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문화는 언제 비옥해지는가

조회수 2018. 12. 3. 09: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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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현 교수의 칸트 강연집 '인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오늘의 큐레이션]으로 칸트 철학의 대가인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강연집에서 골라 봤습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근대 철학의 관문이자 수원으로 통합니다.


백 교수는 최근 칸트의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에 대한 특강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했습니다.


자신이 50년 동안 연구해온 칸트와 그의 철학을 구어로 쉽게 풀어 설명하는 한편, 오늘날 그것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그중에서 칸트를 비롯한 외국 사상의 번역과 관련한 내용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사람들은 칸트가 외국 사람 아니냐고 하고, 그래서 칸트 사상을 외국 것, 남의 것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다. 칸트 역시 당시 저술을 할 때에 200여 년 후 한국에서 자신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고, 대학 철학과의 필독서가 되고, 일반 시민을 위한 교양 강좌의 교재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칸트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다. 칸트는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언급을 하는데 한국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아마도 몰랐거나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 그의 사상을 알려고 하는가? 당사자는 한국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는데... 이런 점을 속상해 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교는 어떠한가? 불교는 또 어떠한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국을 알았을까? 불교도 외래 사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유교도 한국이 발상지가 아니다. 문명 일반이 그러하듯이 사상은 먼저 개화한 쪽에서 형성되어 이웃으로 퍼져나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다시 발전을 시켜 활용하게 된다. 따라서 그 사상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 못지않게 그 사상을 어떻게 꽃피워내느냐도 중요한 일이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철학 하면 칸트를 떠올리지만, 칸트가 고전 공부 없이 모든 것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칸트가 공부한 고전은 대부분 외국어로 된 것이어서 번역한 것이다. 칸트철학도 고전 번역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독일어가 문화어로 성장한 과정부터가 그러하다. 독일어라고 하는 언어는 루터(1483-1546)의 성서 번역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근대 독일어로 정착되었다. 루터는 1522년부터 1534년까지 12년에 걸쳐 종래의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완역했다. 칸트도 자기 저작에 성서를 인용할 때에는 루터가 이때 번역한 성서를 이용하고 있다. 독자들이 칸트 책 안에서 인용문을 접하는 성서는 현대의 성서가 아니다. 루터가 번역한 성서이다.


성서 번역 다음으로 독일어 사전이 만들어진다. 현대 독일어 정착의 밑거름이 된 최초의 독일어 사전을 만든 이는 칸트와 동시대인 아델룽(1732-1806)이다. 그는 제대로 된 <표준 독일어 사전>을 1774년부터 시작해 1786년에 이르러 마침내 다섯 권으로 완성한다. 칸트가 남긴 의미 있는 철학책들이 집필되고 출판된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칸트의 주요 저술은 1770년부터 1803년에 걸쳐 나왔다.)

한국 역사에서 보면 이 시기는 조선의 정조 재위 기간이다. 정조가 왕위에 있던 기간이 1776년부터 1800년까지였다. 칸트가 학문적으로 활동을 하던 시기와 조선의 정조 임금이 통치하던 때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배로 따지자면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칸트(1724-1804)와 같은 시기에 살았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칸트의 30-40년 후배로 헤겔(1770-1831)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다. 칸트와 연암, 헤겔과 다산을 비교해보면 당대 독일과 한국의 지성의 차이, 문화 수준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아델룽의 사전이 나오고 괴테(1749-1832)와 실러(1759-1805)가 문학적 성취를 이루자 독일어는 일약 문화어가 되었다. 그때 그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기념비적인 <독일어 사전>이 나왔으니, 이 사전은 지금도 독일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국보급 사전이다. <동화책>으로 유명한 그림 형제가 이 사전을 만든 주인공이다. 그림 동화책 하면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백설공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그림 형제가 수집한 동화 중 대표적인 작품이 '백설공주'이다. 그림 형제는 독일어 문법 체계를 세우는 등 매우 유능한 학자였는데 정치적인 문제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라이프치히의 한 출판사가 후원자로 나섰고, 출판사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동화집을 보완 편찬하고, 이어서 '루터에서 괴테까지' 사용된 모든 독일어 어휘를 수집 정리한 독일어 사전 편찬에 착수했다(1852).


그림 형제는 처음에는 10년이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한다. 그러나 작업이 쉽지 않았는지 1854년에 제 1권을 낸 후 이들이 죽을 때까지 알파벳 아(A) 베(B) 체(C) 데(D) 에(E) 에프(F) 일부분까지 진척을 보았을 뿐이다. 그것이 훗날 전체 32권으로 완성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손과 머리를 거쳐 1961년에야 완성이 되었으니 127년이 걸린 셈이다. 그림 형제가 시작한 독일어 사전 편찬 작업이야말로 독일어의 성장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고와 열정이 어우러졌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국어 성장 과정도 한번 돌아보기로 하자. 최초의 현대 한국어 사전은 언제 어떻게 나왔을까? 이 문제에 앞서 분명하게 해둘 것이 있다. 많은 이들이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한다. 한글이 곧 한국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이다. 영어로 치면 알파벳인 것이다. 만약 한글이 곧 한국어라고 생각하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는 다 같은 언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알파벳을 공유하면 동일한 언어가 되는 것인가?


언어는 말과 글로 되어 있다. 한국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그 한국어를 글자로 표기할 때 과거에는 한자나 이두 등으로 표기했다. 고려 시대나 고구려, 백제, 신라 때 작성되어 지금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문서는 거의 다 한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중국어 문서가 아니다. 이렇게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해 오다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면서 그때(1443)부터 한글 표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후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글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자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시경(1876-1914) 선생이 체계를 갖춘 <국어문법>을 낸 것이 1910년이다. 그 후 심의린(1894-1951)이라는 분이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을 만들었는데, 1925년의 일이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한국어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한국 고유의 말, 조선어를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잘 가르칠 수 있을까를 연구해서 책으로 냈다고 한다.


한글학회가 만들어진 후 1929년부터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했는데 결국은 주요 인사들이 투옥되어 완성을 하지 못했다. 해방 후 사전 편찬이 다시 시작되고 1957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한국어 사전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니 한국인이 제대로 된 현대 한국어 사전을 갖게 된 것이 이제 겨우 60년이다.


사상은 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어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 한국 태생의 대철학자가 있는데 미국에 살면서 완전히 한국어를 잊고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쓴다면, 그 사람의 사상은 한국 사상이 아니다. 사상은 말에 실려 있다. 사상이 말에 실려 있으니 그 말이 없으면 그 족속의 사상이라고 부를 것이 없다. 이를 반대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국어로 상용하는 여러분 중 누군가가 칸트가 쓴 독일어 원저를 읽는다 치자. 과연 그 사람이 칸트 책을 독일어로 읽을까? 아니다. 그 사람은 한국어로 읽는다. 눈으로는 독일어를 읽지만 벌써 머리속에서는 그 독일어에 상응하는 한국어를 찾아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독일 사람이라면 그것을 독일어로 읽을 것이다. 미국 사람은 영어책을 영어로 읽는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영어 글도 한국어로 읽는다. 영어로 쓰인 글에 상응하는 한국어 어휘가 떠올라야지, 다시 말해 번역이 되어야 비로소 그 의미가 머리에 새겨진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태를 지나쳐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결국 누군가가 칸트를 한국어로 바꾸는 순간 그것은 한국 사상이 된다. 퇴계 이황이 중국어로 된 문헌을 연구해서 한문으로 글을 썼지만 그것은 조선식 한문으로 표기된 것이다. 퇴계가 중국어로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한국 사상이다. 퇴계 이황을 중국 철학자라고 보는 이는 없다. 퇴계의 글 가운데 아마도 절반 이상이 중국 사람들의 저작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때는 지식재산권이라든가 저작권이라는 것이 없어서 따옴표 사용도 하지 않았다. 저작권이라는 것은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나서야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전에는 인용과 자기 말을 굳이 구별하여 적을 필요도 없었거니와, 앎과 지혜가 특정인의 소유라는 생각은 상식에도 맞지 않았다. (식견과 사념이 개인 소유가 되는 문화 행태는 큰 우려를 낳는다.)


대부분의 글 내용이 외국 사상가로부터의 인용문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어로 새겨 쓴 글이면, 한국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고, 모조리 자기 생각을 풀어낸 것이라 하더라도 한국어 표현이 없으면, 한국 사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요컨대 한국어가 남아 있으면 한국 사상은 어떻게든 남아 있을 것이나, 만약에 한국어가 소멸하면 한국 사상 또한 사라질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여서 한국어가 없는데, 한국문학이 있을 리 없고, 독일어가 소멸했는데 독문학이 유지될 리 없다.


학문 연구에서 번역 작업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술) 번역은 외국 사람들의 사상을 한국어로 이식시키고, 한국 사상으로 전환시켜 한국의 사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유교나 불교가 안 들어왔으면 지금의 한국 사상이 풍요로웠겠는가?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의 유입 수용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상이 풍요로워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도 들어오고 플라톤도 들어오고 칸트도 들어오고 하면, 그만큼 더 한국 사상이 풍요로워지게 된다.


좋은 물건을 수입해서 쓰게 되면 삶이 풍성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스마트폰 제조 기술 면에서 한국이 원조는 아니지만 세계에서 한국 제품이 제일 좋다. 원조는 아니지만 다른 나라에서 처음 개발한 것을 배워서 더 좋게 만든 것이다.


사상도 똑같다. 사상도 원조가 제일 좋은 것이 아니다. 서양 사상의 원조는 고대 그리스이지만, 지금의 그리스 사상이 세계 으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원조가 따로 있더라도, 문물을 외부에서 들여오더라도 그것을 가져다 더욱 발전시켜서 사람들의 복지 향상에 잘 활용되도록 펼쳐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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