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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세계] 편집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조회수 2017. 8. 3. 20: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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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박산호의 '책바다에서 헤엄치기'(9) 편집자라는 타인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장르 소설 번역가 '코랄' 박산호[책바다에서 헤엄치기] 9화 '편집자라는 타인'입니다.

얼마 전 한 편집자와 식사를 했다. 함께 작업한 책이 출간된 기념이었다. 꽤 난해한 내용이어서 고생깨나 한 책이었다. 그래도 독자들 반응이 좋아서 우리끼리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차를 마시며 책 이야기를 하다 불쑥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일하면서 어떨 때가 가장 즐거워요?”


물론 애정하는 작가의 책을 맡았을 때지요. 아니면 책이 아주 마음에 들거나, 그도 아니면 세간의 화제가 될 작품을 맡아서 작업할 때... 내가 예상했던 대답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들려온 답은 다소 뜻밖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잘 맞을 때지요.”


순간, 나는 그동안 오래 편집자들과 작업을 해오면서도 속마음은 잘 몰랐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흔히 한 손엔 담배, 다른 손엔 빨간 펜을 든 채 원고를 보며 흥분하거나 격분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편집자들만 해도 그런 상투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번역서 60여 권, 영어 책 2권을 쓰는 동안 나도 무수한 편집자들을 만났다. 출판 경력 초반 미로 속의 손전등처럼 길을 안내해준 고마운 편집자들이 있는가 하면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유쾌하지만은 않은 관계도 있었다.


맨 처음 떠오르는 편집자는 A다. 새파란 초보 번역가 시절 운 좋게 맡은 첫 책이 자기계발서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신이 났던 때. 책을 낸 출판사의 경제경영서 담당 편집자가 A였다. 먼저 번역을 의뢰해 왔을 때 사실 나는 의욕만 앞섰지 능력은 턱없이 부족한 초짜였다. 그러면서도 덥썩 맡고 말았던 것. 결과물은 역시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최종 원고를 보내면서 이 출판사나 A와의 인연은 여기까지겠거니, 지레 마음을 다독였다. 며칠 후 A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번역의 오류와 단점을 조목조목 짚은 장문의 메일이었다. 같은 실책을 반복하지 않게 하는, 그러면서도 상대가 상처받지 않게 최대한 배려한, 명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A는 그 회사를 떠난 후에도 다른 회사 편집자들에게 나를 추천해줬다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뛰어난 능력에 인품까지 겸비한 A는 다른 회사에서도 승승장구하다 독립해서 지금은 멋진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나를 스릴러 소설의 세계로 이끈 것도 편집자였다. 내게는 전설 같은 이들이다. 편의상 B와 C라 부르겠다. 이들은 초보인 내게, 무슨 배포에선지, 대형 작품들을 턱하니 맡겼다. 오역으로 항의 메일이 날아든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믿어줬다.


그 덕에 나로서는 최고 출세작인 세계대전 Z를 맡는 행운까지 누렸고, 그 후 기라성 같은 스릴러 작가들의 작품을 원 없이 번역할 수 있었다. B와 C는 지금도 척박한 장르 소설의 파수꾼처럼 여러 작가와 번역가 들을 지원하고 있다.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가 늘 애정과 신뢰로 넘치는 것만은 아니다. 일본 철학자 츠지야 켄지가 쓴 수필집 <홍차를 주문하는 방법>을 보면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한 장(章)을 장식한 대목이 나온다.

이 능청스러운 '갑'은 매번 원고를 제때 넘기지 않아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인 담당 편집자에게 "어차피 안 올 것 같은 원고는 포기하고 요양이나 다녀오시라"고 써놨다. 게다가 문제의 원고는 마감을 2년이나 넘겼다니.


국내에도 번역된 <중쇄를 찍자>를 원작으로 한 일본 드라마에도 편집자의 웃픈 애환이 잘 나온다. 만화가가 번번이 마감을 어기자, 결국 편집자는 집까지 쳐들어가 원고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지니어스>는 작가와 편집자의 애증 관계를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그렸다.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명작을 탄생시킨 명편집자 맥스 퍼킨스가 주인공이다.


퍼킨스는 이미 여러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고 찾아온 무명 작가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장황한 원고를 다듬어 또 하나의 걸작을 뽑아낸다. 토마스 울프의 <천사여, 고향을 보라>.


하지만 산고는 처절했다. 작가는 자신의 피땀 어린 문장을 난도질하는 편집자를 원망하고 분노하면서도 결국에는 승복한다. 편집자는 야생마 같은 작가를 으르고 달래면서도 자신의 개입에 끝없이 회의한다. 그러면서도 작품이 완성된 후에는 모른 척 작가 뒤로 물러선다.

나는 일하면서 언제가 즐거웠던가, 자문해본다. 우선 작품이 좋아야 한다. 작가의 문체도 나와 궁합이 맞으면 좋겠다. 그 다음은 역시 나도 함께 일할 편집자를 꼽겠다. 작업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


울프는 끝내 퍼킨스를 저버리고 떠나지만 중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 편지를 쓴다. 장례식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퍼킨스 앞으로 배달된 편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던가. 읽다가 흐느끼는 장면에서 나도 울컥했다.


영화 제목 '지니어스'는 천재라는 뜻이다. 누가 천재였을까. 문재를 타고난 작가였을까, 재능을 알아보고 다듬어낸 편집자였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라고 했던가. 그 타인이 마음 맞는 편집자라면 그곳이 내게는 천국이다.


글쓴이 박산호

한국 외국어대 인도어과와 한양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루넬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3년 ‘못 말리는 유모’ 시트콤으로 영상 번역에 데뷔해 시트콤과 요리 프로를 번역하다가 2005년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영화 <양들의 침묵>에 매료돼 동네 도서대여점의 장르 소설들을 독파하면서 애정을 키우던 중,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스릴러 소설 대가인 매튜 스커더의 <무덤으로 향하다>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번역한 책은 <세계대전Z>, <싸울 기회>, <차일드 44 시리즈>, <레드 스패로우>, <100세 혁명>, <퍼시픽 림>, <솔로이스트>, <비독 소사이어티>, <도살장>,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등 60여 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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