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일을 하면 얼마나 한다고 그래?"

조회수 2016. 11. 4. 10: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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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박산호의 '책바다에서 헤엄치기'(5) 작업실 연대기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장르 소설 번역가 '코랄' 박산호[책바다에서 헤엄치기] 5화 '작업실 연대기'입니다.


집 거실에서 책 번역 작업을 처음 시작해 전전하던 끝에 올해로 번역가 13년 만에 작업실을 마련하기까지 애환을 이야기합니다.


비슷한 처지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을 이땅의 (특히 여성) 프리랜서들을 향한 동병상련의 응원가로도 읽힙니다.

나의 첫 작업실은 서재를 겸한 컴퓨터 방이었다. 시작은 영상 번역가였다. 서울 휘경동에서 번역 회사가 있는 광명 철산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종이백 한가득 비디오 테이프를 받아왔다. <사브리나>, <못 말리는 유모> 같은 시트콤을 돌려보며 집의 낡은 컴퓨터로 대본을 번역했다. 번역도 컴퓨터 문서 작업도 처음이었다. 엔터 키도 몰라 사장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세 살짜리 딸이 펄펄 끓는 열로 고생하던 밤중에 전화로 마감 독촉하는 사장에게 질려 영상 번역은 접었다.


그 후 지인 소개로 문서 번역을 시작했다. 이번엔 거실에 교자상 작업실을 차렸다. 툭하면 다운되는 가족 공용 컴퓨터 대신 노트북도 새로 장만했다. 중국산 하이얼. 12개월 할부였다. 살림과 육아 부담은 여전했지만 노트북과 번역 텍스트, 스탠드와 필통을 맘 편히 늘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대신 번역료는 족족 카드 값으로 나갔다.


“일을 하면 얼마나 한다고 어린애를 어린이집에 보내?”라는 말에 아이를 교자상 옆에 두고 번역을 하기도 했다. 마감에 쫓기다 보면 아이와 집 앞 놀이터 한번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아이는 놀아줘, 놀아줘, 노래를 불렀고, 나는 이것만, 이것만, 하며 일에 매달렸다. 기다리다 지친 꼬맹이는 어느날 작은 공작 가위로 한창 일하던 내 노트북의 마우스 선을 철컥 잘라버렸다. 4살짜리의 첫 시위였다. 그날로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고 나는 숨통이 좀 트였다.

세 번째 작업실은 새로 이사 간 아파트 거실이었다. 이번엔 교자상을 뺏길 수 없다는 식구들 원성에 밀려 인터넷으로 주문한 연두색 플라스틱 책상을 거실 통유리창 앞에 놨다. 창문 너머 아파트 전경이 나쁘지 않았다. 봄에는 화사한 꽃, 가을엔 울긋불긋 단풍, 겨울엔 펄펄 날리는 눈을 앞에 두고 일했다.


어느새 번역 일은 우리 집의 유일한 수입원이 됐다. 그렇다고 집안 일이 줄어든 것도 아니어서 번역과 병행을 하다보면 웬종일 밭을 가는 소가 따로 없었다. 번역가로 자리잡은 것까진 좋았지만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일에 지쳐 결국 몸에 탈이 났다.


그 무렵 영국에서 공부할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나는 아이 손을 잡고 유학길에 올랐다. 마우스 선 절단 시위를 감행했던 4살짜리는 어느새 초등학교 3학년이 돼 있었다.


이국의 풍경은 근사했지만 거기서도 가장으로서의 현실은 혹독했다. 집세와 생활비만 해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욕실 딸린 단칸방에 다시 교자상 작업실을 차렸다. 그 상에서 번역하고, 대학원 에세이를 썼고, 외국 생활의 소회를 블로그에 풀어놓기도 했다.


1년 반 영국 생활에서 돌아와 작은 아파트를 구하면서 드디어 작업실을 장만했다. 키 큰 책꽂이 3개와 책상 하나를 넣으면 꽉 찰 정도의 크기였다. 창문도 복도 쪽으로 나 있어 일 년 내내 열 수도 없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발품을 팔아 예쁜 책상까지 장만했다.

그 무렵 데려온 갈색 새끼 고양이 송이가 뜻밖의 우군이었다. 일하는 내 무릎 위에 올라와 자거나 책상 밑 교정지 위에서 졸거나, 책꽂이 위로 올라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내 작업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어느덧 아이도 쑥쑥 자라나 폭풍의 사춘기 6학년이 되어 자기만의 시간을 요구했다. 아이의 성장은 기특하면서도 서운했다.


올해로 번역가 13년. 처음으로 집 밖에 작업실을 냈다. 작년부터는 일이 살인적으로 늘면서 집중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 생각을 처음 꺼내보였을 때 가족과 친구들 반응은 정확히 양분됐다. 월세와 관리비 추가 부담을 걱정하며 말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본격적으로 일하려면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며 격려해준 이들도 있었다. 결국 계약서에 서명했다.

작업실인 오피스텔은 꿈에 그리던 조건을 다 갖췄다. 작업하다 가끔 밤샐 때 눈도 붙일 수 있는 복층 구조에, 내부는 더없이 깔끔했다. 주변엔 예쁜 카페와 식당이 즐비하고, 조금 더 걸어가면 대형 서점과 멀티플렉스 극장과 쇼핑몰이 있다. 바로 앞 아파트 단지에는 울창한 나무들도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다. 나무 사이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예쁜 길냥이도 한두 마리를 볼 때도 있다.


얼마 전 번역가 지망생 특강을 갔다가 질문을 받았다. “번역 작업 중간에는 어떻게 쉬세요?” 문득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작업 틈틈이 싱크대에 쌓인 그릇을 설거지하거나, 청소기나 세탁기를 돌리거나, 빨래를 널거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 간식을 챙겨주거나, 택배를 받거나, 장을 보거나, 그밖에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해치우기 바빴던 일과 중에 제대로 쉴 만한 여백이 있었던가. 살림하다 번역하고, 번역하다 살림하면 끝났던 하루.


그 하루가 작업실이 생긴 후부터는 좀 달라졌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로 출근을 하고, 가끔은 출근길에 근처 카페에서 커피도 사 들고 가며 회사원 코스프레를 한다. 조용한 작업실에서 번역에 몰두하고, 머리가 아프면 스트레칭도 하고 명상도 하며 쉰다. 일일 작업량을 끝내고 퇴근길에 장을 봐서 집으로 와서는 밀린 집안일도 하고 쉬기도 한다. 일터와 가정, 출퇴근 전후의 구분된 생활이 이제 겨우 가능해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 <자기만의 방>에서 이렇게 썼다.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 자기만의 방과 1년에 500파운드의 수입과 방해받지 않을 시간이 있다면 여성도 멋진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식구들과 함께 쓰는 거실에서 몰래 소설을 써야 했다. 자신이 쓴 원고가 하인과 손님에게 들키지 않도록 종이로 덮어 놓곤 했다. 나이팅게일은 방해받지 않고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중 30분밖에 안 된다고 절규했다. 박완서 작가도 <나목>이 여성동아 현상 공모로 당선되기 전까지 밤마다 베갯머리에 밥상을 갖다놓고 글을 썼다고 한다.

울프의 말에 견주자면, 나는 여전히 방해받지 않는 시간은 확보하지 못했다. 어렵사리 구한 작업실도 내년 3월 1년 만기가 되면 비워주게 될 것 같다. 살인적으로 오른 전세금을 만들려면 별 도리 없다. 그래도 1년 가까이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에서 일하고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어 행복했다.


동료 번역가들 중에는 부엌 식탁에서 번역을 시작해서 아직도 식탁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다. 지금도 수많은 번역가들이 공동 작업실에서, 카페에서, 고시원에서, 거실에서, 또 그 어딘가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특히 녹록지 않은 형편에 있을 여성 프리랜서들에게 동료애를 느낀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이뤄준다고 했던가. 그 좋은 말이 요즘은 좀 해괴한 곳에 쓰여 빛이 바랬지만, 올해 나는 나만의 작업실을 통해 그 주문의 효력을 누려봤다. 오늘도 가사와 육아와 일의 세 가지 공을 저글링하며 나만의 공간을 꿈꾸고 있을 프리랜서들에게 그런 행운이 함께 하기를. 우리 모두에게도 우주의 기운이 와닿기를.


글쓴이 박산호

한국 외국어대 인도어과와 한양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브루넬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3년 ‘못 말리는 유모’ 시트콤으로 영상 번역에 데뷔해 시트콤과 요리 프로를 번역하다가 2005년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영화 <양들의 침묵>에 매료돼 동네 도서대여점의 장르 소설들을 독파하면서 애정을 키우던 중,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스릴러 소설 대가인 매튜 스커더의 <무덤으로 향하다>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출판 번역계에 입문했다.


번역한 책은 <세계대전Z>, <싸울 기회>, <차일드 44 시리즈>, <레드 스패로우>, <100세 혁명>, <퍼시픽 림>, <솔로이스트>, <비독 소사이어티>, <도살장>,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등 60여 권에 이른다.


오리진이 고전 강독회를 엽니다.


사피엔스의 시작: 호머의 <오디세이아>


-강사: 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

-텍스트: 천병희 역 <오뒷세이아> (국내 유일 희랍어 원전 완역본)

-장소: 대학로 콘텐츠코리아랩 10층 컨퍼런스룸

-일정: 11월 15일부터 5주간 (11월 15일/22일/29일/12월6일/13일)

매 화요일 (마지막 13일만 월요일) 저녁 7시-8시 40분

-수강료: 총 5회 10만원

-신청 완료 후 사정으로 수업 결손시에는 강의 녹음파일 제공합니다.)


강좌 개요: 서양 불멸의 고전인 호머의 <오디세이아>를 국내 서양고전학의 태두인 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강독하고 해설, 문답의 시간을 갖습니다.

서양 문학사의 개막을 알린 첫 작품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흔히 영웅서사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태수 교수는 호메로스의 작품은 영웅의 한계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며 특히 오뒷세이아의 주역 오디세우스는 '반(反)영웅'의 전형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유명한 귀향 여정이야말로 스스로를 영웅과는 거리가 먼 진정한 호모 사피엔스의 모습으로 이해해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합니다. 나아가 오늘날 인간이 사피엔스로서 이룩했다고 자부하는 문명의 요체도 오디세우스의 이런 자기 이해에 근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오디세이아>를 읽어가면서 우리는 먼 옛날 움트기 시작됐던 문명의 예감을 어떻게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는지 천착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자화상을 깊이 감식해보려는 성찰적 노력이기도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신청 방법: journey.jeon@gmail.com으로 이메일 신청하면 개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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