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세계] '항해'와 '항호' 사이에서 표류하다

조회수 2016. 7. 12. 19: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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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승영 씨의 일일: 오대호 여행기 번역 중에 생긴 일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한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나라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것도 다른 것과 견주어 봤을 때 바로 보이고 제대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해외 양서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것이 번역입니다. 자동번역기 시대라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외국어와 한국어 번역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개선도 좋은 번역문이 쌓였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번역가가 존중받아야 하고 번역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출판물은 상대적으로 양서 비중이 높습니다. 최근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번역가인 데버러 스미스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으면서 번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그래서 다행한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뛰어난 작가 중에 번역을 병행한 이들이 많고, 기름진 문화는 늘 다른 문화를 거름 삼아 자랐음을 봅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새로운 기획 연재물 [번역의 세계]를 시작합니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거나 그 역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언어 문화의 대비와 함께 우리 단어와 문장의 맛과 멋을 새삼 깨닫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독특한 글쓰기 직업으로서의 번역에 대한 이해도, 번역서 읽기에 대한 관심과 묘미도 커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첫 출발로 [번역가 승영씨의 일일]을 시작합니다. 문패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따왔습니다. 그 첫 회 글은 오대호 여행기 영어 원서를 번역하던 중에 부닥친 일입니다. 함께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필자 소개



노승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한 후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2006년에 출판 번역에 입문해 11년째 번역을 하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이자 실력만큼 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계형 번역가. 지금까지 50권가량을 번역했다. 편집자가 뽑은 《시사인》 2014년 올해의 번역가로 선정됐다.


주요 역서로는 멜러니 선스트럼의 『통증 연대기』, 노엄 촘스키의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 아룬다티 로이의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단의 경제학』,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등이 있다.

노승영 번역가의 페이스북 바로가기

'번역가 승영씨의 일일' 연재를 시작하며: 번역하면서 떠오르는 단상과 흥미로운 에피소드, 저자와 주고받는 문답 등을 자유롭게 쓸 생각입니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은 제리 데니스(Jerry Dennis)의 『The Living Great Lakes』다. 여기서 'Great Lakes'란 미국 오대호를 말한다. 그 호수를 요트로 일주한 이야기다.




오대호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말이 호수이지 여느 호수와는 비교조차 어렵다. 오대호를 호수라 부르는 것은 마치 로키 산맥을 야산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오대호(五大湖, Great Lakes)


북아메리카 동북부,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있는 다섯 개의 큰 호수를 말한다. 총 표면적이 24만5000평방킬로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담수계이다. 다섯 호수의 이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대로 다음과 같다.


슈피리어 호: 가장 넓고, 가장 깊다.

미시간 호: 부피가 2번째로 크다. 전체가 미국에 속한다.

휴런 호: 면적이 2번째로 넓다.

이리 호: 부피가 가장 작고, 가장 얕다.

온타리오 호: 면적이 가장 작고,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출처: 위키피디어

출처: wikipedia
오대호 위성사진

호수인데도 바다처럼 파도까지 인다. 실제로 수많은 배가 풍랑에 침몰하기도 했다. 오대호가 바다와 다른 점이라면 짠물이 아니라 민물이라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대호의 이모저모를 묘사할 때는 바다를 묘사할 때와 같은 표현을 써도 대체로 무방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이번 책에 등장하는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바다와 호수의 차이 때문에 수시로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배를 타고 물 위를 이동하는 것을 영어로는 ‘sail’이라고 한다. 한국어로는 ‘항해하다’로 일반적으로 번역된다. 엄밀히 말하면 ‘sail’은 돛(sail)에 바람을 받아 이동하는 것을 가리친다. 그래서 ‘범주(帆走)하다’라는 좀더 전문적인 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에 반해 엔진 동력으로 이동하는 것은 ‘motoring’이라는 단어가 있다. 손으로 노를 저어 이동하는 것은 ‘rowing’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일컫는 한 단어짜리 우리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항해(航海)하다’는 ‘배 항’과 ‘바다 해’가 합쳐진 말이다.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다니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호수인 오대호를 ‘항해’한다고 쓰면 틀린 표현 아닐까?


그래서 처음에는 ‘배를 타고 호수 위를 다니다’라는 뜻의 신조어 ‘항호(航湖)하다’로 번역해볼까 생각도 해봤다.

모름지기 신조어란 표현하려는 개념을 일컫는 단어가 없어서 새로 만들어내는 말이다. 주로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거나 외국어를 번역할 때 생겨나곤 한다.


새로 들여온 문물이나 개념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일 것으로 예상되고, 따라서 이를 나타내는 단어가 있어 “사람마다 해여 수비니겨” 언어 생활이 편리해질 것 같으면 신조어를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쓰고 말거나 할 경우에는 불필요한 일이다.


‘항해하다’와 비슷한 뜻의 다른 단어를 몇 가지 떠올려보기도 했다. 우선 ‘배나 비행기가 정해진 항로나 목적지를 오고 가다’라는 뜻의 ‘운항(運航)하다’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이번처럼 한 번 여행하는 경우에 쓰기는 힘들다.


'배가 물 위를 달리다'라는 뜻의 ‘항주(航走)하다’와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다니다'라는 뜻의 ‘주항(舟航)하다’도 있다. 이 단어들의 문제는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말이라는 것이다.


만일 번역서에 이런 단어가 나오면 독자는 ‘항해하다’를 읽을 때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시선을 이 단어 위에 고정하게 될 것이다.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끄집어내기 위해 더 많은 두뇌 활동을 동원해야 하니까.

출처: wikipedia
오대호 중 하나인 온타리오호에 면한 토론토

책을 읽다 보면 그냥 쓱 읽고 넘어가도 좋은 단어가 있고 꼼꼼히 곱씹어야 하는 단어가 있다. 후자를 써야 하는 경우는, 어려운 개념이어서 독자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거나 중요한 개념이어서 독자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시켜야 할 때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굳이 낯설고 어려운 단어를 쓰는 것은 독자의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만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까지 하다 보면 번역어 하나 고르기도 쉽지 않다. 이번에도 골머리를 썩인 단어는 '항호'만이 아니다. '하천, 호수, 바다의 기슭'을 뜻하는 ‘shore’만 해도 한국어로 ‘해안’과 ‘호안’ 둘 다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beach’를 일컫는 전문 용어는 바닷가라는 뜻의 ‘해빈(海濱)’만 있을 뿐 호숫가라는 뜻의 ‘호빈湖濱’은 없다.


흥미롭게도 영어에서는 해안 지형을 일컫는 용어와 호안 지형을 일컫는 용어가 똑같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삼면이 바다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부분 ‘바다 해’ 자를 붙인다. 이것은 대상과 특징을 짝지어 두 음절짜리 단어를 즐겨 만드는 한자어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출처: wikipedia
오대호 지류인 디트로이트강변의 디트로이트

그나저나 ‘open lake’는 또 어떤가? 사방을 둘러봐도 수평선만 보이는 넓은 호수라는 뜻이다. 바다로 치면 ‘망망대해’인데 이걸 ‘망망대호(茫茫大湖)’로 번역해도 괜찮을까?


‘sail’로 다시 돌아가보자. ‘항호하다’라는 신조어를 써도 될까? 앞으로도 많이 쓰일 가능성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다못해 웃음이라도 줄 수 있다면 너그러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항호하다’란 말은 아무래도 재미도 교훈도 없는 무의미한 신조어에 그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호수를 항해하다’라는 모순적인 표현을 쓰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이 경우에 신조어를 만들거나 낯선 단어를 쓰게 되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처음에는 ‘호수’와 ‘항해’의 조합을 어색하게 느끼던 독자들도 자꾸 읽다 보면 친숙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긴 미국에서도 오대호를 ‘육지 바다Inland Seas’니 ‘단물 바다Sweetwater Seas’니 하고 부른다지 않는가.


*민물학파 vs. 짠물학파


한때 미국 거시경제학계에서 대립하는 두 학파를 두고 민물학파(freshwater/sweetwater school)와 짠물학파(saltwater school)로 불렀다.


민물 호수인 오대호 주변에 있는 내륙의 카네기멜론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로체스터 대학교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자들을 ‘민물 경제학파’라고 했다.


반면 짠물 바다인 태평양과 대서양 주위에 위치한 하버드 대학교와  MIT, 스탠퍼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브라운 대학교, UC버클리 대학교 등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자들은 ’짠물 경제학파‘라 불렸다.


민물 경제학파는 자유경제를 신봉하는 반면 짠물 경제학파는 정부 개입을 적극 옹호했다. 지금은 그런 지역적 구분이 많이 흐려졌다고들 한다.

어느 일본 번역가의 조용한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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