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나쓰메 소세키가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

조회수 2016. 8. 24. 20: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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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4. 번역은 우리 고전의 영토를 넓히는 일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새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네 번째 편입니다. '재번역'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작가로 국내에서 인기 높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평이 나라에 따라 다른 이유를 아시나요? 우리의 오랜 고전이 외국 작품보다 더 멀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함께 생각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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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번역을 두 번 했다. 했던 번역을 다시 했다는 뜻은 아니고 남이 옮긴 적이 있는 책을 새로 번역한 적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는 내가 출판 번역가로 데뷔한 책인 애덤 스미스의 『페이퍼 머니』(2007), 또 하나는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2014)였다.

두 책 다 출판사의 의뢰로 맡게 됐지만 진행 방식은 정반대였다. 『페이퍼 머니』는 1982년에 처음 D출판사에 의해 번역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이었다. 내게 재번역을 의뢰한 W출판사의 대표는 번역에 참고하라며 예전 번역서의 복사본을 구해다 주기까지 했다.


원번역서는 아주 요긴했다. 문장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을 때마다 수시로 들춰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도움이 얼마나 컸는지는 몇 달 뒤 같은 저자의 후속작 『머니 게임』(2007)을 번역하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이 때는 번역이 막혀도 참고할 자료가 없어 적잖이 막막했다. 내 기억으로는 번역 기간도 훨씬 오래 걸렸던 것 같다.)

그에 반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재번역의 경우는 과정이 사뭇 달랐다. 이번에는 책을 새로 맡긴 출판사의 대표가 원번역서를 참고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은 1996년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가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진 적이 있었다. 이 번역서는 출간 이후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다가 절판된 상태였다.


새로 번역서를 내기로 한 출판사가 원번역서를 그대로 재출간하지 않고 내게 재번역을 맡긴 것은, 더구나 그러면서 이전의 번역서는 보지 말라고 한 것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에 맞는 우리 글로 옮겨달라는 취지에서였을 것이다. 하긴 민음사에서도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면서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의 원번역자는 철학을 전공한 대학 교수였다. 저자인 철학자 피터 싱어의 사상을 그만큼 제대로 이해하고 명확히 옮겼을 것이었다.

나의 새로운 번역이 원번역서의 아류에 머물지 않으려면 뭔가 차별성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이 책의 집필 의도가 독자를 설득해 행동을 바꾸게 하는 데 있다는 점에 착안해 모든 문장을 높임말로 바꿔봤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일상생활에서 윤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이 물음을 염두에 두고 또 이렇게 물어보십시오.”(『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2014, 25쪽)


이렇게 높임말을 쓰면 독자는 저자가 내 앞에서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새로 번역해서 낸 책도 언론과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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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번역가들은 가끔 재번역을 의뢰받았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앞선 번역서를 참고할지 여부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번역가마다 생각도 다르다. 한 선배 번역가는 이미 여러 차례 번역된 소설의 재번역을 맡고서 한국어판 판본들뿐 아니라 외국어 번역본까지 참고하면서 작업했다고 한다.


그도 원번역서를 참고하긴 했지만 이유는 내가 『페이퍼 머니』를 재번역했을 때와 달랐다. 그는 혼자서 막힐 때 선행자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문장을 쓰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대동소이한 번역을 내놓을 것이라면 굳이 재번역의 수고를 들일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본다면 재번역 작업은 일종의 번역 비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앞선 번역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전 번역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원칙상으로는 이런 식의 재번역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똑같은 책을 새로 번역한다면 적어도 옛 번역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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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작권이 풀린 외국 책들의 기존 번역서를 대충 매만져 ―이런 경우 심할 때는 원서를 읽지도 않고서―새로운 번역입네 하고 출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은 앞선 번역자의 노고를 가로채는 명백한 표절 행위다.


예전에는 이런 비양심적인 번역서의 출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번역가의 자부심도 커지고 독자들의 기대 수준이나 감별력도 높아지면서 상황은 변했다. 요즘은 번역가의 개성까지 묻어나는 번역서들을 찾아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얼마전에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2016)만 해도 두 번째 번역된 책이다.

원래 1982년 같은 출판사에서 홍영남 번역으로 낸 것을 이번에는 홍영남·장대익·권오현 공동 번역으로 다시 냈다. 공동 역자 중 한 명인 권오현은 “기존 번역을 참고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건 무슨 말인가? 기존 번역을 참고하다 보면 자칫 오역을 반복하거나 기존 번역의 틀에 갇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번역자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이런 태도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든다.


새로운 세대의 감각에 맞는 젊은 번역은 책의 문턱을 낮춰 더 많은 사람이 더 편하게 읽을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번역은 작가를 멀게도 가깝게도 한다. 가령 일본 문학의 거장인 나쓰메 소세키만 해도 그렇다. 그의 작품을 영어로만 읽은 미국인은 그가 왜 ‘문호’로 평가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번역에 재번역을 거치며 우리 감수성에 맞는 현대 한국어로 접하는 우리로서는 친숙하다.

뒤집어 생각하면 한국의 고전도 마찬가지다. 15세기 한국어로 쓴 『두시언해』를 요즘 한국인이 읽는 것보다 현대 영어로 옮긴 번역서를 외국인이 읽는 게 훨씬 쉬울 것이다. 새로 번역돼야 할 문학 고전에 우리 고전이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모름지기 고전은 현대어로 풀어 쓴 것보다 원래 판본으로 읽어야 제맛이라는 통념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재번역이 능사는 아니다. 신중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번 출간된 책은 소통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번역서의 어휘를 통해 외국에서 들어온 낯선 개념을 받아들이고, 우리말로 소통할 때 그 단어를 활용하게 된다. 같은 책의 번역서가 여러 종 나와 있고, 그중 어느 것도 정본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채 생소한 번역어들이 난무한다면 그 개념을 한국어로 사유하거나 소통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원서가 최종적 권위를 지니게 되고, 그 극단적인 형태는 “그래서 나는 번역서를 읽지 않는다”라는 서글픈 선언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번역서의 출간은 단순히 국내 서점이나 도서관, 개별 서가의 공간을 차지할 책의 종이 하나 더 늘었다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말과 글에, 우리의 사유와 감상의 지평에, 우리의 대화와 담론의 공간에 새로운 구성물이 추가되었음을 뜻한다.


고전이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민음사 편집위원들은 이렇게도 말했다. “『두시언해』가 단순한 번역 문학이 아니고 당당한 우리의 문학 고전이듯이 우리말로 옮겨 놓은 모든 번역 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 고전의 번역은 번역의 고전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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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노승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후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2006년에 출판 번역에 입문해 11년째 번역을 하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이자 실력만큼 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계형 번역가. 지금까지 50권가량을 번역했다. 편집자가 뽑은 《시사인》 2014년 올해의 번역가로 선정됐다.


주요 역서로는 멜러니 선스트럼의 『통증 연대기』, 노엄 촘스키의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단의 경제학』,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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