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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

[미니북] 혼밥혼술이 늘어나는 이유

'울트라소셜' 저자 장대익 교수 "초사회성 인류의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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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최근 '울트라소셜'을 출간한 진화생물학자 장대익 교수 인터뷰입니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는 자유전공학부에서 진화학 및 과학철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한편 독특하게도 인간본성 및 생물철학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카이스트 공대생에서 과학철학을 거쳐 진화생물학으로 학문적 선회를 거듭하며 인간본성에 대한 탐구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남다른 이력의 학자입니다.


인터뷰는 바쁜 일정 관계로 이메일을 통해 문답을 주고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출간한 여러 저서에서는 못다 한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었습니다.

-과학고를 나와서 카이스트에서는 기계공학을 전공하셨고, 서울대 대학원에서는 과학철학에 이어 진화생물학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기계공학에서 인간학에 이르게 됐는지 소개해주시겠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 인생에서 침팬지가 이리도 중요한 존재가 될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원래 마징가 제트를 만드는 게 꿈인 공학도였지만 대학교에 들어와서 인생의 방황을 하게 됐었고, 그때부터 실존적 의미와 삶의 가치 문제에 골몰하게 됐었습니다. 그렇다고 종교나 철학의 본류로 바로 뛰어들기는 약간 겁이 났었고, 과학을 좀 했으니 과학철학으로 시작하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소위 공돌이가 대학원에 가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니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일종의 언어 장벽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각 분야마다 자신들만의 용어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열심히 읽고 토론하다 보니 곧 익숙해지더군요. 그러다가 대학 때 나를 괴롭혔던 실존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칼을 갈고 간 거죠. 철학이란 질문을 날카롭게 만드는 기술이거든요.

제게 진화생물학은 실존적 물음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고갱의 질문을 저도 똑같이 했지요.

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생물철학이라는 분야와 진화생물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면서 많은 의문들이 풀렸고 또 다른 흥미로운 질문들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교토대학교 영장류 연구소에서 침팬지의 행동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탁월한 진화학자들과 함께 지내며 배울 수 있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서울대에 부임해서는 ‘인간본성 및 생물철학 연구실’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연구실을 만들어 개념적/경험적 접근을 함께 하는 일종의 지식 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최근에는 사회성에 관한 몇 가지 초학제적 연구에 매달려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인간본성 연구소’ 같은 것을 만들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인간의 도덕성, 종교성, 정치성, 문학성, 예술성 등에 대한 초학제적 탐구를 해보는 것이 꿈입니다.

-이번에 내신 '울트라소셜'은 어떤 책이지요? 그동안 내신 책들 중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대학원 시절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진화론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독특성(uniquely human)’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다양하고 기가 막힐 정도로 어마어마한 이 자연계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내세울 만한 특성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자연계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극히 미약한 존재에 불과할 수 있거든요(가령, 무소불위의 세균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문명 같은 것을 진화시켰다는 사실이지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촌인 침팬지와 보노보만 해도 문명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개미들이 엄청난 집을 짓고 사는 것도 본능에 따른 활동 이상은 아닙니다. ‘어쩌다 사피엔스는 문명을 진화시킨 유일한 종이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심리학과 뇌과학, 영장류학이 한결같이 가리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인간이 영장류 중에서도 사회성의 측면에서 아주 특출난 존재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 뒤로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들을 섭렵하려고 노력했고, 직접 몇 가지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단순히 사회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초(ultra-)사회적 존재로 진화했다고 결론내리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도 쓰게 됐습니다.

이전 책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진화론적 탐구 일반을 소개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던 반면, 이번 책은 ‘사회성’이라는 특정 주제에 천착해 학제적 연구 성과들을 세부 주제별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동안 제가 쓴 책 중에서 구체적인 실험 내용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만, 가설과 실험 설계, 결과 등을 적극적으로 따라가면서 의미를 추출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국의 베스트셀러를 보면 쉽게 씌어진 책보다는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를 잘 짚어주는 책들이 많습니다. 저도 인간의 사회성에 대해 그런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아직 국내 독자들은 좀 어렵게 느끼는 듯합니다(물론 일차적으로 제 능력의 한계 때문이지만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말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굳이 ‘울트라'소셜이라 칭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이퍼소셜'이라는 말은 봤습니다만, 독창적으로 쓰신 개념인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찌기 <정치학>에서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규정했지요. 그 뒤로 인간의 사회성은 너무나 당연시돼 왔고, 이제는 별 감흥이 없는 화석같은 명제가 된 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이 명제의 풍부한 의미를 과학적으로 밝혀보려고 했습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영장류들도 다들 조직 생활을 하는 사회적 종들이거든요. 개미만 해도 초유기체(superorganism)라고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군집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행동생태학자들은 개미에게 ‘진사회적(eusocial)’이라는 형용사까지 붙여줍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형용사를 찾아야 했습니다. ‘하이퍼소셜(hypersocial)’도 생각해봤지만, 이 조어는 ‘과도하게 더 나아갔다’(쉽게 말하면 ‘좀 나댄다’)는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보류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의 저명한 영장류학자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의 논문에서 인간을 “초사회적 동물(ultrasocial animal)”로 표현한 구절을 보게 됐고, 이거다 싶었었습니다.

다만 저는 ‘초사회성’의 의미를 좀 더 특별하게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침팬지와 달리 문명을 만들 정도의 강력한 사회성이긴 하지만, 아직도 사람과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벽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는, 그 정도 수준의 사회성이라는 뜻에서 ‘울트라’라는 접두사를 붙였습니다.

-‘초사회성'이 왜 문제가 되지요?

‘초사회성’이라고 하면 일단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강한 사회성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남의 생각이나 행동으로부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습니다. 대세를 따르고, 연예인을 따라 하고, 책의 한 구절 때문에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존재이지요.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타인의 영향’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초사회성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장류 종들 중 가장 큰 조직을 이루고 살았야 했던 사피엔스에게 타인에 대한 민감한 성향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이런 성향은 동조 현상(‘예스맨의 탄생’)과 권위에 대한 복종 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줏대 없이 친구따라 강남 가다 망할 수 있지요. 그런 현상들을 이 책에서 ‘초사회성의 그늘’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힘들어 하는 문제들이 대개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고 보면, 인류의 사회성은 도약의 발판이자 불행의 덫인 것도 같습니다. 집단이 협력해 문명을 낳았지만 계급질서도 생겨났지요. 그렇게 보면 개인과 사회는 길항 관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울트라소셜로 심화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일까요?

어떤 생명체가 - 그것이 어떤 행성에서 진화한 것이든 -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면 초사회성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감, 협력, 이해, 배려, 전수의 수준이 문명의 역치(閾値, 문턱값, threshold value: 생물이 외부환경 변화(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 세기)를 넘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지구인의 수준은 그 역치를 이제 겨우 넘은 정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되돌아갈 수도 있을까?’ 즉, ‘욕망 충족만을 최고의 목표로 행동하는 침팬지의 세계로 퇴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곧 개봉할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는 영장류 종들 중에서 인간을 가장 포악하게 그려 넣은 것 같더군요. 하지만 영장류에 관한 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인류는 진화사에서 대규모 협력을 통해 이미 문명의 맛을 본 존재이기 때문에 야만의 세계로의 회귀(가령, 이기주의자들만으로 구성된 홉스의 '자연 상태'나 그 반대변의 전체주의 사회)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있더라도 특정 시기에 국지적으로만 일어날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책에서 우리 문명이 탄생기와 영아기, 유아기를 거쳐 사춘기에 와 있다고 비유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사춘기 청소년이 제아무리 질풍노도를 겪는다 해도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지는 않지요.

-적정 수준 이상의 사회성 과잉은 오히려 곤혹스러움이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의 이상이 현실적으로는 전체주의의로 귀결된 역사적 경험을 봐도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회주의와 전체주의를 곧바로 연결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진 않습니다. 개인의 이기적 심성을 활용한 사회주의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전체주의는 개인주의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규모가 큰 집단주의라고 해야겠죠.

최근에 한평생 개미를 연구해온 두 석학(휠도블러와 윌슨)이 쓴 ‘초유기체(Superorganism)’라는 책이 번역 출간됐습니다만, 개미의 초유기체적 사회를 사람으로 치면 어떤 유형의 사회일까요? 저는 그것이 전체주의, 즉 특정 개체나 시스템 자체를 위해 구성된 사회라기보다는 오히려 개별 구성원 모두의 적합도가 높아지는 고도의 개체주의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이 본능(instinct)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그런 본능으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독재나 전체주의는 종종 출현할 수 있고 실제 생겨나기도 했지만 영구히 지속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진화된 사회적 욕구를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뇌는 그런 억압을 회피하고 개선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조직 사회에서 생존 자체가 가능했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전체주의는 ‘사회성의 과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성의 갈취’로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진화된 공감/협력/배려/이해하는 마음을 갈취하는 심리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괴물이 바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사회성의 진화와는 다른 한편으로, 특히 근대로 오면서 '개인'에 눈뜨면서 그 방향으로 전진해 왔습니다. 개인 기본권 보장, 핵가족화를 거쳐 오늘날 싱글족의 증가, 혼밥혼술 문화 확산을 보면 그렇습니다. 과거 물리적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이제 가상공간의 편의적 소셜 라이프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회관계가 더 촘촘하고 복잡해지는 것에 비례해서 의식은 점점 개인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리한 관찰입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초연결사회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물리적 사회관계는 더 촘촘'해지고 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인간 개개인의 사회성 총량도 증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 책에 등장하는 주요 연구자 중에 옥스퍼드대학교의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사회적 뇌(social brain)’ 가설을 주창하는 분인데요, 이 분의 논지는 인간의 뇌가 커진 것은 그만큼 큰 조직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돌려서 이야기하면, 적정 규모 이상의 조직(친구 150명 이상)을 관리하다가는 뇌가 폭발하고 만다는 뜻이지요. 즉, 우리 뇌의 용량과 사회성 총량은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게 진실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비롯해 각종 소셜 미디어들이 온라인 상에서 우리의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을 소모하면, 다른 곳에서 쓸 사회 자본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성도 일종의 돈 같은 것이지요. 100만원 어치의 사회 자본이 있다고 할 때 페이스북으로 80만원을 써버렸으면, 남은 돈은 20만원밖에 없습니다.

가령, 200년 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때는 한 사람이 나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사회 자본을 쓰고 얻는 곳은 태어난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고, 앞으로는 더욱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성은 너무나 다양하고 이종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유통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네트워크에서 동일한 크기와 강도로 사회 자본을 사용할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뇌가 폭발하니까요! 뇌의 용량은 단기간에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초연결성이 심화될수록 혼밥혼술은 오히려 더 많아질 것으로 예측합니다. 요컨대 이런 변화는 개인성의 증가라기보다는 인간 사회성의 총량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책에서 지금 인류는 사춘기라고 쓰셨지요. 인간의 사회성을 인격적 성숙과 유사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배려의 진화 같은 개념을 보면 인간성도 결국에는 좋아지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인간의 도덕성(공감능력)이 동물을 비롯한 다른 종으로 반경이 넓어진다고 했지요. 하지만 사회를 보면 집단끼리의 갈등이나 대립은 별로 줄어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제 책의 에필로그에도 썼지만 강연 때마다 너무 낙관적인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인류 역사의 큰 흐름을 볼 필요가 있다고 답합니다. 과연 집단 간 갈등이 예전보다 더 많아졌을까요? 예전이 더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였을까요?

저는 역사가 그 반대의 대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디어의 엄청난 진화 덕분에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과 분쟁을 연일 생생하게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지 특성상 가까운 과거의 것을 더 오래된 과거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잘 기억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에서 논증했듯이, 인류의 역사는 자비와 연민이 증가하는 쪽으로 이동해왔습니다. 과거의 분쟁과 갈등은 더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해결되었고, 환산해보면 훨씬 더 규모의 살육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더 다양해진 것은 맞지만 우리의 공감능력이 더 퇴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300년 전만 해도 여성, 흑인, 강아지는 공감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지금 어떻습니까? 더 나빠지고 있다는 주장은 일종의 착시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적으로는 다윈 시리즈로 필명을 알리기 시작하셨지요. 다윈이 위대한 학자임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매료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다윈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말씀드릴까요. 우선 세상을 바꾼 천재 과학자 중에서 이렇게 인간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따개비라는 미물에 꽂혀 8년간 연구하고 1천 쪽의 책을 내고야 마는 집요한 인물이지만(그에게는 틀립없이 편집증이 있었을 겁니다), 동료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왜 내가 이런 걸 시작했는지 모르겠어요. 지루해 죽겠어요.”라고 푸념(?)합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18세 때 인생이 한 번 꺾였던 사람이기도 하죠.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의대에 등 떠밀려 들어갔다가 결국 자퇴하고 낙향해서 빈둥댔던 청년이었거든요. 우연히 비글호를 타게 되면서 인생이 바뀐 거지요. 너무 소심한 사람이라 논쟁을 할 때는 동료를 대신 내보내기도 했고, 20년 동안이나 자신의 이단적 사상을 발설할까 말까 고민했죠. 자녀들과 아내를 끔찍이 챙겼던 남자이기도 했구요. 이러면서 세상을 뒤흔든 혁명을 일으키기란 거의 불가능할 텐데, 그걸 해낸 사람이니 매력적이랄 수밖에요.

세상을 뜨기 2년 전까지도 책을 냈어요. 무슨 책인지 아세요? 자신의 텃밭에 살고 있는 지렁이들이 토양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탐구한 거였어요. 손자하고 같이요. <종의 기원>의 저자가 쓴 마지막 책의 주인공이 지렁이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 같았으면, ‘자연계에서 인간 진화의 의미’ 같은 거창한 주제를 다룬 역작을 썼을 것 같거든요. (또 다른 천재인 아이작 뉴턴이 말년에 요한계시록 주해서를 쓰면서 살짝 이상해진 것을 떠올려 보세요.) 이런 게 다 다윈 선생의 매력입니다.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윈에 관해 일반 대중이 오해하고 있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면?

역사학자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던 것 중 하나가, 왜 다윈이 1838년쯤에 이미 <종의 기원>의 중심 아이디어를 깨달았었는데(이게 그의 비밀 노트에 정리되어 있었거든요), 20년이 지난 1859년에야 책을 출간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왜 오래 묵혀뒀느냐는 궁금증이죠. 그동안은 “소심해서, 완벽주의자여서, 보수적이어서...”라고 답변들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연구가 나왔어요. 다윈이 남긴 메모와 편지 등으로 생애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거든요. 그들 중 ‘다윈 서신 프로젝트(Darwin Correspondence Project)의 편집장을 지낸 밴 와이(John van Wyhe)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다윈은 1838년 이후 몇 번이나 출간 기회를 적극적으로 엿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뿐이었다는 거죠. 결코 완벽주의자여서 20년을 숙성시켰거나, 너무 소심해서 원고가 든 서랍을 꽁꽁 잠가놓았던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모태 기독교 신앙에서 진화론 공부를 하면서 무신론으로 옮겨 갔다고 소개된 글을 봤습니다. 진화론과 종교적 믿음은 양립할 수 없나요?

매우 복잡한 개인적 스토리와 논리가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때 유신론과 진화론을 화해시켜 보려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만, 10여 년 전쯤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결론 내렸고, 지금도 이 입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유신 종교와 진화론은 완전히 반대 방향의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전자는 세상에 먼저 아이디어(신의 설계)가 있었고 그 설계에 따라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입니다. 반면, 후자는 그런 지적 설계 없이 지극히 기계적인 알고리즘인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인간과 같이 복잡한 생명체가 생겨났으며, 만일 신에 대한 감각이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우리 뇌가 진화한 결과라는 세계관입니다. 서로 충돌하는 세계관이지요.

지식인들 중에 과학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요(이런 입장을 흔히 ‘분리론’ 또는 ‘두 세계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 손쉬운 해결책입니다. 기독교 같은 유신 종교들을 보세요. 거기에는 삶의 의미나 지침만 들어있는 게 아닙니다. 수많은 사실적 주장들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과학도 형이상학적 전제들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두 세계에는 접점이 있을 수밖에 없고 거기서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저는 진화론이 유신론보다는 무신론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성숙한 과학 이론이라고 생각하며, 서로 충돌하는 사실적 영역에서 그동안 진화론이 압도적 승리를 기록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들과 '종교 전쟁'이라는 책도 내셨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종교가 무용한 것은 아니지만 잘 길들일 필요가 있다고 하셨더군요. 길들여진 종교에 신성함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느니 차라리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일관성이 있는 것 아닌가요?

저를 살짝 코너로 모시는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종교 전쟁>은 종교현상학자이신 김윤성 교수와 조직신학자인 신재식 교수와 함께 쓴 책입니다. 저는 거기서 과학적 무신론자로 등장합니다(물론 지금도 그런 입장입니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처럼 '전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밈(meme)의 세계에서 고삐가 풀려 날뛰는(표현이 좀 과격하군요^) 종교적 야생 관념들을 잘 길들여(domesticated) 세속적 문화의 한 갈래쯤으로 연착륙시키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게 잘되면 미래의 종교는 어쩌면 공동체성을 깊이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동아리 정도가 될 수 있겠죠?

신성(divinity)을 종교에서 찾으려는 성향도 저는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하는 종교적 경외감(awe feeling)보다 우주와 자연의 신비로움에서 오는 과학적 경의감(wonderness), 저는 이걸 추구하고 싶습니다.

-창조론이 과학 교과서에 실려서는 안 될 이유에 대한 글을 쓰셨고, 과학이야말로 오늘날 핵심 인문 교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과학의 한계나 문제는 없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느냐 않느냐가 중요한 차이입니다. 경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종교라면,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집단적인 ‘반증의 칼날’에 과감히 자신을 드러내놓는 게 과학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비밀을 다 알 수 있을까요? 알고 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신비로움이 없는 세상은 오히려 시시하지 않을까요?

일단 절대로 다 알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모르는 게 압도적으로 더 많습니다. 그러니 심심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이 쌓여도 우리 인간이 잘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저는 너무나 신비합니다.^^

내 성격이 이렇게 더럽다는 사실을 알고, 왜 그렇게 더러운지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이해했어도, 그걸 바꾸는 일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이해를 통해 행동을 개선하는 전략(이걸 흔히 넛지(nudge)라고 하죠)이 최선의 전략일 겁니다.

-원래 글쓰기에도 관심이나 욕심이 있었나요?

대학원생 때부터 잡지나 신문에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열심히 해봤습니다. 글쓰기가 주는 지적 보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타인의 칭찬보다는 나의 내적 만족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의도대로 내 생각을 스스로 표현하고 나만의 기호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율성과 유능함을 증진시켜주는 심리적 보상 체계입니다. 거기에 독자로부터 공감까지 얻게 되면 금상첨화죠.

-읽기와 쓰기와 관련해서 갖고 있는 습관이나 리추얼 같은 게 있습니까?

책을 읽을 때 서론과 결론부터 천천히 읽어보고 맨 뒤에 나오는 색인을 훑어봅니다. 본문에 가서는 저자와 다음날 대담이 잡혀 있다고 상상하고 읽어 내려갑니다(‘대담으로서의 독서’).

또 한 가지는 이 책의 내용을 학생들에게 소개해줄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읽습니다(‘전수로서의 독서’). 주도적 독서법으로는 이것만큼 좋은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속독만큼 멍청한 독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슬로우 씽킹(slow thinking)’을 위한 최적의 도구이거든요.

쓰기의 리추얼이라면... 제목을 어떻게든 먼저 써놓고 글을 써내려갑니다. 물론 문단이 늘어나면서 처음 제목이 바뀌지만, 제목 없이 시작하는 글은 완성이 계속 늦어지거나 미완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지금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중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왜 우리 사회는 가치가 다양하지 못할까? 가치가 획일화된 사회에 살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빈부 갈등, 남녀 갈등, 노사 갈등, 이념 갈등, 교육 갈등, 종교 갈등 등등, 모든 갈등이 이런 문제와 관련돼 있습니다.

인간 사회 어디에나 이런 문제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는 가치의 획일화 정도가 매우 심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심리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고, 국가간 비교도 해보고 싶습니다. 원인을 잘 찾아야 적절한 처방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가장 기대하거나 주목하는 학자는 누구입니까? 왜지요?

제 지적 관심이 상당히 산만해서 어느 누구를 깃대 위에 세우고 따라가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최근 몇 년 간은 사회심리학 분야의 연구 성과들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지적 영웅은 미국 터프츠 대학교 인지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대니얼 데닛(Daniel C. Dennett) 선생입니다. 주변에서는 이제 나이도 많이 들어 새로 나올 게 별로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분 밑에서 포스닥과 안식년을 보낸 저로서는 데닛 선생이 몸소 보여준 ‘대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은 것을 조금이나마 가까이에서 배웠다는 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학문이나 산업 분야는 어디라고 보시며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행어에 말려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날로그의 반격’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구요. 하지만 저는 이런 때일수록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들 상품과 산업에만 관심이 있지, 그걸 만들어내고 사용하고 전파하는 사람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제가 앞에서 ‘인간본성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꿈 중 하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거기서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연구한 것을 가지고 조직 혁신과 상품 개발에 응용하는 일을 돕는 것도 제가 정말 싶은 일 중 하나입니다.

-요즘 인공지능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낙관과 우려, 과장됐다는 진단까지 다양합니다.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요. 대학이나 교수직에도 영향을 줄 거라고 보세요?

인공지능에 대한 질문의 8할은 다 일자리 문제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 질문이 우리를 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냐면, ‘내 말을 들어주고 다독여주는 로봇이 개발되면 우리에게 그것은 어떤 존재로 다가올까’와 같은, 우리의 진화된 마음에 관한 질문들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인간과 기계의 교감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제 결론은 더 큰 문제가 그들(인공지능, 로봇)이 아니라 우리의 진화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대체할까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리는 어떨 때 행복한가, 불행한가, 왜 그런가, 등등을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끝으로 인간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꼭 읽어봐야 할 책 3-5권 추천해주시겠어요?

1)코스모스
2)이기적 유전자
3)내 안의 유인원
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5)사피엔스

우리 개개인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거치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법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연습한다. 그 시기를 잘 거친 개인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시민으로 성장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자신과 타인의 삶에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아동기를 큰 문제없이 잘 거쳤다고 해서 사춘기가 자동으로 잘 흘러간다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다. 인류 전체가 문명의 탄생과 아동기를 잘 넘어갔다고 해서 사춘기의 성공은 보장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종들이 감히 못한 사춘기 진입을 우리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이 사춘기 문턱을 잘 넘어 우주적으로 성숙한 초사회적 종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문턱 앞에서 자기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말 것인가? 이 엄중한 질문에 답하려면 인간 본성에 새겨진 초사회성의 비밀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울트라 소셜' 마지막 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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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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