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역자 후기..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조회수 2016. 8. 3. 21: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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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3. '사족' 이상의 읽을거리가 됐으면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것이 번역입니다. 자동번역기 시대라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외국어와 한국어 번역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개선도 좋은 번역문이 쌓였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번역가가 존중받아야 하고 번역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새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세 번째 편으로 '옮긴이 후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혹시 번역된 외서를 읽을 때 책 뒤나 앞에 첨부된 역자 후기를 챙겨 보시는지요? 자칫 무심코 읽어 넘기거나 지나치기 쉬운 이곳에도 남모를 애환과 수고, 노력이 스며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까지는 아니라 해도 사족(蛇足)이냐, 금상첨화(錦上添花)냐, 그 사이에서 번역가들은 마지막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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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마치고 원고를 넘기면 얼마 후 교정지가 돌아온다. 지난주에는 두 부를 한꺼번에 받았다. 탈고는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지만 교정지가 닥칠 때면 왠지 모를 불편함이 엄습한다.


이제 옮긴이 후기를 쓸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두 출판사에서 빠짐없이 후기를 요청해 왔다. 다시 노트북 앞에서 골몰해야 한다.


번역가 이종인 씨처럼 번역 원고를 보낼 때 아예 후기까지 함께 보낸다는 분도 있다. 하지만 나는 번역 마감 일정을 맞추는 데 급급해 후기는 ‘나중에 써야지’ 하며 뒤로 미루기 일쑤다.


어차피 써야 할 후기라면 미리 써두는 게 낫다, 나중에 쓰면 책 내용을 잊어버려 오히려 시간도 더 많이 걸린다, 머리로는 그런 줄 다 알면서도 한번 자리잡은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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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번에는 출판사에서 후기를 안 써도 된다고 하지 않을까?’ 마음 속에서는 요행수에 대한 바람이 꿈틀댄다. 하지만 대개는 헛된 기대에 그치고 만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옮긴이 후기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번역자가 본문의 어려운 내용까지 쉽게 정리해 주면 여간 요긴한 게 아니다. 독자에게 책을 소개할 선명한 문장도 뽑아내고, 언론사에 배포할 보도자료에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번역해서 낸 책 50종 중에서 옮긴이 후기가 실린 책을 세어봤다. 첫 번역서인 『페이퍼 머니』(2007)부터 가장 최근에 출간된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2016)에 이르기까지 총 26종이다. 절반이 넘는다.

노승영 옮긴이 후기 모음 바로가기

생각해보면 옮긴이 후기를 꺼리게 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우선 효율이 극히 낮은 작업이다.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며칠을 꼬박 골머리를 썩여야 할 때도 한다.


내 경우 (요즘은 좀 빨라지기는 했지만) 옮긴이 후기는 보통 사흘이 걸려 20매가량을 쓴다. 번역 작업량이 하루 평균 40매(원고지) 정도라 치면 120매를 생산해낼 수 있는 시간을 후기 작성에 고스란히 바쳐야 하는 셈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출판사에서 옮긴이 후기에 대해서는 원고료를 따로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더 쓰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아, 생계형 번역가의 심리 기제란 이 얼마나 정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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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옮긴이 후기를 억지로라도 써야 할 때에는, 보도자료를 써야 하는 편집자의 괴로움을 떠올린다. 쓰기 싫은 것으로 따지면 편집자가 신간이 나올 때마다 작성해야 하는 보도자료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동병상련' 작전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옮긴이 후기는 본문에 첨부되면서 독자가 읽어주고 기록으로도 영영 남는 데 반해 보도자료는 사실 그때뿐이지 않은가. 읽는 사람도 언론사의 출판 담당 기자(물론 안 읽는 기자도 있지만)와 서점 담당자 말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보도자료도 즐거운 마음으로 쓰는 편집자도 없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어떤 편집자는 책을 낼 때마다 편집 후기를 쓰기도 한다. 이를테면 번역가의 필독서 중 하나인 이강룡,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2014)를 낸 유유출판사의 블로그에는 편집 후기들만 따로 모아놓은 곳도 있다.

유유출판사 편집후기 모음 바로가기

번역서가 아닌 국내 저자의 책인 경우는 옮긴이 후기 대신 편집자 후기가 책에 실리기도 한다. 가령 이상각의 『조선정벌』(2015) 책날개를 보면 ‘편집자가 드리는 글’이 나온다.

옮긴이 후기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관례라는 말을 예전에 들은 적도 있다. 마침 내가 번역한 대니얼 데닛의 『직관 펌프(Intuition Pumps)』가 일본어판으로도 번역돼 있어서 확인해봤다. 풍문과는 달리, 이 책에도 역자 후기(訳者あとがき)가 실려 있었다.


그렇다면 옮긴이 후기란 일본어판 번역서의 관례이고 이것이 국내에도 도입된 것일까. 사실, 어떻게 보면 옮긴이 후기는 사족에 해당할 수 있다. 정의상 책은 그 안에 저자가 하려는 말을 모두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후기가 꼭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책에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다. 물론 원서가 번역돼 새로 출간됐을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대상 독자와 독서의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그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옮긴이 후기는 그런 보완적 역할보다는 시나 소설 권말에 실리는 작품 해설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듯하다. 어쩌면 옮긴이 후기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도 작품 해설에 대한 필요성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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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후기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좋을까? 출판 번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옮긴이 후기 원고를 쓰면서 가족과 지인에게 감사한다는 문구를 넣어 출판사에 보낸 적이 있다.


나중에 책이 출간됐을 때는 그 부분이 싹 빠져 있었다. 게다가 내게는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때는 무척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 덕에 개인적인 얘기를 옮긴이 후기에 싣는 것은 출판사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판사는 옮긴이 후기를 무엇으로 생각할까? 수고한 번역자에게 감사의 뜻으로 베푸는 특혜? 책 홍보를 위한 요약과 해설의 부담을 번역자에게 떠넘기기?


순전히 내 심리 밑바닥의 반응으로만 보자면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만일 전자라면 후기 쓰는 일이 즐겁고 고마운 일로 다가와야 할 텐데 그런 기분이라고는 조금도 들지 않는 걸 보면.


그러다 보니 옮긴이 후기를 쓸 때에도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출판사가 원하(리라 추측되)는 글을 쓴다. 물론 출판사는 후기를 어떤 식으로 써달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럴 경우 번역자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련히 알아서 써줄 걸로 믿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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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옮긴이 후기에서 특별히 기대하는 것이 있을까? 가끔 남들이 번역한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내가 독자로서 읽고 싶은 후기라면 다른 독자도 좋아하지 않을까?


내가 독자로서 번역자 후기에서 읽고 싶은 것으로 들자면 몇 가지가 있다. 1)책의 사상적 위치를 알려주고 2)주요 개념을 자세하게 풀이하고 3)한국의 현실에 접목되는 지점을 짚어주는 것이다.


이런 글은 단순한 역자 후기라기보다는 작품 해제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전공하지 않은 분야를 번역하면서 그 책을 폭넓은 학문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분석한 글까지 써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땐 자신의 전공 분야가 확실한 번역가가 부럽다. 그런 사람이 잘 쓴 옮긴이 후기는 그 자체로도 읽을거리가 된다. 번역가 김석희 씨는 자신의 번역서 99편의 옮긴이 후기만 따로 엮어 『번역가의 서재』(2008)라는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1997년에 출간된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의 증보판인 듯하다)

생각을 정리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옮긴이 후기의 목표는 책을 사게 만드는 것, 읽게 만드는 것, 잘 읽게 만드는 것이다. 책을 홍보하는 것은 출판사의 몫이라고 생각하지만, 책의 매력을 발견해서 제대로 알려주는 일에는 번역가가 기여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독자의 자유로운 읽기와 해석에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되 책을 더 풍부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시하는 역자 후기라면 '사족' 이상의 읽을거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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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노승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후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2006년에 출판 번역에 입문해 11년째 번역을 하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이자 실력만큼 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계형 번역가. 지금까지 50권가량을 번역했다. 편집자가 뽑은 《시사인》 2014년 올해의 번역가로 선정됐다.


주요 역서로는 멜러니 선스트럼의 『통증 연대기』, 노엄 촘스키의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단의 경제학』,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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