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카이로스인가 크로노스인가

조회수 2016. 11. 30. 09: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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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박산호의 '책바다에서 헤엄치기'(6) 마감이라는 숙명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장르 소설 번역가 '코랄' 박산호[책바다에서 헤엄치기] 6화 '크로노스의 생활 리듬'입니다.


허겁지겁 마감에 쫓기다 하루 24시간, 1년 12개월을 지나게 되는 번역가의 숙명적인 생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일상,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하루 24시간, 1년 12개월.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균등하다. 하지만 각자가 경험하고 느끼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같은 시간도 구분해서 불렀다. 시계에 맞춰 균일하게 흐르는 객관적인 시간은 크로노스, `지금 여기서 느끼는 특별한 순간`의 시간은 카이로스라고 했다.


프리랜서 번역가인 내가 느끼는 시간은 대략 크로노스다. 철저히 마감 중심으로 돌아간다. 무슨 수가 있어도 마감 시간을 우선해야 한다, 하던 일이 있어도 급히 번역해야 할 책이 들어오면 거기에 맞춰 시간 조정을 다시 해야 한다.


번역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나는 영상 번역, 문서 번역, 출판 번역을 두루 거쳤다. 일을 할 때 겪는 마감의 리듬도 매번 달랐다.


제일 먼저 했던 영상 번역은 마감 기한이 짧았다. 대개 이틀이나 사흘 간격으로 찾아왔다. 초기엔 20분짜리 시트콤이나 요리 프로을 맡았는데, 번역도 처음인 데다 컴퓨터도 익숙하지 않아 시간을 꽤 끌었다. 게다가 3살 먹은 아이까지 돌봐야 했다.


그땐 마감일에 쫓겨 이틀, 사흘 단위로 시한부 수명을 되풀이하는 날파리 같은 인생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코뿔소처럼 마감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이들이 부러운 만큼 내겐 힘겨운 나날이었다. 그렇게 영상 번역과는 일찍 작별했다. 

그에 비해 문서 번역은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주로 계약서나 설명서, 논문, 소책자 같은 것을 우리말로 옮겼는데 마감 기한이 1주일에서 열흘꼴이었다.


일을 하던 중에 아이가 열이 올라도 마감 걱정 없이 병원에 갈 수 있었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 뭉텅이를 집어서 버릴 여유도 생겼다. 마감 간격이 길어진 만큼 가족 행사나 친구와의 만남, 장보기와 청소 같은 일상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출판 번역은 마감 사이의 간격으로 치자면 가장 넉넉한 일이었다. 책 한 권에 보통 짧으면 두 달, 두껍고 어려운 책이면 서너 달까지 잡고 일을 했다. 번역 도중에 큰일이 돌발하지 않는 한 안정적인 생활의 윤곽도 그려볼 수 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부터는 책 한 권을 끝낸 후 또 언제 일이 들어올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됐다. 반 년 정도 일정은 미리 계획해 두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나도 시간 부자가 됐구나! 라며 흐뭇해 했다. 하지만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속단은 언제라도 금물이다.

사실 마감과 마감 사이를 오가는 생활 리듬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지금도 새 책을 받으면 맨 먼저 시작과 마감 날짜를 일정표에 적고, 작업 캘린더에도 진하게 표시를 해둔다.


시작 날짜는 그래도 유동적일 수 있다. 하지만 마감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그놈의 무슨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생긴다!)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마음 한구석에 박힌 가시처럼 수시로 찔러댄다. 캘린더에 적어놓은 일정은 독일 병정만큼이나 질서정연하지만 그걸 소화하는 내 일상은 무정부주의자의 혁명, 바로 그것이다.


가령, 두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소설이 어느 대목에서 덜컥 발목이 잡혀 늘어진다. 그 와중에 엄마의 수술까지 급작스레 앞당겨지면서 간병까지 해야 한다. 병원에서 환자 수발로 경황이 없는 중에 난데없이 원고 검토 전화가 걸려 온다. 고사를 해야 하지만 아는 출판사의 편집자가 읍소를 한다.


하는 수 없이 검토서를 받아 읽느라 머리를 헤집고 있는데 예정에 없던 교정지가 날아든다. 슬럼프에 빠져 있던 소설 번역은 도무지 진척이 없고... 이런 식으로 일정이 한번 난마처럼 꼬이면 그 뒤에 줄줄이 서 있던 책들도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한다.

프리랜서 번역가의 한 해는 이렇게 엉망진창, 헐레벌떡, 대략난감의 반복이다.


겨울에는 방학을 맞은 아이의 하루 세 끼를 챙겨주며 1월과 2월을 일 반, 집안 일 반으로 엉거주춤하게 보내다 보면 발등에 떨어진 마감 때문에 지척에 있는 호수공원의 꽃 축제도 놓치기 일쑤다. 또 다른 마감에 머리를 쥐어뜯다 보면 어느새 여름이 찾아와 더위에 몽롱해진다. 여름휴가 예약 시기는 언제 놓쳤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가을 휴가랍시고 나서면 밤에는 호텔방에서 핏발 선 눈으로 아이패드의 검토서를 읽거나 교정을 본다. 그렇게 몇 건의 교정지와 몇 권의 책과 검토서를 끝내고 나면 어느새 거리에는 캐롤이 울려 퍼지고 코트와 파카의 물결이 넘실댄다.


인생이 뭐 이 모양이람, 하는 자괴감이 어김없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내 인생은 왜 카이로스가 아닌 크로노스의 시간으로만 가득한가,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다시 가슴에 손을 얹고 굳게 다짐한다. 내년엔 슬럼프도, 느닷없는 비상사태도, 그 어떤 일도(어떤 일이 있어도 일어나는 그 어떤 일까지도) 나의 마감을 막지 못할 것이다. 맹세코, 기필코, 한사코, 칼 같이 사수하고 말 것이다. 그런 후 나도 한 번 사는 것처럼 살아볼 것이다.


그렇게 매년 새해가 되면 주먹을 불끈 쥐고 결의를 다지는데... 아 또 어느새 연말이 코앞이다. 젠장!

글쓴이 박산호

한국 외국어대 인도어과와 한양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루넬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3년 ‘못 말리는 유모’ 시트콤으로 영상 번역에 데뷔해 시트콤과 요리 프로를 번역하다가 2005년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영화 <양들의 침묵>에 매료돼 동네 도서대여점의 장르 소설들을 독파하면서 애정을 키우던 중,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스릴러 소설 대가인 매튜 스커더의 <무덤으로 향하다>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번역한 책은 <세계대전Z>, <싸울 기회>, <차일드 44 시리즈>, <레드 스패로우>, <100세 혁명>, <퍼시픽 림>, <솔로이스트>, <비독 소사이어티>, <도살장>,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등 60여 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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