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좋은 독자 유무가 나라 수준 가른다"

조회수 2016. 8. 26. 12: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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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 상임대표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남다르게 사는 사람 곁에는 책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해서 살아보겠다는 뜻의 다른 말입니다.

그 사람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의 독서 근황을 알아보는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코너가 예측 불허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일기 릴레이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영역에서 뜻밖의 독서 취향을 발견하고 의외의 책과 조우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소설가 김연수->'영혼의 슬픔' 저자 이종영->출판기획자 조원식->만화가 박흥용->임지훈 카카오 대표->이준익 감독->박정민 배우->임정욱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김봉진 '배달의 민족' 대표->에피톤 프로젝트의 차세정->김주환 연세대 교수->뮤지션 한희정->김대현 작가->서동원 바른세상병원 원장->이재민 그래픽 디자이너->재즈 보컬리스트 허소영->영화배우 안성기->북바이북의 김진양 대표->가수 김수철->임경선 작가 편까지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가수 김수철 씨가 추천한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입니다.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 상임대표이기도 합니다.

도정일 선생님은 제가 30년 가까이 뵈온 분입니다. 책 읽는 사회 운동을 일찍 실천하고 계세요. 이분의 생각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요.

가수 김수철 편 바로가기


도정일 교수와는 이메일로 문답을 주고받았습니다. 일찌기 2000년대 초반부터, 우리에게는 '느낌표'라는 책 프로그램과 '기적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책 읽기 관련 사업을 주도했고,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대화를 실천해온 분이어서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물어봤습니다.

-일찌기 2001년부터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을 발족해서 주도해 오셨습니다. 그때는 어떤 계기에서 시작하게 되셨나요?

1990년대 말 2천년대 초는 인문학 위기론이 대학가에 퍼지고 있었던 시점입니다. 전국 대학의 인문학 교수 백 여명이 서울에 모여 대학에서의 인문학의 위기라는 문제로 시위를 벌인 것도 이 무렵입니다. 인문학 교수들이 집단행동을 벌인 최초의 경우가 아니었나 싶어요. 나는 대학에서의 인문학 위축도 문제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인문적 기본 가치들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지요.

1997년은 세계 외환위기가 발생한 시점인데, 그 위기를 전후해서 한국인의 심리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생존에 대한 순수한 공포,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명령, 부자 선망, 이런 것이 한국인을 사로잡기 시작했어요. 정신 상태의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하고 가치관의 변화는 사회 변화의 전조가 됩니다. 적자생존론을 절대화하는 것이 소셜 다위니즘인데, 한국인은 알게 모르게 사회 다위니즘적 정신 상태의 포로가 되기 시작한 거지요. 1990년대 말 이후 이런 심리상태가 한국인의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출처: ⓒ이상엽
2000년 초 인문학 교수 몇몇이 모여 인문적 가치의 쇠락에서 오는 ‘몰가치 사회’의 문제를 토론했지요. 인문학자들이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의논했어요. 인문학적 가치의 사회적 실천 방안을 궁리한 거지요. 인문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치 캠페인이 아닙니다. 문화 운동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몰가치 사회의 가치전도가 초래하는 것은 ‘인간의 희생’이라는 위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얘기가 사뭇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세월호 참사를 보세요. 세월호 사건은 가치 전도가 몰고 올 수 있는 사회적 고통과 인간 희생을 단적으로 보여주지요. 그런데 1990년대에 우리 사회는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참사 등등 인간 희생의 사건 사고들을 여러 번 경험합니다. 인간의 품위가 존중받는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은 인문적 가치가 지향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줄 아는 사회, 성찰하는 사회, 느낄 줄 아는 공감의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어요. 그래서 ‘독서’가 그 운동의 핵심부에 자리잡게 된 겁니다. ‘책읽는사회만들기’란 인간의 사회, 성숙한 사회, 민주사회 만들기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홈페이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은 지금까지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고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평을 하신다면?

북스타트 운동, 청소년 인문학읽기대회, 시민독서강좌, 교사독서연수 등은 ‘책읽는사회’가 지금도 공들여 진행하고 있는 독서 운동입니다. 거기 덧붙이고 싶은 것은 ‘도서관 운동’입니다. 독서 운동은 “책을 읽읍시다”라는 구호만으로는 되지 않아요. 돈 없는 사람도 책을 볼 수 있고 어른 아이 등 시민 누구나가 책 읽을 기회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사회 인프라를 갖추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인프라가 도서관이죠.

2천년대 초의 한국은 도서관 빈곤국이었어요. 도서관도 턱없이 적었지만, 애써 찾아가봤자 원하는 책을 볼 수도 없었어요. 신간을 빠르게 구비하기에는 예산이 너무 열악했거든요. ‘책읽는사회’ 운동은 그래서 정부에 대고 전국의 공공도서관 수를 늘리고 도서관들이 도서 콘텐츠를 충분히 구입할 수 있게 예산을 대폭 증액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책읽는사회’가 출범하던 2001년 당시 전국의 공공 도서관은 약 470개소였는데, 그 도서관들에 우리 중앙 정부가 배정한 콘텐트 예산 총액은 미국 하버드대학 한 곳의 도서 예산만도 못했어요. 도서관은 지역 공동체의 문화적 구심점, 지식 정보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주민의 대학입니다. 도서관은 사회안전망이고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 인프라입니다. ‘책읽는사회’가 도서관의 이런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조금은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어린이 도서관 건립 부분에서는 공이 좀 있다고 자평하고 싶어요.

‘책읽는사회’가 펼친 도서관 운동은 사회문화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시민운동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벌인 도서관 운동은 ‘기적의 도서관’ 건립 사업, 농산어촌 초등학교와 소외 지역 학교들에 도서관 만들어주기 운동, 작은도서관 지원 사업 등입니다. 특히 기적의 도서관 건립 사업은 우리가 2003년 문화방송(mbc) ‘느낌표’ 프로그램(“책, 책, 책을 읽읍시다”)과 함께 시작한 민간주도의 어린이 도서관 건립 운동입니다.
2천년대 초 어린이 전용 도서관은 서울에 딱 한 곳뿐이었습니다. 2003년 이후 지금까지 12개의 기적의 도서관이 전국에 들어섰고 13호관이 지금 부산 강서구에서 착공 준비 중입니다. 기적의 도서관 사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시민단체가 나서서 사회의 기부자원을 조직하고 지방자치단체들과 합작으로 어린이 도서관 건립을 주도한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입니다.

어린이 도서관이 왜 중요하냐? 나라의 미래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아이들은 기울어진 운동장 아닌 평평한 운동장에서 평등한 출발선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차등이나 차별도 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보고 싶은 책 보면서 자라야 해요. 자유는 성장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자유의 경험을 통해서만 성장은 ‘즐거운 사건’이 됩니다.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데가 어린이 도서관이죠. 그래서 어린이 도서관이 중요해요. 즐거운 성장의 경험을 가진 아이들이 자라서 그들 자신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설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지요.

-국민 1인당 평균 독서량은 해마다 줄고 있습니다. 디지털화를 비롯한 생활 환경 변화와도 관련이 있을 텐데요,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디지털 책도 책이기 때문에 종이책 구매량으로만 독서량을 재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나 일단 종이책을 중심에 두고 말하면 디지털 기기의 보편화가 진행되면서 종이책 독서량이 줄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종이책 독서량은 해마다 줄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어요. 종이책은 디지털 매체에 비하면 편이성, 속도, 정보접근성, 이동성 등등의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아요. 젊은 세대가 종이책을 답답한 구닥다리 매체로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디지털이 종이책을 완전히 밀어낼까요? 아닙니다. 나는 종이책의 미래가 반드시 비관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독서량에도 ‘바닥’ 같은 것이 있어 보입니다. 그 바닥을 치고 나면 일정 수준의 종이책 독서 행위는 꾸준히 안정적으로 유지될 거라고 봅니다.

독서에서는 양의 문제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읽고 어떤 효과를 거두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지요. 디지털은 사람들의 읽기의 방식, 독서 양태, 독서 효과 등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독서에 관한 한 그 영향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라는 게 거의 모든 조사에서 나오는 공통적 발견입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주목 시간’(attention span)의 단축 현상과 집중력 약화라는 문제입니다. 읽는 데 10분 이상 걸리는 글꼭지, 좀 어려운 텍스트 같은 것은 기피 대상이죠. 영화를 제외하면 동영상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독서 행위가 소중한 가장 큰 이유는 사고력, 기억력, 상상력, 판단력 같은 인간 정신의 핵심적 능력들을 단련시키는 데 독서 이상의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능력들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성숙한 사회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도 유지하기 어렵지요. 생각하고 판단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은 그래서 시민의 책임이자 의무 같은 거죠.

그런데 종이책 독서와 디지털 독서 중 어느 쪽이 이해력, 기억력, 상상력을 키우는 데 더 효과적인가? 외국에는 이미 다수의 연구들이 나와 있어요. 종이책으로 읽은 사람과 디지털로 읽은 사람이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는 정도에는 30%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어느 매체로 읽느냐에 따라 정보 보존률과 손실률에 30%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또 특정의 텍스트를 읽고 난 다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읽은 것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해내는가라는 문제, 이른바 ‘리콜(recall)’ 능력에서도 종이책 독자와 디지털 독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종이책으로 읽은 사람의 기억재생력이 더 높은 거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력(empathy)' 측정에서도 디지털보다는 종이책 독자에게서 더 높은 공감 능력이 발휘된다는 조사 결과들이 나와 있습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입니다.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의 지배력은 앞으로 더 커질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어요. 인간은 기술 그 자체를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기술이 인간을 위해 쓰이고 인간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이 정상 질서입니다. 독서의 경우에도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독서력 향상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기술 발전에 정신없이 밀려갈 것이 아니라 어떤 기술을 어떻게 쓸까, 어디에 어떤 기술이 가장 유용한가를 우리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이 필요하죠.

디지털 기술과 독서의 문제에 있어서도 속도, 편이성 같은 디지털 기술의 장점들이 독서 능력을 오히려 쪼그라들게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잘 읽는 능력은 그 능력 자체로 고도 기술입니다. 그 능력은 디지털 기술과는 다른 거죠. 니콜라스 카의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 시대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이상엽

-독서의 양과는 별도로 생산소비되는 책의 질적인 측면에서 출판이나 독서 현황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독서에서는 질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문학의 경우, 읽기 쉬운 책만 선택하는 독자가 대다수일 때 그 나라의 문학은 숨통 막힙니다. 읽기 어려운 소설, 난삽한 시와 희곡, 도전적 비평도 생산되고 유통되어야 사회의 문학 창조력이 성장합니다. 이 성장을 사실상 좌우하는 것이 독자의 수용력입니다. 생산력과 수용력의 발전에는 상당한 함수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독자들의 존재 여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독자들이 있는 나라인가가 문학 생산 수준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상당히 수준 높은 독자들을 가진 나라입니다. 창작자들과 출판 편집자들은 그런 독자 인구를 소중히 키워나가야 합니다.

독서는 안락의 행위 장르일 때도 있고, 도전적 행위 장르일 때도 있습니다. 읽기 쉬운 책만 고르는 독서 행위는 안락한 상태에 머물고자하는 본능의 자연스런 명령을 따릅니다. 수동적으로 흡수하기만 하는 독서 방식도 안락의 행위 장르에 속합니다. 이런 종류의 독서 행위를 나는 ‘물의 독서법’이라 부릅니다. 물 흐르듯 편하게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독서법이죠. 물의 원칙은 위대하지만 독서에서는 그게 반드시 왕도가 아닌 것 같아요.

반대의 독서법도 있습니다. 책을 고를 때도 그렇고 읽을 때도 그렇고 통상의 궤도를 편안히 돌기보다는 거슬러 오르고 튀어오르고 벗어나는 독서 방식이죠. 이 종류의 독서법에서 독서라는 것은 쌍방향 도전입니다. 책이 내게 도전하고 내가 책에 도전하는 거죠. 어려운 책을 기피하지 않기(“쉬운 책을 왜 읽나?”), 책을 향해 질문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기(“저자여, 나는 당신의 의견과 주장을 존중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이런 독서 태도가 도전으로서의 독서법입니다.

독서는 창조 행위에 속합니다. 위에 말한 독서법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창조적’인가는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내 생각에 좋은 독서법은 두 방식을 결합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경험을 말씀드리면 독서에는 열중과 몰두의 경험도 필요하고 거리두기와 비판적 대화의 경험도 필요합니다.

책에 푹 빠져보는 경험은 소중합니다. 푹 빠지지 않으면 책에서 감동과 즐거움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감동, 동화, 흡수가 반드시 성찰적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동화의 단계를 거친 후의 거리두기가 책(저자, 작가)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는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정신을 불안한 상승의 높이 앞에 서게 하는 일, 정신이 정신에 도전하게 하는 일입니다. 독서가 창조적 대화라는 주장은 그런 의미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출처: ⓒ이상엽

-출판물에서 해외 번역서의 비중이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편입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지요?

번역서가 아니라면 우리 출판은 큰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을까요? 독서계도 엄청 내용 빈곤을 겪게 될 거고요. 아직 우리 사회의 지적 생산력은 번역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각 분야에서 고르게 발전해 있지 않습니다. 번역물이 많으냐 적으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책’과 ‘좋은 번역’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서툰 번역서가 걸러지지 않고 쏟아져 나올 때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출판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의 번역 수준은 상당히 높아졌어요. 번역을 꼼꼼히 점검하고 성실한 정제 과정을 거치는 출판사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번역은 느린 숙고의 과정입니다. 단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몇 시간 고민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요. 좋은 번역에 사회적 보상이 따라오는 어떤 시스템 같은 것이 있었으면 싶어요. 독자가 할 일도 있습니다. 좋은 번역서 역자를 한껏 칭찬해주고 감사를 표시하는 일 같은 거 말입니다.

-출판의 주요 잠재적 생산자인 대학 교수들이 학교 업무나 평가 기준 때문에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를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요즘 교수들은 논문 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논문 생산량이 대학 평가와 교수 업적 평가의 주요 지표라서 교수들은 아마 죽을 맛일 겁니다. “내가 논문 기계냐?”라는 비명도 터져 나와요. 대학에 따라 다르지만 1년에 일정 편수의 논문을 써내야 합니다. 분야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인문학 분야에서는 1년에 논문 한 편도 써내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두 편이나 그 이상 써내야 한다면 교수는 기진맥진입니다. 교양서 계열의 책은 쓸 틈이 없어요.

연구와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논문의 양적 생산만이 아닙니다. 논문 편수 위주의 정량적 평가 방식은 이공계 쪽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인문계에서는 좋은 방식이 아니에요. 대학들은 학문별 고유성을 살리는 자율적이고 자체적인 평가 방식을 만들어 실시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의 평가 방식은 교육부의 것이건 신문사 등 민간 기관의 것이건 학문 발전이나 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에 그리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지식문화의 생산과 확산 기지로서 대학과 교수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진단하시는지요?

지식문화와 관련해서 대학은 3가지 핵심 요소들을 키우고 생산합니다. 지식문화 콘텐츠를 생산하고 콘텐츠 생산을 지속적으로 담당할 사람들을 키우고 지식문화를 왕성하게 유지해 나갈 사회 인구층을 키웁니다.

이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들이 교양 교육(liberal education)을 빛나게 실시하는 일입니다. 교양 교육은 백화점 문화센터 강좌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양념이 아니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닌, 대학의 ‘필수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양 교육의 목표는 자유로운 탐구 행위와 거리낌 없는 질문 던지기, 전공에 국한되지 않는 폭넓은 지적 관심과 호기심의 가동, 편견을 넘어서고 정의와 연대하는 공정하고 열린 정신 키우기, 자연과 문명과 사회와 역사와 대한 이해, 인간성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정신자세 키우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함양—이런 겁니다.

이 리스트를 점검해보세요. 이건 민주 사회의 시민에게 필요한 정신과 마음의 기본 자질들을 망라합니다. 정치 독재나 전체주의, 시장의 타락 같은 것에 맞설 정신근력을 키우는 것도 교양교육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학 교양 교육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일이 점점 코너에 몰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교육의 시장화와 ‘돈’의 유일가치화입니다. 가시적 성과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교양 교육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돈 안 된다는 이유로 교양 교육은 경시되고 전공 제일주의와 프로젝트에 매몰된 교수들은 지금 세상에 무슨 교양 교육이냐 전공이나 열심히 하지, 라고 말합니다.

대학 교육의 진정한 핵심이 교양 교육에 있다는 인식이 대학 안에서도 너무 빈약합니다. 교양 교육은 전공 교육에 반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교양 교육의 튼튼한 바탕 없이는 전공 교육 자체가 빛을 발하기 어렵습니다.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전공 제일주의 교육은 영혼 없는 ‘사회적 괴물’들을 곧잘 길러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걸 잘 보여주고 있지요. 2008년 월가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고액 연봉을 받는 금융회사 엘리트 사원들은 “우리가 영혼을 팔았나?”라고 자문했어요. 영혼을 팔았지요.

사회를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지식문화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우리 대학들이 지식문화 사회를 만들어갈 주요 요소들을 잘 키워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교양 교육의 바탕 위에 자기 삶의 가치를 세울 줄 아는 인구층을 두텁게 키우는 일—그 일의 중요성을 대학은 대학대로, 교수 개개인은 또 그들대로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거기서 극히 중요한 요소가 무언지 아십니까? 독서입니다. 대학은 무엇보다도 ‘책읽는 사람들’을 길러야 합니다. 책이 아니라면 생각의 단초를 열기가 어렵습니다.

-요즘 인문학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관심이 높습니다. 강연이나 공부, 읽기 모임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지금 인문학의 열기나 현주소에 대해서는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내 생각에 인문학은 질문하는 공부법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수련법’이지요. 내가 인문학적 기본 질문이라 생각하는 것이 몇 개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선 인간에 관한 질문들입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내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이 그겁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인문학과 삶의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각각 다른 관심, 목표,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도 목표일 수 있고 이 경우 핵심 질문은 “어떻게 해야 나는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것이겠죠.

그런데 관심과 목표가 무엇이건 간에 인문학적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위에 말한 기본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그것들과의 연결 속에서 질문하는 행위라고 나는 생각해요. 행복이라는 화두를 던질 때도 위의 세 가지 질문들과 그 화두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냉장고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요. 냉장고에서 먹을 것 꺼내는 식으로 인문학으로부터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꺼낼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에, 인문학은 내가 평소 기피해온 질문들, 내가 두려워하는 질문들과 만나고 마주서게 합니다.

그래서 인문학적 공부는 세상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정신 자세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사회, 역사, 문명, 자연 같은 것들입니다. 사회에 대한 기본 질문은 예를 들면 “어떤 사회가 사람이 살만한 사회인가?”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같은 겁니다. 인문학을 잠시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 경우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할 겁니다.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기본 질문을 만들어 던질 수 있고 문명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6월에 발표한 ‘환경 회칙’에서 “이 지구에 인간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건 인간과 그 문명의 미래에 대한 교황의 인문학, 또는 교황의 인문학적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인간 문명이 지금의 방식으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인간종은 절멸을 피할 수 있을까 같은 난처한 질문들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출처: ⓒ이상엽

-인문학자이시면서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으시고 상호 대화를 강조해왔습니다. 왜 중요합니까? 그동안 사정은 나아진 것 같습니까?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지식이 과학적 지식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현대 생물학은 생명체에 대한 전례 없는 과학적 지식의 토대를 닦아주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의 생명체의 기원과 탄생, 진화, 여러 호모(Homo)들의 등장과 소멸, 인체의 유전체계와 생리학적 구조 등에 대한 지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온 것이 생물학과 그 인접 분야들입니다.

물고기가 인간의 조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지식’으로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최근 청와대 샥스핀 식탁이 구설수에 올랐지만 인간의 손과 팔다리, 어깨, 눈과 입도 물고기의 선물입니다. 생물학적 인간관에서 인간은 동물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말할 때 그 이해에는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관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의미의 차원과 가치의 차원이 그겁니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아는 데는 생물학이 제공하는 과학지식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온 ‘문화’의 일부입니다. 문화는 의미와 상징과 해석의 세계지요. 이 차원에서는 과학 지식과는 구별되는 다른 지식 체계가 가동되고 있습니다. 이 다른 지식, 의미, 해석의 생산 체계에 관여하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인문학과 과학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지만 두 세계의 지식 생산 방식은 다르고 상호 환원되지 않습니다. 양자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문학/과학의 상호이해가 중요하고, 서로 다른 지식 체계를 구성하면서 함께 인간 문명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대화가 중요합니다.

예를 하나 들지요. 인간은 우주 안에서 티끌에 견주기도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존재입니다. 과학의 관점에서 그 존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의 존재를 정당하게 할 이유나 근거가 있을까요? 그 존재의 우주적 목적이 있을까요? 이런 질문에는 과학의 응답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질문 자체가 과학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관계의 세계, 교환의 세계, 나와 네가 만드는 ‘사람’의 세계에서는 의미, 가치, 목적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연 우주는 인간에게 냉랭해요. 지구는 그런 자연 우주에 속하지만 인간은 냉랭한 우주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인간이 하는 일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따뜻한 세계가 필요합니다. 그 세계를 나는 자연 우주와 구별되는 ‘상징 우주’라고 부릅니다.

인문학과 과학의 대화라는 문제는 말하자면 자연우주와 상징우주 사이의 상호이해와 대화입니다. 최재천 교수와 내가 <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를 낸 것이 11년 전입니다. 그 동안 두 학문 세계 사이에 대화가 많아지고 이해가 깊어졌는가? 서로 관심은 좀 높아진 것 같지만 글쎄요,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과학의 발달로 인간성의 신비는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개조를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유례없는 문명의 기로에 직면한 것일까요?

최근 뉴욕타임스 신문에 따르면 미국의 퓨(Pew) 연구소가 시민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가 하나 있어요. 과학을 이용해서 인간 능력을 ‘증강’하는 것에 대한 반응조사였어요. 퓨 연구소는 세 가지 증강 기술을 제시했습니다. 아기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할 목적의 ‘유전자 편집’(gene editing) 기술, 뇌에 칩을 심어 사고력 등 두뇌 기능을 높이는 기술, 인체의 속력, 근력, 지구력을 강화하기 위해 인공 합성혈액을 주입하는 기술 등입니다.

미국인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부정적’인 것이었어요. 응답자의 2/3는 인간의 능력 증강이나 개량 기술을 자기네는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는군요. 아기들을 질병에서 보호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대중의 반응은 부정적인 것으로 나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독교도,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왔다는 겁니다. 복음주의 신도들은 63퍼센트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자연에 대한 간섭이라 보는 반면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은 그게 지금까지 인간이 사용해온 인간 개량방식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반응(각 81%. 80%)이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에 의한 능력 증강이나 인간의 ‘품종 개량’의 전망에 대해서는 위에 예시된 것들 말고도 공상과학소설 못지 않은 휘황찬란한 가능성들이 얘기되고 있습니다. 헉슬리 소설 제목대로 ‘놀라운 신세계’의 그림입니다. 우생학적 개량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유전자’ 조작 기술을 통한 개량은 특별히 현대적인 기술입니다. 유전자변형 농산물(GMO)이 대표적인 경우죠.

우생학을 인간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생각하면 인류 사회가 신기술에 의한 ‘인간 개조’를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해보입니다. 운동 선수들이 약물에 의한 능력 증강을 시도하면 즉시 비판받고 퇴출됩니다. 노력과 훈련에 의한 개선이 더 본질적인 가치라는 생각을 사람들은 갖고 있어요. 인공보다는 자연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것도 인간의 보편적 선호 같아 보입니다.

유전자 변형농산물(GMO)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과 반감은 아직도 매우 강합니다. 과학적으로는 아무리 무해한 것이라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아요. 이건 한국이건 미국이건 프랑스건 마찬가집니다. 특히 미국은 과학 선진국이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아주 깊습니다.

그런데 미래 세계가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 개조를 마냥 거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유전자 조작 기술의 상업화를 스스로 저지하거나 억제할 수 있을까요? 돈벼락이 쏟아질 텐데? 인간은 욕심이 많습니다. 당신 아이를 천재 만들어주겠다, 초능력자 만들어주겠다 할 때 부모들이 그 유혹을 거부하기 매우 어려운 시대가 오지 않겠어요?

유전자 기술에 의한 불평등 사회의 도래 가능성은 단순 가능성 이상의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국가 간의 경쟁, 개인과 집단의 욕심, 정치 지배세력들 사이의 욕심 경쟁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미래 세계는 이런 욕심 추구 세력과 그것을 제어하려는 세력 사이의 경주장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만약 기술에 의한 전면적 인간 개조의 시대가 열린다면 나는 그것이 현존 인류의, 우리가 아는 ‘인간’의, 종말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명은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인문학적 질문--“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더 없이 절박하고 절실해지는 시대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그렇구요. 인간은 유전자 이상의 것입니다.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 책으로 추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제이콥 브로노우스키(Jacob Bronowski, 1908-1974)의 책 두어 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브로노우스키는 수학자이자 생물학자였고 블레이크 시 연구자였지요. 1970년대에 비비씨 방송에서 <인간의 상승>(The Ascent of Man)라는 문명 다큐를 만들어 방영한 사람입니다. 그 다큐가 책으로도 나와 있는데 <인간 등정의 발자취>라는 제목으로 2009년 우리말로도 소개되었습니다.
브로노우스키는 인간 문명이 ‘과학에 의한 문명’이라 주장했어요. 그에게 인간은 무엇보다도 과학 하는 동물이었어요.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브로노우스키의 이런 인간관을 잘 계승한 사람입니다.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그보다 훨씬 전에 나온 브로노우스키의 책(<인간 등정의 발자취>)은 요즘 용어로 표현하면 과학과 인문학적 통찰의 ‘융합’을 일찍 시도한 책들이라 할 수 있어요.

브로노우스키의 책은 인문학을 직접 다룬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명사를 읽다보면 그가 과학 지식과 인문학적 통찰을 어떻게 교직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진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지만 문화적 진보라는 말은 사용 가능합니다. 만약 인간 문명이 문화적 진보를 보여준다면 그 진보는 과학과 인문학의 합작품일 겁니다.

또 다른 책은 역시 브로노우스키의 <과학과 인간 가치>(Science and Human Values)입니다. 과학을 한다는 것의 특징은 무엇이고 무엇이 과학 정신인가, 과학은 왜 과학인가 같은 근본적 질문들, 과학과 가치의 문제(“과학은 중립인가? 아니다”), 인간에게서 소중한 가치들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이 다루어지고 있어요.
특히 그는 시의 은유적 상상력이 어떻게 과학적 상상력으로 연결되는지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이 책은 이화여대에서 번역한 적이 있는데 지금 잘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구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브로노우스키의 또 다른 책 <과학과 인간의 미래>(A Sense of the Future)를 추천하고 싶어요.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들이 펴낸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2016년 5월 17일 전철 강남역 근처 화장실에서 살해된 한 젊은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갖다 붙인 포스트잇 메시지들을 채록한 책입니다.
단일 저자나 소수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1004개의 포스트잇 게시물들이 집단 저자처럼 등장하는 책이죠. 추모, 연민, 분노가 그 많은 쪽지들의 주 내용입니다. 그 메시지들은 압도적으로 강남역 여성 살해가 묻지마 살인이나 조현병에 의한 살인이라는 경찰 발표와는 다르게 ‘여성 혐오’ 살인이라는 관점을 압도적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여성 멸시와 혐오에 대한 분노가 이처럼 한꺼번에 집단적으로 표출된 것은 우리 사회가 충분히 주목해야 할 일입니다. 일단의 젊은 여성들이 검은 상복차림으로 거울 영정을 들고 추모의 벽 앞을 행진한 것도 특기할 만한 사회사적 사건이죠. 여성 멸시와 혐오의 문제를 더 이상 덮어두거나 수면 밑으로 잠기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에 채록된 포스트잇들과 여성 행진이 표현하고 있는 결의입니다.

또 포스트잇의 상당수가 “이제는 모른 척하지 않겠다” “사회 현실을 바꾸는 데 나서겠다”는 결의도 말하고 있습니다. 포스트잇 한 장 한 장이 짧지만 치열한 사회 진단, 고발, 자기반성의 내용들을 담고 있어요.

-늘 가까이 두고 읽는 책이 있습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만 소개하면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정치/사회 기타 집단들 사이의 품위 없는 욕설과 비방과 모욕주기, 언어의 말할 수 없는 타락, 중상모략, 덫 놓기 등등의 행동 방식들이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어요.
사회집단들은 서로 싸우고 쟁투를 벌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집단들 사이의 쟁투에도 도덕적 원칙이나 품위의 하한선이 불가능한가? 인간 개개인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집단’의 경우에는 어째서 그 가능성이 사라지는가? 1932년에 이런 질문을 추적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책은 20세기 명저의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명저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사회를 비추는 관찰과 통찰을 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 순서로는 누구를 추천하고 싶으세요?

화가 임옥상 씨와 방송인 유정아 씨입니다. 임 화백은 오랫 동안 민중 미술과 문화 운동에 매진해온 분이고 유정아 씨는 책을 좋아하는 독서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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