으니 좀 더 완성도를 높여서 다시 보내는 과정에서, 제 생각엔 우리 국악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가 1980년이에요.

-그러니까 영화를 하다가 국악을 시작하게 된 거군요.

네. 처음부터 국악이 아니라 영화를 하다가 그쪽으로 가게 된 거예요. 그때 영화에 쓸 음악을 만들기 위해 국악을 막 뒤졌어요. 중학교 음악 교과서를 봤더니 우리 음악이 별로 없어요.

그때 우리 소리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가 학교에서 음악을 배울 때는 왜 온통 서양 게 많았지? 그러면서 왜 우리 음악이 훌륭하다는 거지? 들어보면 재미도 없고 졸리는데, 싶었어요.

저만 해도 국악 음반을 올려놓고는 '띠링' 하는 연주 시작 부분 듣고 보면 얼마 안 가서 잠들어 있기 일쑤고 일어나보면 침 흘리고 자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왜 이게 훌륭하다는 거지? 나도 한국인이니까 그런 호기심이 생긴 거죠. 거기서 시작된 거예요.

우리 음악 책을 찾아보니 아는 게 정선 아리랑 말고는 몇 개 없어요. 그 중에 산조가 있어서 그걸 기타로 연주해서 넣어야겠다 싶었죠. 아무것도 모르고 수박 겉핡기를 한 거죠. 순전히 의욕으로만. 그렇게 만든 음악을 영화에 넣어서 보냈더니 무슨 입선인가를 했어요.

그 후로 국악을 열심히 들었죠. 듣는 건 그래도 쉬운데 공부로 하자고 들면 뭐든 어려워요.

-국악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땐 일반 음악 학원도 없는데 국악 학원이 있겠어요? 입시 이외에는 없으니까. 혼자서 계속 판을 사다가 반복해서 들었죠. 가야금 산조, 아쟁 산조...

-독학으로요?

혼자 들었죠. 판소리 춘향전 같은 것도 2-3년을 들었어요. 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 음악이 서양과는 호흡부터 달라요. 전혀 달라요. 다 달라요. 그래서 아, 이건 공부를 해야겠구나 싶더군요.

양악은 제가 완전히 독학했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 이건 아마 우리가 초중고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부터 서양 음악을 기본으로 배워서 그럴 거예요. 우리는 음악을 서양 악기인 피아노로 배우잖아요. 가야금이 아니라. 일찍부터 99.9%에 가깝게 서양식 음악으로 배우는 거죠.

국악을 한 3년 듣고 나니까, 어느 날 훌륭한 소리라는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그게 어떤 계기였죠?

거문고 레슨을 받던 중에 그랬어요. 그 무렵에 국악관현악단의 기본 악기들이랑 우리 장단을 배우겠다고 작심했거든요. 피리, 대금, 가야금, 아쟁, 사물... 그걸 다 배우려면 30-40년 걸리겠다 싶었어요. 하나하나 다 배워야 하니까.

-그걸 다 배울 생각을 하셨다고요?

네 그때부터. 그래서 오래 걸린 거예요. 하나씩 다 배워야 하니까. 그러던 식으로 거문고를 배우다가 어느 순간 너무 훌륭한 소리라는 걸 확 깨달았어요. 이런 훌륭한 소리가 왜 교과서에도 없고 우리는 생활화가 안 돼 있고 대중화가 안 됐지? 그때부터 막 묻기 시작했죠. 나라도 계속 공부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공부해서 음반을 내고 하다 보니,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 97 대전엑스포, 97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2002 월드컵 개막식과 조추첨 행사 음악, G20 정상회의까지 7개 국제 행사 음악을 제가 다 하게 됐죠.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애국심도 생기더군요. 제가 애시당초부터 애국심이 있었던 게 아녜요. 세계적인 행사를 할 때에는 우리가 주축이 돼서 좋은 느낌을 세계에 알리고 또 세계의 좋은 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화합이 되어 하나가 된다는 걸 고취시켜야 하니까, 그런 작업을 맡다 보니 우리를 알리고 싶어지더군요. 왜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우리 걸 잘 모르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실 한국이란 이름도 월드컵 때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지 그전에는 밖에서 잘 몰랐잖아요. 아무리 경제성장을 했다고 해도 외국이 아는 건 다른 문제거든요. 우리는 잘난 체 많이들 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은 그렇지 않아요.

해외 인사들 만나서 듣다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밖에서는 모르는데 우리 안에서 잘난 척하고 과장된 홍보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전문가끼리는 정확한 정보를 공유해야 하거든요. 그런데도 과장해서 이야기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걸 많이 봤어요.

진짜 세계적인 인물들과 일을 같이 하다 보면 굉장히 겸손해요. 이건 우리를 자학하려는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은 저도 희망적으로 보지만, 그때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니까.

우리는 분야별로 뛰어난 인재가 더 필요해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부터 내 분야에서 잘하자 싶었어요. 우리 소리가 훌륭한데도 왜 생활화 대중화가 안 됐을까, 그러면 이 부분을 내가 해야겠다 싶어서 시작한 거죠.

하지만 이쪽 일이 돈이 되지는 안잖아요. 공부도 하고 작곡도 하고 녹음도 해야 하는데. 음악은 녹음을 해봐야 잘못된 걸 알거든요. 그래서 대중가요 노래를 해서 번 돈을 다 이쪽으로 쏟아부은 거죠. 이걸 36년간 계속 해온 거예요.

-남이 몰라주는 일을 그렇게 오래 해오는 과정에서 힘들지 않으셨나요?

사실은 제가 어려울 때 어떤 재벌이 제 음악을 무지 좋아해서 다 사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30년 전 120억 원이었으니까 큰 돈이었죠. 5층짜리 빌딩이 10억 할 때였어요. 마음이 왕창 흔들렸어요. 한 4일 동안은 흥분했어요. 그 돈 있으면 이것저것 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하지만 닷새째 되던 날 깨달았어요. 아, 이게 내 길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그 큰 돈 받아서 남들 하듯이 빌딩 사면 그거 관리해야 하잖아요. 그러기 시작하면 음악보다 그런 일에 더 신경 쓰게 돼요.

결국 거절했어요. 그러고 난 다음에 영화 서편제가 크게 터졌어요. 그때 유혹을 거절해서 서편제 곡이 잘됐다고 봐요. 안 쫓아가길 잘했구나 싶었죠.

사람 사는 이치가 그런 것 같아요. 그때 내가 돈을 좇지 않고 나다운 길을 택하길 잘했구나 싶었어요. 그런데도 서편제로 번 돈으로 태백산맥 영화 음악에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썼는데 다 망했죠. 쫄딱. (웃음) 국악은 전기세도 인쇄비도 안 나오거든요.

-그런 역경을 헤치고 나올 때 심정은 어땠나요?

맘 속으로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이거예요. 꿈을 돈하고 바꿀 수는 없어요. 그러니 꿈을 향해 계속 가는 거죠. 그렇게 가다 보면 그래도 가끔은 보람된 일이 있어요. 서편제도 국악 공부 시작해서 13년 만에 터진 거거든요. 그런 보람으로 또 몇 년 가는 거죠.

-그 꿈이란 게 뭐지요?

제 꿈은 건강한 소리를 만드는 거예요. 히트곡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게 목표예요. 건강한 소리가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원하는 사람이에요. 물론 그런 소리가 히트까지 칠 수 있으면 더 좋겠죠.

장르로 나누자면 온 국민이 힘들 때 즐길 만한 소리는 대중가요, 움직임에 의한 소리는 무용 음악, 영상에 의한 소리는 영화 음악이나 드라마 음악, 또 어떤 공간에서의 빛과 소리의 조화는 행사 음악. 이게 다 합쳐져서 김수철의 소리학을 이루는 거지요.

그런 중에 국악은 왜 가요처럼 즐기지 못하나, 이런 숙제를 안고 실험을 하고 있고요. 우리 정신과 의식을 담아 현대화한 음악을 궁극적으로는 세계에도 알려야지, 여기까지가 제 목표예요.

그러기 위해 우리 소리를 현대화, 클래식화, 대중음악화, 그밖에 뉴에이지 같은 새로운 장르화하기 위해 36년 동안 작곡-연주-공부-작곡-연주-공부 이걸 반복해온 거지요.

-국악 음반은 실패도 많이 하셨죠?

실패는 당근이죠. 제가 낸 앨범이 37장인가, 40장 가까이 되는데 그 중에 가요 판은 12장이에요. 국악은 25장이 거의 다 망했는데 딱 하나 왕창 돈을 많이 번 것이 서편제예요.

국악이 안 팔릴 거라는 건 저도 알았어요. 제 음악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그런 음악이 없었거든요. 국악을 현대화한 장르로 개발한다든가 대중음악과의 협연 같은 걸 제가 처음 시도했어요. 그걸 음반으로 냈는데 다 망했지요.

그러면 망하는데도 왜 했느냐. 이걸 누군가는 들을 테고 후배나 여러분에게도 들을 기회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우리 소리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구나, 그 가능성을 알아볼 거란 생각에서 낸 거예요. 그 가능성 때문에.

당장에 돈을 벌려고 낸 게 아녜요. 국악 현대화한 음반 녹음은 비용도 가요보다 3-5배 더 들지만 안 팔려요.(웃음)

-지금은 웃을 수 있겠지만 아주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요즘은 음반을 개인이 낼 수 있지만 당시엔 문공법에 등록된 회사만 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레코드 회사 권한이 막강했어요. 아무나 못 들어가고 아무나 안 내줬어요. 저는 히트 가요가 많았으니까 계약을 하려고 했죠.

그때 저는 이야기했어요. "사장님, 다른 가수들 히트작 많으니까 돈은 그쪽으로 버시고, 저는 국악 현대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이게 언젠가는 (돈도) 됩니다. 세계로 나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제가 자신할 수 없어요. 그러니 그때까지 제 작업에 제동을 걸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조건을 내걸었어요. 그러고는 제작비는 제가 다 댔어요. 레코드 회사는 1원도 안 대줬어요. 국악 현대화 음반 25장 낼 때,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1원도 받은 적 없어요. 다 제가 노래해서 번 제 돈 갖고 했어요. 그렇게 국악 첫 집을 냈어요. 그게 '국악 김수철'이었어요.

음반을 낸 지 1주일밖에 안 돼서 제작부장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이거 575장밖에 안 나갔다. 나머지는 폐기처분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상처를 받았죠. 간섭 않기로 약속받고 내 돈 들여서 낸 첫 국악 음반인데, 그걸 부셔서 다른 음반 낸다는 이야기였으니까요.

결국 다 폐기처분당했어요. 그때 정말 큰 상처를 받았어요. 맘 속으로 엉엉 울었어요. 일주일 잠을 못 잤으니까요.

그래서 제 국악 1집 음반이 별로 없어요. 사람들한테 알려지지도 않았고. 반품 들어와서 폐기됐으니 그게 다 제 빚으로 남았어요. 그래도 버텼어요. 주경야독식으로 낮에 노래하고 밤에 공부하고 그랬어요. 연구할 건 연구도 하고.
국악 공부가 왜 어렵냐면, 사사를 받고 그걸 먼저 외우고, 외운 대로 해보고, 그 다음이 응용이에요. 나이가 들수록 이해는 깊어지지만 외우는 게 어렵잖아요. 그리고 우리 장단이 길어요. 서양음악처럼 서너 소절 일정하게 가는 게 아니라 호흡도 다양해지면서 길어지니까 진도도 잘 안 나가고 공부가 힘들어요.

그때 올림픽 음악을 맡았어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 음악적인 실험을 더 많이 했죠. 우리 소리와 현대음악, 대중음악의 접목을 많이 시도했어요. 돈도 많이 들었어요. 저는 마음에 들 때까지 녹음을 하는데 매번 제작 예산 한도를 넘겼어요. 올림픽 때만 해도 음악 제작비가 당시 6백만 원 초과했어요. 굉장히 큰 돈이예요. 그런 식으로 1억 가까이 빚이 쌓인 거예요.

레코드 회사 사장이 부르더니 "너는 노래만 부르면 돈을 버는데 왜 안 하고 이상한 짓만 하냐"고 했어요. 레코드 회사가 유통권을 쥐고 있으니 아무말도 못 했어요. 상처만 계속 받았죠.

그때가 저로서는 위기였어요. 저는 밤 업소 일을 하지 않았거든요. 낮에 음악 작업하고 밤에는 공부해야 하니까. 또 가끔 행사 음악 들어오면 그것도 하고. 대중가요도 후속 음반을 내긴 내야 했어요. 레코드사가 갑이니까.

이번엔 대중을 쫓아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내가 걸어왔던 길을 가야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원맨 밴드예요. 그런 건 혈기 왕성할 때 해야거든요.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최초였죠?

국내에서는 최초였어요. 전 세계에서도 두 번째인가 그래요. 원맨 밴드라고 하면 오해하는 분도 계시는데, 작사 작곡 편곡 연주까지 다 사람이 해야 하는 거예요. 기계 도움을 받는 것은 원맨 밴드가 아니에요. 드럼 연주하고 그거 듣고 베이스 치고, 드럼과 베이스 듣고 건반 치고 해서 믹싱까지 다 하는 거예요.

그때 돈도 없었어요. 밖에서는 히트곡이 막 터져서 부자인줄 알았겠지만, 저는 음악만 했으니까. 레코드 회사에 9천8백만 원인가 빚이 있고, 올림픽 음악으로 6백만 원 빚져서 갚아야 했고.

그래도 저는 음악에 관한 한 긍정적이에요. 돈 없으면 나 혼자 하면 되지 뭐 그런 생각으로 한 거예요.(웃음) 좌우간 대중성 상관 없이 내 느낌들 반영하는 곡들을 냈어요.

그때 MBC의 피디로 있던 친구 연락이 왔어요. 그때도 TV에선 저를 찾을 때였거든요. 84년부터 86년은 완전히 히트를 쳤으니까. 판을 낼 때마다 3-4곡씩 터졌거든요. 그 친구가 하는 생방송 프로에 나와달라고 했어요.

이번엔 히트곡도 없어서 안 한다고 빼다가, 원맨 밴드 앨범의 '언제나 타인' 이라는 조용한 노래나 하나 부를께 그랬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그거 말고 '정신 차려'라는 곡이 재미있다면서 하래요.
그 노래는 템포가 빠른 곡인데 내가 무대에서 춤을 못 추니까 안 된다고 했는데도 그걸 하래요. 방송 전날 작품 이야기하다가 흥이 맞아서 과음한 데다 당일 늦잠까지 자고 술도 덜 깬 상태에서 리허설에 갔어요.

'정신 차려'를 부르는데 가만히 서서 불렀더니 친구가 막 화를 내는 거예요. 신나는 노래를 그렇게 부르면 어쩌냐고 해요. 하는 수 없이 몸을 움직이긴 해야겠는데. 중학교 때 보건 체조 있잖아요. 발 올렸다가 허이 허이 하는 동작, 그걸 빠른 템포에 맞춰 했어요.

그러다 더 생각이 안 나면 그냥 죽 걸어갔어요. 무대 끝이 나오면 다시 뒤돌아서서 쭉 걸어 가고, 생각이 나면 그 다음 체조 동작 하고 그랬어요. 후렴구의 '정신 차례, 이 친구야' 대목에서는 트로트 노래에서 찔러대는 동작을 흉내내서 했어요. 그렇게 생방송이 지나갔는데, 이게 대박이 난 거예요.

전화기에 불이 났어요. 며칠 전에 MBC에서 한 것 그대로 해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건 즉흥적으로 한 거라서 다시는 못 합니다, 했더니 방송 녹화한 것 드릴테니 해달래요. 복사본 비디오 보면서 연습해서 그대로 했어요. 이게 대히트가 됐어요.
그러자 레코드회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봐라, 그렇게 하면 되지 않냐"고 해요. 결국 빚도 다 갚고 오히려 수익이 생겼어요. 그 돈 받아서 국악집을 또 냈어요. 그 무렵 현대무용 음악 작곡도 맡았는데, 우리 소리를 현대음악화하는 장르로 실험을 해본 거죠.

가요는 분량이 보통 삼사분인데 이건 클래식처럼 한 시간짜리였어요. 음반 제목이 '불림소리'라는 건데 너무 길면 감상하기 어려우니까 나눠서 가나다라마로 쪼개서 이름을 붙여서 냈어요.

그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음악상을 받았는데 객석이라는 잡지에 대중가수로 순수음악상 받은 건 처음이라면서 인터뷰가 나가기도 했어요. 보람이 있었죠.

불림소리가 나오자마자 그 다음에 제가 음악을 맡았던 영화 '서편제'가 터졌어요. 그 음반이 당시 가요도 다 누르고 1위를 했어요. 순식간에 70만 장이 나가고 나중에는 100만장이 훨씬 넘었죠.

-서편제 영화 음악은 어떻게 맡게 되셨죠?

영화 음악을 대중가요보다 먼저 했어요. 극장용을 83년부터 했으니까. 운 좋게 화제작을 많이 하다 보니 서편제도 자연스럽게 들어왔죠. 원래 '화엄경' 하고 '서편제' 하고 몇 개 들어왔던 것 중의 하나였어요. 임권택 감독님과 하고 싶었고, 이태원 사장님과도 연결이 돼서 너무 좋아했죠.

-'소릿길' 선율 생각하면 지금도 뭉클해요. 왜 그런지 설명하기도 힘든 심정이 되거든요.

그 곡 고생을 엄청나게 한 거예요. 서편제가 작곡하기가 굉장히 힘든 곡이에요. 극중에 계속 판소리가 나오잖아요. 악기 선정도 어려워요. 다른 소리와 부딪히지 않으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니까. 고민 끝에 5개월 만에 찾아낸 게 대금이었어요. 대금도 그냥 대금이 아닌 정악 대금. 악기를 정하고도 녹음 전날까지도 곡을 못 썼어요.
영화 '서편제' OST '소릿길'
출처 : cryingkid · 김수철 - 소리길

-그럴 수도 있나요?

그럴 수 있죠. 대금 악기 선정해 두고, 대금이랑 연주자랑 녹음실은 섭외를 해놓은 상태였어요. 대금 연주자가 온 후에야 그 자리에서 곡을 쓴 게 '천년학'이에요. 악보를 줬더니 "이 곡 좋네" 그렇게 해서 확 한 번에 갔어요. 임권택 감독님도 들어보시더니 "수정할 것도 없다"고 해서 한 번에 일사천리로 갔어요.

그전까지 5개월 저는 무진장 고생을 했죠. 그게 응축이 돼서 그 순간에 나온 거에요. 그러니 고진감래라는 말이 맞아요. 공짜는 없어요. 사람들이 결과만 보기 쉬운데, 과정을 보면 누구나 엄청나게 고생한다는 걸 알았으면 해요.

그렇게 국악 작품이 연달아 히트를 치니까 레코드사 회장님이 불러요. "김수철씨 말이 맞았네요. 이게 터지네요." 그제서야 인정을 해요. 저는 그 길로 회사를 나오고는 다시 안 들어갔어요. 그 뒤에 법도 바뀌어서 개인이 음반을 낼 수도 있고 해서 그다음부터는 전부 제가 냈어요. 국악 판을 스물 몇 장 냈어요.

-판매는 어땠나요?

그 다음에 영화 '태백산맥' '축제' 등등 많이 했지만 서편제 말고는 수익성으로는 별로 성공한 게 없어요.
영화 '태백산맥' OST '돌아 눕는 산'
출처 : maonsan · 돌아 눞는 산 --태백산맥 ost

-태백산맥으로는 상도 받으셨죠?

서편제로는 영화평론가상을 받았구요, 태백산맥으로는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인가를 받았어요. 음악적 완성도로 보자면 '불림소리' '팔만대장경' '태백산맥'이 아주 높아요. 음악적인 방향을 제시한 점도 있고.

-내신 음반 중에서 제일 아끼는 건 뭔가요?

특별히 어느 걸 아낀다기보다, 국악을 현대화한 것은 평생을 가는 작업이고, '못다 핀 꽃 한송이'나 '젊은 그대' 같은 가요는 그래도 여러분이 제가 공부하고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셈이니까 감사하게 생각하구요.

특히 '젊은 그대'의 경우에는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두고두고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점은 온 가족이 부르는 가요잖아요. 지금까지도 불러주시고. 또 만화영화 주제가 '치키치키 차카차카초'도 다들 알아주시고.

-'못다 핀 꽃 한 송이' 인기가 대단했던 걸로 아는데요 어떻게 쓰신 곡이에요?

솔로 1집에 실린 곡인데, 사실 그 음반을 끝으로 음악을 그만뒀어요. 아버님이 만류하셔서 대학원 들어가서 공부할 생각이었어요. 그때 알고 지내던 안성기 형 소개로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에 '병태'역으로 출연하게 돼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그게 히트를 쳐서 난리가 났죠. 그때 원작자였던 작가 최인호 형이 "사람들이 저렇게들 좋아하는데 왜 안 하냐, 노래해" 그러는 바람에 다시 무대에 섰죠.

-'고래사냥' 출연은 어떻게 하셨어요? 

영화 배역 중에 어리버리한 병태를 두고 누구를 쓸지 제작진이 고민하던 중에 안성기 형이 "꼭 병태 같은 애가 있다"고 해서 저를 소개한 거예요. 만나 뵈러 카페에 들어가는데 제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 뻔했어요. 그걸 보시더니 배 감독님이랑 최 작가님이랑 다들 적격이라면서 바로 캐스팅이 됐죠.
영화 '고래사냥'의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

-치키치키 차카차카초는 TV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가였죠. 그건 어떻게 만들게 되셨지요?

그때 어린이들이 성인 가요를 따라부르는 게 저는 싫었어요. 아이들이 사랑이 어떻고 이별의 아픔이 어쩌고 하는 정서에 안 맞는 노랫말 부르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보니 명색이 작곡가라면서 아이들 위해서 내가 한 게 없더군요.

그게 1990년인데 그때부터 어린이 드라마, 애니메이션 관련된 음악을 조건 없이 했어요. 날아라 수퍼보드는 만화가 허영만 형이랑 같이 했는데, 애들 정서에 맞는 노랫말에 소리는 최첨단으로 재미난 걸 해줘야겠다 생각해서 작업한 거예요. 어린이한테는 꿈과 희망을 주고, 어른한테도 동심의 세계로 가거나 어떤 메시지가 있는 걸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노랫말 쓰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만든 노래가 '못다 핀 꽃 한송이'만큼이나 대박을 쳤어요. 온 국민이 따라불렀으니까. 아주 기뻤죠. 허영만 형이랑은 더 늙기 전에 어린이 위한 것 한번 더 합시다 이야기해 놓은 상태예요.

-그 뒤로 대중적으로도 히트하는 가요를 쓰고 싶은 생각은 안 드셨나요?

대중이라는 건 아무도 몰라요. 운도 따라야 하고. 다 맞아떨어져야 하니까. 스필버그 같은 사람이 인디아나 존스 같은 작품 만든 것 보면 대중을 다 알고 만드는 것 같지만. 이게 히트 칠 거야라고 생각해서 작품을 쓰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어요.

'못다 핀 꽃 한송이' 같은 곡도 그런 것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니었어요. 그때의 느낌을 담아 지었는데 어떻게 잘 맞아떨어져서 대중이 좋아해줘서 그렇게 된 거죠. 우연히 된 거예요.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를 치는 일은 대단히 어려워요. 비슷한 연배들이 좋아할 테니까. 지금은 음반을 내도 홍보도 힘들고 음악 프로그램도 별로 없어서 더 어려워요. 후배들 봐도 곡 내고 3개월이면 끝이잖아요.

-지금도 음악 공부를 계속 하세요?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거예요. 공부는 학교 졸업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생각해보세요. 보통 직장인들이 아침 9시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잖아요. 음악하는 사람도 무대에 설 때 말고도 그 정도로 해야죠. 가수라면 발성 연습하고, 연주자는 연주 연습하고, 그걸 해야죠. 사오 년 히트 치고 나머지 사십 년 놀면 되는 게 아니예요.

운이 좋아 재주를 타고 나서 히트를 쳤다고 쳐요.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해요. 재주만 갉아먹고 버틸 수는 없어요. 자신이 좋은 상품이라는 사실을, 지금 얘기하는 상품이란 말은 나쁜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나라는 상품성을 다른 사람이 보고 판단하는 거니까 가치가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인기라는 것은 바람이에요. 잡으려고 하면 안돼요. 입산하면 하산해야 하듯이 인기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에요. 인기야 반짝하는 거고 진짜 자기 음악의 길을 가야죠. 그러려면 공부해야 해요. 학교 공부 말고, 내가 모르는 것, 뭔가 하고 싶은데 부족한 것, 내게서 고갈된 것 이런 걸 끊임없이 채워야 한단 얘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하세요?

그 이야긴 제대로 하자면 너무 길어요. 뭐가 부족한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아요. 하다가 모르는 장르가 있으면 장르 공부를 하고 더 캐들어가고, 깊이 알려면 책을 봐야 하고, 더 알려면 물어봐야죠.

그리고 주변 예술이 무지하게 중요해요. 아까도 인문학 얘기를 했지만 인문학은 지식을 알고 쌓는 게 아니라 어떤 깨달음의 동기 때문에 하는 거잖아요. 그렇듯이 음악을 둘러싼 그림, 음악을 둘러싼 미술, 음악을 둘러싼 사진 등등, 음악 주변의 예술이 참 많아요.

그런 게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한 거예요. 그게 다 산 교육이에요. 선배님들 보고 저 형이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배우는 거죠.

대중음악도 맨날 외국 장르만 듣고 들여오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우리 것은 없나 찾아보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그게 다 공부인 거예요. 락을 했으면 발라드도 해보고 재즈도 해보고. 쉴 때는 그림을 보기도 하고...

-책 이야기를 해볼까요? 책을 즐겨 읽는 편이세요?

일을 하면서 정독을 하기는 힘들어요. 가까이 두고는 보죠. 여러 권을 두고 그날그날 기분이나 느낌에 따라서....

-음악 일을 하시면서도 책 읽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세요?

당연하죠. 이건 모든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답은 책에 다 있어요. 우리가 디지털 시대로 가더라도 책은 끝까지 남을 거예요. 우리가 건져내야 될 부분이에요. 정보가 너무 홍수이다 보니까. 오히려 건성으로 확인만 하잖아요. 그러면 깨달음이 안 가요. 그러니까 오히려 요즘 일종의 책읽기 문화 운동 같은 게 필요해요.

-특별히 감명 깊게 있으신 책이 있으세요?

오래전부터 슈바이처 박사의 자서전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를 좋아해서 정독하는 책이고요. 특히 '슈바이처의 유산'을 보면 슈바이처 박사와 갑부 아들 레리머 멜런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 나오는데 꼭 한번 읽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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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으신 책으로는 어떤 게 있나요?

최근에 감동받은 걸로는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의 책이 있어요. 딱 두 권 있는데 강의를 책으로 정리한 거예요. '건축을 생각하다'와 '분위기'. 공간이 사람의 생명과도 연관돼 있고, 생각의 발상이나 동기에도 무지하게 중요하잖아요.

사람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한, 그런 정신을 기본으로 한 건축 설계를 이야기하는데. 작년부터 마음에 들어서 읽고 또 읽고 해요. 최근에 읽은 것 중에는 가장 감동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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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읽게 되셨죠?

건축가인 후배가 권했어요. 제가 건축을 재미있어 해요. 아까 얘기했듯이 음악하는 사람에게도 주변 예술이 중요하거든요.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보면서 들리는 게 있어요. 들으면서 보이는 게 있으면 그게 명작이고 명곡이에요. 내 생각엔 그래요.

그리고 법정 스님 책. 그분은 88년인가 89년 무렵에 제 기타 산조를 가지고 지방 연주를 다니다가 만났는데, 제 국악을 벌써 듣고 계시더라구요. 연주회에 찾아오셨어요. 그 뒤로 돌아가실 때까지 아주 가까이 지냈죠.

그분의 '무소유'를 대학교 2학년 때인가 읽고 완전 감동했거든요. 그 당시 제가 인도철학에 빠져 있을 때였어요. 나중에 법정 스님을 직접 보게 되니 너무 좋았죠. 최근에는 다시 '버리고 떠나기'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를 많이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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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기타만 친 게 아니라 인도 철학에도 빠지셨어요?

그때 인도 철학이 우리나라에선 드물 때인데,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먼저 나오고 몇 년 후에 라즈니쉬가 들어왔죠. 인도 철학은 매년 읽었어요.

-인도 철학은 종교적 이유 때문인가요?

삶의 태도, 생의 자세에 관한 거예요. 저는 종교가 없어요. 법정 스님과도 친했지만 하용조 목사님이나 김장환 목사님도 좋아했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서편제 때 뵙고 음악도 드리고 했죠.

법정 스님은 글과 말, 살아가는 모습이 똑같더라고요. 좀 까탈스러움이나 약간의 괴퍅스러움 이런 건 그럴 수 있어요. 왜냐 하면 존경하는 분들은 자기 자신한테 엄격해야 하니까. 그래야 그게 유지가 되니까요.

그분은 자기 자신한테 아주 엄격했어요. 계속 느꼈어요. 쿨하고. 법정 스님이 생전에 "내 글은 다 허락할 테니 맘대로 곡을 붙여도 돼" 그러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붙인 곡이 있으세요?

안 붙였어요. 너무 맑은 글이어서...

-영감을 받아서 곡을 쓰실 수도...

영감이라는 건 삶에서 문득 오는 거지, 기술적으로 떠올리고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천재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음악이란 게 막 놀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오르고 하는 게 아니에요.

세계적으로 존경하는 분들을 보면 엄청나게 노력을 하셨다고요. 다. 엄청나게. 우리가 7시간 자면 그분들은 서너 시간밖에 안 잘 정도예요. 그렇게 뒤에서 노력한 땀은 얘기 안하고 결과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영감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 저는 좋아하지 않아요.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게 있으세요?

제가 내년으로 방송 시작한 지 40주년이에요. 그동안 작곡만 했잖아요. 종합적인 공연을 기획해보려고 해요. 그동안 쌓아온 작품을 국민에게 알려주고 즐거움과 앞으로 꿈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메시지도 주면서 앞으로 나가자는 꿈을 주는.

그동안 내가 36년의 많은 시간을 국악 현대화에 몰두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음악밖에 없으니까 보답하려는 거예요. 그동안 작곡만 했는데 공연을 안 했잖아요. 이제는 좀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아요. 진정한 희망과 동기는 문화만이 줄 수 있어요.

지금을 위해 36년을 준비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레퍼토리가 충분치 않으면 해외로도 못 나가요. 나이 50까지 작곡 열심히 해야지 했는데, 그보다 훨씬 넘어서까지 했어요. 그동안 한 것은 인생 1막이고 이제 인생 2막이에요.

2막은 젊은이들에게 긍지와 꿈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싶어요. 국민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그리고 나서 그걸 더 연습해서 세계로 나가서 우리도 이런 게 있다는 걸 알리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요즘 젊은 친구들한테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힘들다는 것 잘 알아요. 나도 25장 중에 24장이 망했어요. 그럴 때일수록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하세요. 그 대신 고생은 감내할 각오를 해야 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거라면 사랑하는 거라면 기꺼이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노력하는 사람한테 기회가 와요. 내가 살아보니까 맞는 말이에요.

어정쩡하게 여기저기 기웃대고 양다리 걸치는 식은 하지 마세요. 왜 10년, 20년 투자를 못 하세요. 10년쯤 되면 자기가 어디에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절대 에너지를 허비하지 마세요.

-다음 순서로 어느 분을 추천하고 싶으세요?

도정일 선생님이랑 배우 윤여정 누님이요. 도정일 선생님은 제가 30년 가까이 뵈온 분입니다. 책 읽는 사회 운동을 일찍 실천하고 계세요. 이분의 생각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요.

윤여정 님은 자주 뵙는 선배신데 바쁜 연기자 생활 중에도 곁에 책이 있는 걸 봤어요. 대화가 잘 통하는 그분의 생각을 이번 기회에 들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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