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어, 소설에는 저런 장면 없었는데..

조회수 2017. 2. 10. 07: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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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박산호의 '책바다에서 헤엄치기'(7) 영화 원작 옮기기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장르 소설 번역가 '코랄' 박산호[책바다에서 헤엄치기] 7화 '영화 원작 옮기기'입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충격이었다. 빨간 소품만 하나 두른 풍만한 여인들의 나신이 화면 한가득 출렁대는 것 아닌가. 순간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없었는데...'


영화는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는 녹색 드레스 차림의 여주인공이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장면으로 막을 내렸다.


“뭐야? 이게 끝이야?”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이 술렁였다.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아니면 허무해 보이는 결말에 수긍하지 못하거나, 뭔가 미진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들 등에 대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해가 안 되면 원작 소설을 읽어보세요! 영화보다 더 깊고 풍부하고 근사하니까요. 읽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어요!"

영화는 얼마전 개봉한 <녹터널 애니멀스>. 내가 번역한 소설 <토니와 수잔>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번역을 하다 보면 이렇게 영화로도 제작되는 소설을 맡게 될 때도 있다. 신이 날 것 같은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럴 때마다 불안과 기대감이 함께 몰려온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번역서를 기획할 때쯤에야 뒤늦게 영화 판권이 팔린 경우다. 이럴 땐 개봉까지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에 번역의 마감 압박은 덜하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개봉됐을 때 책은 잊히고 말 가능성이 크다.


물론 영화가 개봉되면서 원작 소설도 덩달아 재조명받아 판매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누릴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화가 흥행했을 때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책은 다시 망각의 늪으로 빠져든다.


반대로 영화가 개봉되는 시기에 맞춰 번역서가 출간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럴 땐 무엇보다 시간에 쫓기기 십상이다. 빠듯한 일정에다, 그런 와중에도 오역을 피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스트레스는 평소의 배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번역자로서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나와 씨름했던 책속의 세계와 인물 들이 대형 화면에선 어떻게 옮겨질지 궁금해진다. 반대로 글로는 멋지기만 했던 원작이 어이없이 왜곡되거나 형편없이 그려지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그런 불안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감독이 누구인가. 패션 하우스 구찌의 수석디자이너 출신의 톰 포드 아닌가. 그의 첫 영화 <싱글맨>의 아름다움에 이미 매료된 적이 있는 나로서는 이번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독특한 액자식 구성의 문학적인 심리 스릴러인 원작 <토니와 수잔>을 누구보다 근사하게 화면에 옮겼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나다를까 번역을 마무리하던 중에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그의 솜씨를 극장에서 확인하면서도 감탄했다. 현실과 허구라는 두 세계가 화려하고 감각적이면서도 정교하게 교직돼 있었다. 물론 아쉬움도 없진 않다. 이해가 된다.


2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에 일정 화면이라는 공간적 한계까지 가진 영화가 원작의 폭과 깊이를 어찌 다 담아낼까. 아무래도 작가가 품은 깊은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는 책이 한 수 위다. 소설을 각색한 영화의 이런 숙명은 대개는 피해 갈 수 없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내가 번역한 소설 중에 영화화된 작품으로는 11번째에 해당한다. 공교롭게도 영화 <스노든>도 국내 개봉을 코앞에 뒀다.

지금 한창 영화로 제작 중인 것들도 있다. 세계를 누비는 첩보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 <레드 스패로우>와 작가 매튜 퀵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번안한 <러브 메이 페일>이 그런 경우다.


이미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면 결과는 다양하다. 원작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오히려 맥이 빠진 것도 있고, 핵심을 잘 살려내면서도 창의적으로 재해석해 원작과는 또 다른 맛을 선사한 영화도 있다.

심지어 소설의 한계를 넘어 재미를 극대화시킨 영화도 있었다. <퍼시픽 림>이 그랬다. 이 작품은 번역 과정부터 사뭇 달랐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을 먼저 시작한 후 개봉에 맞춰 동시출간할 목적으로 작가를 고용해 소설을 썼다. 그러니까 각본이 우선했고 그걸 각색한 소설을 내가 번역한 것이었다.


번역부터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외계에서 온 초대형 괴물 카이주와 지구를 지키는 거대 전투로봇 예거들의 대결을 그린 이야기이다 보니 발차기나 펀치 같은 동작의 묘사가 많았다. 이걸 하나하나 여러 문장으로 박진감 넘치게 풀어 옮기자니 생각 이상으로 까다롭고 어려웠다.


게다가 SF소설이다 보니 영어 사전에도 없는 용어들이 난무했다. 우리말로도 새로 만들어야 해서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 고생 끝에 개봉 후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순간 멍해져 버렸다.


실감나는 문장으로 묘사하려고 그렇게나 애썼던 전투 장면들이 스크린에서는 호쾌한 주먹질과 발길질 들로 '상황 끝'이었다. 아, 글로는 묘사할 수 없는 스케일이라는 게 있구나, 자괴감마저 들었다.

꽤 히트를 친 좀비 영화 <월드 워 Z>도 빼놓을 수 없다. 원작 소설 <세계대전 Z>부터가 영화를 능가하는 스토리와 구성미를 갖춘 수작이었다. 좀비 바이러스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인류가 멸종 위기에 처했을 때 각국의 대처 상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쓴 이 소설은 좀비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공포를 예리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들었다.


제작에도 참여한 주연 브래드 피트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좀비에 기동성을 부여하고 벌떼 같은 군중 씬으로 관객 동원에도 성공했다.


못내 아쉬웠던 작품들도 있었다. 공산국가 옛소련에서 일어난 어린이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차일드 44>는 소설로는 큰 사랑을 받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내가 보기엔 각색이 다소 허술했고, 작품 속 비중이 큰 여주인공도 미스캐스팅한 탓 아닌가 싶다.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는 다른 이유에서 아쉬웠다. 원작 소설은 괴물과 인간이 평행 우주를 번갈아 드나들며 벌이는 블랙 코디미인데 B급 정서를 토대로 한 작품이었다.


결국 극장에는 오르지 못하고 IPTV로 풀린 영화를 보면서, 날아다니는 콧수염이라든가 도끼로 목이 잘린 인간이 되살아나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며 혼자 키득대기도 했다. 아직 마이너한 내 취향과 대중의 취향 사이의 큰 틈을 확인하고는 얕은 숨을 내쉬기도 했다.

언젠가 어느 국내 작가가 자신의 소설이 영화로 나온 것을 극장에서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기가 작품 속에서 그린 주인공과 영화 속 주인공이 너무 달라서 황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해가 간다.


비록 작가는 아닌 번역가이지만 내가 옮긴 소설이 영화로 나오면 매번 가슴이 뛴다. 원작에서 무엇은 같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극장을 찾아가서는 하나하나 뜯어본다. 놀라기도 하고 실망도 했다가, 어느 순간 뿌듯해지기도 한다.


미우나 고우나 이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는 데 나도 일조했다는 혼자만의 다독임이라고나 할까. 좋든 나쁘든 그 역시 나의 분신인 셈이므로. 천만 분의 1일지라도.


글쓴이 박산호

한국 외국어대 인도어과와 한양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루넬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3년 ‘못 말리는 유모’ 시트콤으로 영상 번역에 데뷔해 시트콤과 요리 프로를 번역하다가 2005년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영화 <양들의 침묵>에 매료돼 동네 도서대여점의 장르 소설들을 독파하면서 애정을 키우던 중,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스릴러 소설 대가인 매튜 스커더의 <무덤으로 향하다>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번역한 책은 <세계대전Z>, <싸울 기회>, <차일드 44 시리즈>, <레드 스패로우>, <100세 혁명>, <퍼시픽 림>, <솔로이스트>, <비독 소사이어티>, <도살장>,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등 60여 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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