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초보나 고수나 대가는 장당 천원 차이

조회수 2016. 11. 9. 16: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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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7. 혼자 일하지만 서로 통할 수밖에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제7화 '동병상련'입니다. 각자 원서를 앞에 두고 홀로 분투하는 처지이면서 서로간에는 막역한 친구처럼 애환을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번역가들 특유의 동지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번역가라고 해서 늘 번역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강연이나 발표를 맡아 사람들 앞에 서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번역과레토릭연구소 주최로 열린 학술 발표회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배수아 씨, 류재화 씨, 나 이렇게 셋이서 발표를 했는데 내가 맡은 주제는 '작가와 번역가 커플을 찾아서'였다. (이 내용은 격월간지 'Axt'에도 소개됐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여기서 다른 번역가 한 분을 만났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분이었지만 대면은 처음이었다. 강연을 마치고 함께 커피를 마시게 됐다. 대화의 주제는 그가 최근에 번역한 책이었다. 그는 까다로운 표현을 우리말로 옮기고 수많은 용어를 일일이 대응시키느라 애먹은 사연을 길게 털어놓았다.


초면에 가벼운 덕담 정도나 나눌 법도 한데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좀 의아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의 주위에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만한 동료가 없다는 것을,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고 노고를 알아줄 사람을 그동안 만나지 못했음을.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번역가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 처음 만나도 사전 탐색과 예열이 필요없다. 상대방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무엇을 갈망하는지 일일이 말하기도 전에 잘 알기 때문이다.

동종 업자들간의 그런 끈끈한 유대감이야 다른 직업군에도 드물지 않겠지만 번역가는 그중에서도 유별난 듯하다. 평상시에 타인과의 접촉은 없이 거의 늘 혼자 일을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다.


번역은 고독한 작업이다. 하루 종일 홀로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원고와 씨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작가들 세계에는 문단이라는 것이 있지만 번역계에는 ‘역단(譯壇)’이라는 것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번역계 입문 과정에는 문턱이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특별한 전형이나 공식 자격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착실히 배운 정도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잠재적 번역가라고까지 할 수 있다. 누가 어떻게 했든지 번역의 결과물만 요건을 갖추면 된다. 번역가는 번역물로만 자신의 자격을 증명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할 이유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니 흔히 사회 생활의 주요 자산으로 이야기되는 이른바 인맥의 필요성도―적어도 실용적 관점에서는―별반 느끼지 못한다.


번역가들 사이에 경쟁도 적은 편이다. 물론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왕이면 실력도 뛰어나 높은 평가를 받는 동료를 부러워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남을 누르고 내가 올라서야 할 이유는 없다. 각자 맡은 책의 번역 완성도를 놓고 경쟁할 뿐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번역은 대체로 일한 시간에 비례해 대가를 받는 직업이다. 대가의 편차가 크지 않다. 처음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경력이 쌓여 일정 궤도에 오른 사람이나 번역료의 차이는 200자 원고지 1매당 500~1000원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작업량에도 한계가 있어,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1년에 10권 이상 번역하기는 힘들다. 대개는 6권 이내가 고작이다. 금전적으로만 보자면 업계 최고가 되어도 따르는 보상이 보잘것없기에 굳이 남과의 경쟁에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 이전의 자신보다 뛰어나기만 하면 된다.


선배 번역가들은 평생 그렇게 외로이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소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면서 골방에 처박혀 일하면서도 서로 활발히 교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만나서 떠들지는 않아도 글로 수다를 떤다. 그러다 오프모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 경우엔 1년에 한 번 곱창을 먹는 모임이 있는데―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올해는 번역가 말고도 편집자와 평론가까지 합석했다―이 정도만 해도 외로운 일상 업무에 충분한 활력소가 된다.

번역가들끼리의 온라인 왕래에는 또 다른 득이 있다. 번역이 막힐 때 수시 문답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 문장이 영 안 풀리는데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작가들 사이에 이런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번역가끼리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특정 단어의 뜻부터 문장의 구조, 외래어 표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문을 던지고 아는 이는 성의껏 답변한다.


상대방의 오역을 지적하는 일조차 '우리 사이에는' 실례나 수치가 아니라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굳이 공개적으로 지적해 면박을 준다면야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어지간해서는 당사자에게 귀띔해주고 만다. 번역을 해본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실수조차 저지르기가 얼마나 쉬운지, 문장 하나를 다듬는 데에도 얼마나 골머리를 썩여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남을 깎아내린다고 해서 나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쩌다 난해한 외국어의 원문이라는 가시밭에 뛰어들어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동료를 도우려는 것일 뿐, 거기에는 어떤 이해득실의 계산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웃집에 소설가가 산다. 만약 그가 소설만 썼다면 그저 글쓰는 이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가 소설‘도’ 쓴다는, 그러니까 번역가이기도 하다는,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우리는 같은 길을 가는 동료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따금 동료 번역가에게 책을 선물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同志에게’라고 눌러 써서 주곤 한다. 이때야말로 ‘동지’라는 단어를 원뜻에 가장 가깝게 쓴다고 느낀다. 그만큼 서로의 애환을 가장 깊이 아는 사이임을 아니까.

필자 소개



노승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후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2006년에 출판 번역에 입문해 11년째 번역을 하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이자 실력만큼 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계형 번역가. 지금까지 50권가량을 번역했다. 편집자가 뽑은 《시사인》 2014년 올해의 번역가로 선정됐다.


주요 역서로는 멜러니 선스트럼의 『통증 연대기』, 노엄 촘스키의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단의 경제학』,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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