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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세계]
매끄러운 번역문 뒤의 까칠한 고통

[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8. 번역료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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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 작성일자2016.12.07. | 9,916 읽음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제8화 '번역료 엘레지'입니다.


번역가는 어렵사리 번역을 마친 후에도 퇴고 과정에서 두 겹의 고민에 빠집니다. 좀 더 자연스럽게 읽히는 글이 되도록 구와 절을 줄이고 단어를 빼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말 못할 아픔을 느끼곤 합니다. 왜 그런지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출판번역에 입문하기 전에 기술번역에 몸담은 적이 있다. 번역회사에서 일감을 따서 내게 맡기고, 내가 번역해서 넘기면 회사는 고객한테서 받은 번역료 중 일부를 내게 떼어 주는 방식이다. 영어 원문 한 단어당 30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몇 달가량 이 회사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번역료가 안 들어왔다. 메일로 독촉하면 그때마다 금방 보내주겠다더니 급기야 전화도 끊어버리고는 아예 폐업까지 해버렸다. 밀린 번역료가 300만 원쯤 됐다.


회사에는 연락할 길이 없어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 내용증명을 작성했다. 담당 변호사는 그쪽에서 답이 없으면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무렵 다른 업체와 일을 하고 있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재판을 한다 해도 떼인 돈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번역회사를 차려 프리랜서 번역사들을 모집해 일을 맡긴 뒤 번역료는 자신들이 챙기고 폐업하는 것이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었다. 그걸 얼마 전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최근까지도 같은 수법에 걸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런 일을 겪고 난 뒤로는 규모가 큰 회사들과 일했다. 주로 외국 기업의 영문 홈페이지나 사용설명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업계 용어로는 ‘로컬라이제이션’(현지화)이라고 한다. 동영상 자막이나 게임 매뉴얼 번역 일감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 회사들은 매달 정해진 날짜에 번역료를 입금해줬다. 덕분에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됐다.


번역료는 영어 단어당 35~45원을 받았다. 일감은 매일같이 3000단어 분량이 들어왔다. 주말을 제외하고 월 20일씩 일하면 270만 원 정도가 손에 들어왔다. 정형화된 문장이 많아 일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하루치 일을 끝내면 맘 편하게 자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 한겨레문화센터의 ‘강주헌의 번역작가 양성 과정’에 등록했다(그때는 ‘강주헌의 번역 길라잡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기술번역이 재미있고 안정적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오래 일해도 해당 업체 말고는 경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번역문에 번역자의 이름이 실리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료로 보자면 출판번역 초보 시절에는 기술번역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한국어 200자 원고지 매당 3000원을 받으면 영어 단어당 45원을 받을 때랑 얼추 맞아떨어진다. 오히려 출판번역은 번역료가 일정하게 들어오지 않고 일감도 늘 있는 게 아니어서 위험 부담이 훨씬 크다. 그래도 내 이름을 걸고 실력과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출판번역을 업으로 삼고 싶었다. 그래서 출판번역으로 데뷔한 뒤 번역회사와는 관계를 정리했다.


몇 달간 일이 없어 놀고 있을 때는 ‘차라리 기술번역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내 이름이 찍힌 번역서가 하나둘 늘고, 한 번 일한 출판사에서 다시 의뢰를 해오면서 출판번역에 점점 정이 들었다.

번역료의 관점에서 기술번역과 출판번역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고료 계산을 원어로 할 것인가, 번역어로 할 것인가에 있다. 기술번역은 원어의 단어 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일감을 받자마자 고료 수입을 웬만큼 알 수 있다.


(기술적으로 들어가면 약간 복잡해지는데, 기존 번역문과 100퍼센트 일치하는 문장은 번역료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75퍼센트, 50퍼센트 일치하는 경우에도 일부 삭감한다.)


큰 회사와 일할 때는 모든 일감을 파일로 받았다. 회사마다 나름의 파일 포맷과 전용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것에 맞춰 작업해야 한다. 어떤 번역회사는 자기네 번역 프로그램을 구입해야 일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100만 원 넘는 프로그램을 울며 겨자 먹기로 장만하기도 했다. (지금은 고맙게 생각한다. 프로그램이 꽤 효율적이어서 출판번역에서도 큰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출판번역은 우리말로 번역된 글자 수(실제로는 원고지 매수)를 기준으로 고료를 지급한다. 주로 종이책 형태이다 보니 원어로는 분량을 미리 가늠할 수 없는 탓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한 가지 부작용(?)은, 퇴고 과정에서 조사나 어미, 접속사를 뺄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는 것이다. 고료 수입과 직결되는 글자 수가 그만큼 줄기 때문이다. 군더더기를 쳐내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문장은 번역자의 금전적 희생을 먹고 자란다.


그러다 보니 최종 원고 매수를 놓고 출판사와 번역자가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출판사는 되도록 지출을 줄이려고 줄바꿈도 없애고 글도 최대한 다듬어(?) 분량을 줄이려 든다. 어떤 번역가는 만화책을 번역했는데 출판사에서 말풍선 문장들을 죄다 이어 붙여 번역료 수입이 반토막 났다는 하소연도 했다.


번역료는 번역가의 생계가 걸린 문제여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지급 방식에는 크게 매절과 인세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매절은 책 판매부수와 상관없이 원고량에 따라 일정액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인세는 책 인쇄부수에 연동해서 지급한다.

지금처럼 불황인 출판 상황에서 번역료를 인세로 책정하자는 것은 사실상 번역료를 깎아달라는 말과 같다. 나는 번역료를 조금 깎아주는 대신 인세로 계약한 적이 몇 번 있는데 미리 받은 번역료 이외 인세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예 계약금 100만 원에 나머지는 전부 인세로 계약했을 때만 딱 한 번, 그것도 1쇄에 대한 인세만 받은 적이 있을 뿐이다.


굳이 해석을 덧붙이자면, 책 판매부수에 연연하지 않는 매절 번역은 번역료를 노동력(=생산력)이 아니라 노동의 대가로 보는 셈이다. 노동력을 파는 사람은 노동자이고, 노동을 파는 사람은 프리랜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느 쪽이 됐든, 관건은 어떤 계산법을 따르더라도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고받는 일일 것이다.


어느 이탈리아 장인은 한 땀 한 땀 츄리닝을 만든다고 했던가. 번역가야말로 한 자 한 자 원고를 엮는다. 옮겨진 글자는 번역가의 땀이다. 어떻게 보면 봉제 인형의 눈을 붙이는 수작업 같기도 하다. 200자 원고지 1매 번역료가 4000원이라고 했을 때, 20원짜리 글자를 원고지 칸마다 옮겨 붙이는 격이다.


고생 끝에 30만 개를 다 붙이면 원고지 1500매짜리 번역서 한 권이 태어난다. 그렇게 탈고한 뒤 돌아서서는 다시 하나하나 글자를 붙이기 시작한다. 무던히 바위를 굴리며 산을 올라야 하는 시시포스의 운명이라고나 할까.

필자 소개



노승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후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2006년에 출판 번역에 입문해 11년째 번역을 하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이자 실력만큼 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계형 번역가. 지금까지 50권가량을 번역했다. 편집자가 뽑은 《시사인》 2014년 올해의 번역가로 선정됐다.


주요 역서로는 멜러니 선스트럼의 『통증 연대기』, 노엄 촘스키의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단의 경제학』,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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