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북] 여성이 감정적이라구요?

조회수 2018. 3. 12.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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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자 리사 배럿 교수 인터뷰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감정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책의 저자 인터뷰입니다.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리사 펠드먼 배럿 교수입니다. 배럿 교수는 현재 미국 노스이스턴대학 심리학 석좌교수입니다. 뇌와 감정에 관한 연구를 개척한 공로로 미국국립보건원이 주는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뇌과학은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감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통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서 <옳고 그름>의 조슈아 그린 하버드 대학 교수가 윤리적 사고에 대해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면, 베럿 교수는 감정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합니다.


전통적으로 감정은 우리 몸에 내장된 어떤 것으로 이해돼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 자신이 감정의 설계자라고 말합니다. 사회 관계 속에서 감정을 학습하고 만들어간다는 거지요.


감정도 평생에 걸친 학습을 통해 뇌 전체에 걸쳐 상호작용하는 신경망에 의해 매순간 구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해 의학, 법률제도, 자녀 양육, 명상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감정의 구성 이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인터뷰는 보스턴에 있는 노스이스턴대학교 배럿 교수의 연구실에서 진행됐습니다.

-첫 책이지요?

네, 편집자로 여러 권을 낸 적은 있지만 제 책은 처음입니다.

-무척 야심적인 책 같았습니다. 무척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더군요.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반응은 어떤가요?

일반 독자들로부터 이메일을 아주 많이 받았어요.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자신의 삶을 바꿔놓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고맙게 생각합니다.과학자들의 경우, 비단 심리학 쪽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대체로 평이 좋았습니다. 심리학계 동료들의 경우 대부분은 무척 호의적이었어요. 어떤 분들은 실제로 자신의 수업에서 교과서로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여전히 감정에 대한 고전적인 견해를 아주 엄격히 고수하는 학자들도 일부 있습니다. 이 분들은 제 책을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호의적이었고 반응이 좋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통념에 반하거나 논쟁적인 내용을 그만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네, 물론 이 책에 담긴 생각은 논쟁적입니다. 하지만 이 견해를 지지해주는 과학적인 성과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학에는 늘 지지자와 반대자가 있습니다. 다만 반대자들의 경우 제 책에 대해 신뢰할 만한 비판을 제기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건설적인 비판적 리뷰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심리학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지요? 이력을 보니 진로를 바꾸셨던데요.

전공 분야를 바꿨습니다. 원래는 의과대학에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연구를 좋아해서 진로를 바꿨고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원래 학위는 임상심리학입니다. 그런데 저의 박사 학위 지도교수가 사회심리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임상심리학 아니면 사회심리학 쪽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 4년 동안에는 임상심리학 쪽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사회심리학 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저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기초 연구 과정에 관심이 더 많았어요.

-의사로 일도 하셨나요?

임상심리학자들은 심리치료 훈련을 받습니다. 그래서 환자를 봤지요. 오래 전에는 그런 수련을 했습니다. 하지만 연구에 더 관심이 많았고 거기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됐습니다. 감정에 대해 연구를 하면 할수록 그것의 생물학적인 척도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정신생리학을 다시 훈련받았습니다. 심장혈관계와 호흡계 같은 우리 몸의 시스템을 측정하는 분야 말입니다. 그런 후에 신경과학에서 뇌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점차 감정이 구성되는 것이라는 이론에 관심을 가지면서 전통적인 입장의 오류를 발견했다고 쓰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감정이 구성되는 것이라는 입장의 이론이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가 대학원생 시절에 실험을 통해 감정을 측정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믿음에 관한 연구였어요. 자기존중감이 높고 낮은 것을 사람들의 믿음의 결과로 측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들을 제가 직접 해보니 기존의 발표된 연구 결과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실험을 반복했지만 어떤 것도 기존 연구 결과를 재현할 수 없었어요. 3년에 걸쳐 8회 정도 같은 실험을 했는데도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내가 그렇게 좋은 과학자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실험 결과를 반복할 수가 없으니 말이죠.

하지만 가만히 돌아서서 제가 수집한 데이터들을 살펴보다가 사실은 제가 사용하고 있던 감정의 측정치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느끼는지 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었어요. 그들이 불안감을 느낀다고 보고했을 때 실제로는 우울감을 느낀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부정적인 감정들을 구분해서 보고하지 않고 있었던 거죠.

아주 안일하게도 모두가 어떤 감정의 범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고 생각했고, 분노와 슬픔 같은 각 감정의 범주가 고유한 얼굴 표정과 신체 반응, 뇌신경의 패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러니 가령, 감정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측정하는 법을 배우면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분노했을 때 늘상 얼굴을 찡그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어떨 때는 화가 난 상태가 아니더라도 (가령 단순히 불만족스럽거나 가벼운 반대의 뜻을 나타낼 때도) 얼굴을 찡그리지요. 각각의 감정 범주에 대응하는 표정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전까지는 각 감정에 대응하는 신체 패턴이 있다고 주장해왔거든요. 그런 신체 변화를 측정하는 것을 배우면 심리적인 변화를 측정하는 것을 배우는 거라고 본 거지요. 그 뒤로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기 위해 다른 분과를 계속해서 공부해 나갔지요. 그런 과정이 기본적으로 저의 이력을 구성하게 된 겁니다.

-감정에 대한 고전적 이론은 어떤 입장인가요?

고전적 관점은 모든 인간은 분노, 슬픔, 두려움, 역겨움, 행복, 놀라움의 정해진 회로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봅니다. 그 회로가 작동하면 우리 모두는 세계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얼굴 표정을 보인다고 설명하지요. 우리 신체는 마치 지문과 같은 생물학적 패턴을 갖고 있다고 보는 거지요.

따라서 심장 박동 수라든가 땀 분비량, 호흡수 등의 지표를 측정하면 감정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몸의 신체 변화를 관찰하기만 해도 감정을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어요. 어떤 감정 범주에서 가령, 분노 같은 경우만 해도 얼굴의 표정은 많은 것을 만들어 냅니다. 신체도 많은 것을 보여줘요. 분노 상태에서 나타나는 상이한 수많은 패턴을 어느 하나의 두뇌 신경회로가 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모든 감정의 범주마다 너무나 많은 신체적 표현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기본적인 사실이라는 겁니다. 범주들 간에도 유사성이 발견되지요. 슬퍼서 울 수도 있지만 어떨 땐 행복해서 울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분노에 차서 울부짖기도 합니다. 게다가 어떤 감정의 범주는 어떤 문화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도 아주 많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다른 문화권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감정의 범주를 갖고 있기도 해요. 서로 다른 문화권에 존재하는 공통의 감정 범주 속에서도 너무나 다양한 변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설명해내야 할 수수께끼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두뇌가 이런 다양성을 다루면서도 분노나 슬픔이나 두려움 같은 일정한 감정의 범주에 속하는 느낌을 만들어내는지.

두뇌는 이 퍼즐을 어떻게 푸는 걸까? 이것이 열쇠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지난 20년 동안 시간을 들여 답을 제시하려고 한 겁니다.

-그 결과에서 나온 감정의 구성 이론은 굉장히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동시에 통념과는 다르기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고요.

감정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대한 도전이었으니까요. 전통적인 입장은 우리 감정을 지금처럼 7가지나 그 이상의 구분된 범주 대로 이해해왔지요.

-말씀하신 대로 감정이 구성되는 것이라는 설명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의문은 남더군요. 우리는 누구나 보편의 감정 범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단 말이죠.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똑같이 분노하고 슬퍼할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런 감정은 보편적인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범주가 없는 문화권도 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없는 문화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한국 같은 많은 나라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은 같은 문화를 가진 결과일 뿐이라는 이야기네요.

가령 두 개의 문화에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의 범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범주 자체가 개인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어요. 예컨대 저는 슬플 때 한 가지 반응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슬플 때 얼굴이 온종일 시무룩해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시무룩해 있는 때가 드물어요. 슬플 때 온종일 우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슬프지 않을 때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슬프지 않은데 울 때도 있습니다. 제가 슬플 때 심장박동이 올라갈 수 있지만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유지될 때도 있고요.

그러니까 제 두뇌는 슬픔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온갖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 것을 취할지 어떻게 알까요? 선택지는 얼마나 많을까요? 저의 남편은 제가 슬플 때 어떤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가 슬픈지 알 수 있겠어요? 저는 당신이 그런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상이한 문화권 출신이니까요. 제 추측에 당신은 저의 감정 상태를 모를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요?

가령 예전에 저의 연구실에 한국인 대학원생이 있었어요. 함께 연구하던 시기가 끝날 무렵에는 서로를 아주 잘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떤 사람이 다른 나라로 갔을 때, 감정의 윤곽(profile)이 너무나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런 감정을 짓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경우에 어떤 종류의 학습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럴 때 우리 뇌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바로 그런 것들이 제가 답하려 했던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여기는 슬픔의 감정 범주만 해도 문화권에 따라 전형(stereotype)은 정말 다릅니다. '슬프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연상되는 것이 미국과 러시아 간에 아주 다릅니다.

-러시아인이 느끼는 슬픔도 기본적인 감정의 조합 아닌가요?

기본적인(basic) 감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감정도 다른 감정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없습니다. 어떤 감정을 기본적인 감정이라고 정의내리는 데 사용돼온 기준들 중 어떤 것도 지금까지 확증된 것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기본적'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는 감정의 범주는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이론은 대단히 혁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하지만 수많은 증거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주장입니다. 제 책에는 그중 일부만 소개돼 있을 뿐이지요. 책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훨씬 더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감정의 느낌은 동일한데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설명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어떻게 느낌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떤 기준으로 느낌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모든 사람은 고통을 느낄 때 울거나 부정적인 종류의 느낌을 표출한다고 느낍니다.

그 느낌이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어떤 실험을 할 수 있을까요? 두뇌 반응을 측정할 수 있을 겁니다. 또 그런 느낌을 주는 신체 상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런 감정 상태에서 어떻게 느끼는지 묘사해보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은가요? 나쁜가요? 들뜬 것 같나요? 평온한가요? 이상한 느낌인가요? 익숙한 느낌인가요?" 이런 식으로 느낌의 특징을 기술해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 아무것도 그것이 느낌은 아닙니다. 느낌(feeling)을 측정하는 방법에 불과하지요.

제가 실험을 해본 결과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택해서 슬프다고 느낄 때의 상태를 세 번 측정해봤는데 동일하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 슬플 때도 시간을 두고 관찰해보면 수많은 상이한 패턴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감정의 보편성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면 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 모든 다양성 중에서도 한 가지 사례를 택해서 보여줘야만 할 겁니다.

한 문화권의 모든 사람한테서도 이런 다양성이 나타나고, 다른 문화권의 모든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다양성이 나타날 겁니다. 그걸 비교해야 보편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런 종류의 연구는 실시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모든 사람이 슬픔은 한 가지의 것이라고 무심코 간주해왔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슬픔은 한 가지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슬픔에도 많은 패턴들이 있는데도 말이죠.

-우리 자신이 우리 감정의 설계자라고 쓰셨지요.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 경험의 설계자입니다. 그 말은 감정이라는 것이 우리 뇌(신경회로)에 심어진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가 감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 뇌가 감정을 구축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을 할 때 구축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감정이라고 해서 두뇌가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보는 방식대로, 듣는 방식대로, 맛을 보고 냄새를 맡는 방식대로 느낌도 배웁니다. 동일한 과정입니다. 두뇌는 수용하는 감각적 입력 내용을 감지하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추측합니다. 그런 다음 두뇌에 들어있는 정보에 맞춰 추측을 점검합니다. 그게 우리의 모든 경험이 구축되는 방식입니다. 감정뿐만이 아니라 생각도 그런 식으로 구축됩니다. 지각(perception)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두뇌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감정도 일종의 신체에서 비롯한 반응이란 뜻인가요?

신체는 늘 두뇌에 정보를 보냅니다. 어떤 감정적인 상태에 있든 아니든. 그렇지 않으면 죽은 상태가 되지요. 우리 몸의 내부는 대체로 수수께끼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심장이 규칙적으로 뛴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허파가 팽창하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만약 몸 안의 모든 움직임에서 오는 모든 감각을 느낀다면 바깥 세계의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을 겁니다. 따라서 신체 내부에 언제나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바깥 세계를 경험하는 것만큼의 세세한 정도로 느끼지는 않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뇌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계속해서 추적해야 합니다. 그게 뇌의 일입니다. 실제로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감정의 기원은 뭐지요? 우리는 왜 감정을 갖게 됐을까요?

모든 문화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감정은 적어도 저나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존재하지는 않아요. 예컨대 일부 문화권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간에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이 왜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왜 어떤 문화는 감정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어떤 문화권은 아닌가를 물어야겠군요. 감정을 만드는 가치는 뭔가요?

우리는 미국 문화나 한국 문화에서 감정을 만드는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에요. 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감정이 왜 그런 다양성을 띠고 만들어지는지는 그 문화에 달렸습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느낌과 감정을 구분하는 것 같습니다.

affect(학술적으로는 '정동'이라고 번역된다. 감정으로 범주화하기 전 원초적 느낌)와 emotion(우리가 아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구분합니다. 과학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감정과 느낌을 구분합니다. 뇌는 신체의 작동 규율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뛰도록 하고 숨을 쉬고 면역계가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감각이 만들어지고 뇌는 그런 감각을 표상합니다. 하지만 그런 감각을 우리가 느끼지는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느끼는 것은 정동(affect)입니다. 쾌감과 불쾌, 들뜨거나 평온함 같은 것입니다. 그런 느낌은 늘 갖고 있습니다. 정신이 깨어 있는 매 순간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된 모든 문화권에서 그런 느낌의 존재는 파악돼 왔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든 인간은 신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affect는 뇌가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추적하는 방식입니다. 때로는 affect가 아주 강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뇌는 그것에서부터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뇌는 그것으로 지각을 만들거나 사고를 하거나 기억을 하거나 결정을 내리는 등 다양한 활동에 재료로 사용합니다.

-감정의 진화는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지요?

감정이 진화한 게 아닙니다. 뇌가 감정을 만드는 능력에서 진화가 일어난 거지요. 뇌가 감정을 만들 때는 여러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뇌는 기본적으로 추측을 하고 예측을 합니다. 특정 상황에서 예측에 따라 행동을 인도합니다.

이런 뇌의 추측 활동이 바깥 세계에서 당신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는 것을 돕습니다. 그럴 때 만약 당신이 다른 누군가와 동일한 감정 개념을 공유하면 그런 느낌을 아주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보통 같은 문화권이나 유사한 문화권의 사람끼리는 그게 가능하지요.

가령, 미국과 한국은 어떤 면에서 아주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는 아주 다릅니다.제가 당신에게 "오늘 아주 행복해"라고 하면 말은 알아듣더라도 제가 어떻게 느끼는지 정확히는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거나 스트레스가 많지 않다는 대략적인 생각은 하게 될 겁니다. 내가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할지 알려주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정보를 주겠지요.

이런 식으로 감정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데 유용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제어하는 데도 유용합니다. 내가 울고 있으면 딸이나 남편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요청하지 않아도 그들이 뭔가를 하게 되지요.

감정이 갖는 것은 이런 기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능을 우리 신체의 변화와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체 안의 변화는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감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뿐입니다. 정확히는 뇌가 그런 의미를 부여합니다.

서로가 유사한 문화권 출신이거나 감정적 개념을 공유하면, "나는 슬퍼" "행복해" "동정심을 느껴"라고 했을 때 당신의 신체 상태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통이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감정은 사회(생활 혹은 관계)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인간이 모여살기 전에는 감정이 없었을까요?

인간은 모여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회적 동물로 무리를 이뤄 산다는 것이 종으로 적응하는 데 주요 잇점이었지요. 우리는 무리를 이뤄 사는 데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서로 잘 지내고 협력하는 능력이 필요했던 거지요. 동시에 전진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과 앞으로 나아가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이것을 담당할 정신적 도구들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감정입니다.

-감정이 사회적으로 범주화된 것이라면 언어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범주는 사물을 분류하는 방식입니다. 서로 다르게 보이거나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느끼고 다른 냄새가 난다는 식으로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들을 지시하기 위한 어떤 방법이 필요한 거지요. 이 과정에서 언어가 사용됩니다.

어린 아이들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아이들이 아주 적은 지각적인 불규칙성을 갖는 추상적인 범주를 배울 때 사용하는 방법이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지각적으로는 상이한 특징을 갖고 있더라도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들의 범주를 배우는 데 도움을 줍니다. 아마도 감정을 배우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 뇌는 단어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느낌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단어들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로가 행복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한 마디만 하면 됩니다. "행복해" 그러면 그 말이 상대의 뇌에서 그것과 관계된 모든 특성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 단어가 없을 경우 그걸 기술하기 위해 50개, 100개의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과 대조되지요. 아주 효율적입니다. 감정에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단어가 있으면 아주 효율적이고 편리하지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감정의 개념에서 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은 아주 이성적이라거나 감정적"이라는 말을 합니다. 타당한가요?

어떤 사람이 아주 강렬(intense)하다거나 열정적이거나 신경질적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이 사람은 기복이 심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의 신경계는 외부 세계에 대해 아주 반응성이 강하고 그 결과 감정적인 변화가 심합니다. 감정을 만들어낼 기회가 많다는 뜻이지요. 반면에 다른 사람은 그 정도로 반응성이 강하지 않습니다. 신경계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다 반응하지 않습니다. 느낌에서도 별 변화가 없습니다. 그 결과 감정을 만들 기회도 적다는 뜻이지요.

감정을 많이 만드는 사람이 이성적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인라는 것과 감정적이라는 것은 뇌 안에서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뇌는 이성과 감정의 전쟁터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보다 반응적이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두고 우리가 묘사하는 방식은 누구는 감정적이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일상적인 표현은 성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감성지능(EQ)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기술한 것과는 제 설명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저도 잡지에다 감성지능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감정 개념을 많이 알고 있으면, 그리고 감정 개념이 잘 개발돼 있고 세분화가 돼 있으면 다른 사람과의 감응에 뛰어납니다. 그런 점에서 감정적으로 영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의미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보다 감정적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제로 사람들을 측정해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더 '감정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남녀 상관없이 어떤 사람은 좀 더 감정적이고 다른 사람은 덜할 뿐이지요. 여성이 남성보다 더 감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지요. 그게 스테레오타입입니다. 대부분의 데이터 상으로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종의 남녀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진 건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그런 스테레오타입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지각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연구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실험 대상자에게 여성이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 사진을 보여주고는 그녀가 상사와 다퉜다고 말합니다. 남자 얼굴 사진으로도 똑같은 실험을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 얼굴을 다시 보여주고 묻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감정적인가요? 아니면 오늘 일진이 안 좋아서인가요?"

여성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천성이 감정적"이라고 하고 남자에 대해서는 "그날 일진이 안 좋은 모양"이라고 답해요. 심지어 같은 얼굴에 머리 스타일만 바꿔서 보여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감정적 본성으로 돌리고, 남자라고 생각하면 상황에 따른 반응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니까 감정에 대해 우리는 스테레오타입을 갖고 있는 거지요. 그런 스테레오타입이 우리의 지각을 이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행동을 보면 남녀 간에 감정적 차이의 강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주 감정적인 여성이 일부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성도 아주 감정적인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아동과 동물 감정에 대해서도 쓰셨지요.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는 감정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아이들은 (감정 이전 단계의 느낌인) 정동(affect)을 갖고 있지요.

-단지 정동일 뿐인가요?

정동으로도 충분합니다. 쾌감을 느끼고 고통을 느낍니다. 기분이 고양되기도 하고 아주 평온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정도의 느낌을 갖습니다. 하지만 (커서 갖는 감정인) 분노나 슬픔이나 두려움이나 역겨움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경험하지만 아이들 자신은 그런 감정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감정의 개념을 학습하기 전까지는 모릅니다.

-감정 개념도 학습을 한다는 거지요? 말을 배우는 데서 시작되나요?

개념을 학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복잡한 개념들은 학습하려면 단어나 상징이 필요합니다. 아기들은 태어난 직후에는 얼굴을 얼굴로 알아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얼굴은 통계적인 규칙성을 갖고 있습니다. 눈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고 눈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코도 입도. 맨 위에는 머리카락, 양 옆에 귀. 이처럼 엄청난 규칙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규칙성 중의 몇 가지만 갖고 있는 무엇을 보기만 해도 얼굴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범주의 경우 그런 정도의 규칙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언가가 우리 정신 안에서 그것들을 한데 묶어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단어들이 하는 역할이고 말의 목적입니다. 아기들이 단어를 개념 형성의 도입부(invitaion)로 활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많습니다.

-그러면 동물은 어떤가요?

모든 동물, 심지어 작은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도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추상적인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범주는 단지 어떤 기능적인 목적을 위한 유사한 것들의 모음입니다. 개념은 그런 것들의 표상이지요. 따라서 모든 동물은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감정적 개념은 갖고 있지 않나요?

인간끼리 뜻하는 방식의 감정 개념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아직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른 감정 개념을 갖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질문은 해본 적이 없고 따라서 우리는 모릅니다. 침팬지조차 우리만큼 추상적인 정도의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르다(climb)'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면, 뱀도 원숭이도 표범도 오르는 것이 뭔지 압니다. 뱀도 표범도 원숭이도 나무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세 동물은 '오른다'는 것이 무언지 이해합니다. 세 동물이 오르는 방식은 아주 상이하지만 말이지요. 그게 얼마간의 추상입니다. 약간의 추상이지요.

하지만 침팬지도 사회 계서에서 오른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 정도의 추상적 능력은 침패지가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동물의 개념 인식은 답이 열려 있는 질문입니다. 어떤 동물은 단연코 아주 정교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어가 얼마간 그런 것 같습니다. 코끼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개도 얼마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관찰 결과로는 그런 감정 개념이 인간의 개념과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열려 있는 질문입니다.

-반려동물을 두고 화가 났다거나 슬프다는 표현을 곧잘 쓰는데요.

우리가 아는 것이나 우리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추정을 하는 거지요.아기에게서도 감정을 봅니다. 아이들은 이불이나 장난감에서도 감정을 읽습니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식물에서도 감정을 읽습니다.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많은 곳에서 감정을 읽곤 하지요. 우리는 서로에게서도 감정을 읽습니다.

하지만 다 추정일 뿐이지요. 우리 뇌는 과거 경험을 활용해서 "지금 이건 뭐랑 가장 비슷하지?"라고 질문하는 겁니다. 이 얼굴 표정은 뭐와 가장 비슷하지? 이 몸짓은 뭐랑 가장 비슷하지? 라는 질문을 하고 추론을 하는 거지요. 동물을 두고도 우리가 서로에게서 하는 것과 동일한 정신적 추론을 하는 겁니다.

-개나 고양이처럼 길들여진 동물은 인간 같은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다고 쓰셨지요?

고양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개는 우리에게 반응하도록 키워졌습니다. 하지만 아주 엄격히 통제된 실험 결과를 보면 개도 인간이 뜻하는 식으로 분노나 죄책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개는 분명히 아주 감정적으로 우리에게 조율돼 있습니다. 불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안이나 걱정이라 부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쉽게 고조될 수도 있습니다. 느낌이 있는 생활을 합니다. 우리와 아주 조응도가 높도록 길러온 결과입니다. 따라서 개가 얼마간의 초보적인 감정 개념을 가졌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없습니다.

-감정은 일상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셨지요.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요?

뇌가 감정을 사용하는 요소로는 크게 세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이들 구성요소들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느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옷을 갈아입듯이 감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면 감정을 많이 조절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바꾸기 위해 먹는 것, 자는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니면 산책을 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느낌과 감정도 바꿀 수 있게 됩니다.

주변 환경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주거나 업무 공간을 옮기거나 바꾸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니면 주변 환경의 세부적인 것에 대한 주의를 다르게 기울임으로써 변화를 줄 수도 있습니다. 뇌가 행하는 추론이나 예측의 길을 바꾸는 거지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면 새로운 감정의 순간을 만드는 것을 배울 수도 있고, 새로운 감정의 경험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의 것을 반복해서 연습을 충분히 하면 그것이 씨가 되어 나중에는 뇌가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약물로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어떤 약품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항우울제나 불안완화제는 몸의 상태를 바꿔줍니다. 뇌가 몸 상태를 바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감정을 만드는 요소 중 하나를 바꿀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스트레스를 낮추게 되는 거지요.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공학을 통한 감정 조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래 어떤 시점에 가서는 가능할 걸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에 반응하는 데는 한 가지 유전 코드만 작동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아무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는 유전 공학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자칫하면 큰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분이 안 좋게 느끼는 것이 우리에게는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유전공학으로 감정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원리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아주 유전성이 높은 감정적 특징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유전자들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대응하는 어떤 하나의 유전자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일군의 유전자 조합이 작용합니다. 실제로는 어느 하나의 조합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특징을 산출할 수 있는 유전자 조합이 복수로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유전자 집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유전자만 작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유전자의 작동 스위치를 켜고 끄는 환경이 있습니다. 따라서 유전공학을 통한 감정 개선이 원리상으로 가능한가? 원리 상으로는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실제로는 지금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예측가능한 미래에 가능할 걸로 보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람을 유전공학적으로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세계에 대한 반응성을 높이거나 낮춘다? 보다 긍정적으로 느끼도록? 하지만 부정적으로 느끼거나 긍정적으로 느끼는 데는 각각 어떤 기능이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감정을 설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감정적 프로필을 목표로 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이 보다 기능적인 것인지 모릅니다.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것들이 기능적으로 작동합니다. 무엇이 최선의 방법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행복은 여러 감정의 복합체라는 뜻인가요?

많은 철학자들이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한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삶입니다. 의미 있는 삶이 언제나 행복한 삶은 아닙니다. 행복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주 많습니다. 불편할 수도 있는 것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사람들이 오래 건강을 유지하고 만족도도 높은 것을 봅니다. 때때로 행복한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늘 행복하기만 한 것이 만족스러운 삶을 만들어주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감정적인 로봇을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감정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로봇 말인가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유행하는 생각일 뿐입니다. 엔지니어들은 로봇이 보다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말하지요. 물론 감정은 인간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감정의 기초가 되는 느낌인) 정동은 인간 존재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어떤 문화권에서는 우리와 같은 방식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을 때, 감정이 인간 일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러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그들도 인간입니다. 감정은 인간의 일부이고 정동도 인간의 일부입니다. 다시 말해 신체 내의 그런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은 인간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저의 추측으로는 만약 로봇을 보다 인간처럼 만들고 싶다면 뇌와 같은 신경망을 부여해야 합니다. 뇌의 신경망은 물리적 신체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통제하기 위해 작동하는 거지요. 지금 로봇은 물리적 신체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동시에 시스템 전체를 통제하는 뇌만 있으면 됩니다. 신체라는 것은 동시에 균형을 계속 유지하도록 작동하는 생물학적 시스템입니다. 원래 뇌가 출현한 이유가 그런 시스템 유지 기능 때문입니다.

뇌는 원래 무엇을 보거나 생각하거나 심지어 느끼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체의 다양한 시스템을 균형 있게 유지해서 '신체 예산(physical budget)'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에너지를 소모하고 흡수하는 비율을 균형을 맞추는 거지요. 효율적인 신진대사의 관리가 뇌가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로봇이 인간처럼 되게 만들고 싶다면 그런 것을 해야 하는 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질문을 드린 이유는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로봇과 같이 생활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감정의 공유일 것이고 현재 개발자들이 숙제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네. 서로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느낌(정동)을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감정은 그것을 위한 한 가지 방법입니다.

-'신체 예산'을 이야기하셨지요. 부연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신체 예산이라는 아이디어는 뇌가 하는 일에 대한 메타포일 뿐입니다. 기술적 용어로는 'allostasis'입니다. 거창한 단어여서 일반 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 쓴 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신체에는 끊임없이 균형을 유지해야만 하는 시스템들의 다발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물, 염분, 글루코스, 이런 모든 것들이 몸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때로는 한 시스템에서 좀 더 많은 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다른 계통에서는 염분이 더 필요할 때도 있고요. 칼륨이 필요할 때도 있고요.

칼륨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줄 작은 시계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저 몸 상태에 모든 게 문제 없다거나, 어떤 게 잘못됐다거나 보정이 필요하다는 신호로 기능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정동입니다.

뇌는 마치 회사의 재무담당부서 같다고 보면 됩니다. 몸에는 많은 부서가 있고 모두가 함께 균형을 맞춰야 할 예산이 있습니다. 어떤 부서가 더 많이 지출해서 적자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관리 부서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뇌가 신체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모든 계통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려는 거지요. 지출한 것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겨서 무엇이 보충돼야 하는지 알도록 하기 위해 애쓰지요.

그 결과 뇌는 신체 예산이 균형을 유지하면 "편안하다"고 경험합니다. 균형을 잃게 되면 어딘가에 적자가 났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불편함으로, 결국에는 괴로움으로 느끼게 됩니다.

-구성된 감정 이론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과거 우리 모두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것은 우리가 환경에 맞춰 신경회로를 구성해가는 뇌를 갖고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는 성인의 두뇌를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충분히 조형되지 않은 뇌를 갖고 태어 납니다. 그런 뇌는 스스로 회로를 만들어갑니다.

-스스로요?

네.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 맞춰서 만들어갑니다. 어린 아이일 때 뇌는 주변환경에 맞춰 신경회로를 만들어갑니다. 자신이 속한 문화의 개념과 관행을 학습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중 일부는 다른 문화권과도 일치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좀 더 학습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인간 두뇌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뇌에 대해 신경회로를 형성하도록 합니다. 서로의 신경계를 규제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동일한 부분들을 갖춘 하나의 인간 본성을 갖는다는 것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서로 상이한 정신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동일한 감정과 인식과 지각을 가진 한 가지 인간 정신만 있는 게 아닙니다.

상이한 많은 정신이 있고, 어떤 인간 정신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 정신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서(sentiment)가 있습니다. 정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동을 모두가 감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이 각각의 신경계를 규제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속한 문화의 개념을 학습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삶의 개념도 학습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감정적으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조언을 주실 수 있나요?

신경과학자로서 이야기해야 하는 자리에서 엄마 같은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군요. 감정적인 생활을 개선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수면을 충분히 취하세요. 그리고 잘 먹어야 합니다. 운동도 충분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뇌가 신체 예산을 균형있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만들어질 기회가 줄어들 겁니다.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요즘 마음챙김(mindfullness) 수행이 아주 인기입니다. 실제로 아주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 굳이 어디로 이동하지 않고도 자기 주변에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 환경 속의 어떤 것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은 무시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방식을 보다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거리를 따라 걸어갈 때도 보도 틈 사이에 돋아난 잡초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그것만 해도 자연의 힘에 대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합니다. 대단히 평안함을 주는 느낌입니다. 자연이 아주 강력하고 경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을 걸어가면서 잡초가 있는 보도 안의 틈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잡초가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신의 눈앞에 존재하는 세계 안의 무엇에 주목함으로써 보다 나은 감성적인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새로운 단어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다른 문화권의 감정에 해당하는 새로운 개념을 학습하는 것 또한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뇌가 상이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감성 지능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그밖의 요령을 책에서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감정 개념이 우리 신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인가요?

물론입니다. 뇌의 신경회로를 보면 개념이 생겨나는 곳이 또한 우리 신체에서 여러 계통을 직접 통제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개념을 몸의 물리적 시스템을 규율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개념이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긴 시간 친절한 설명 대단히 감사합니다.

먼 길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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