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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북] '우리'와 '그들'을 넘어

조회수 2017. 5. 8. 09: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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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의 저자 조슈아 그린 하버드대 교수 인터뷰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도덕심리학자인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 교수 인터뷰입니다. 현대 사회의 도덕 문제를 진화심리학과 인지과학을 통해 새롭게 조명하면서 주목받는 학자입니다.


2013년에 출간한 'Moral Tribes'가 국내에도 '옳고 그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책에서 기술한 주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 후 이메일로 주고받은 인터뷰 전문을 싣습니다. 답변 중간중간에 필요한 경우 관련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그린 교수는 중고등 학교 시절부터 토론반 활동을 통해 도덕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와튼 경영대에 입학했다가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거쳐 사회심리학(진화심리학)에 매료됐다는군요.


결국 하버드대로 전학해 철학을 공부하면서 신경과학 수업도 병행하게 됩니다. 프린스턴대 철학박사 과정에서 플라톤의 '국가'부터 양자역학의 철학까지 오가며 인간 심리를 토대로 한 도덕 문제의 해법을 탐구했다고 합니다.

단순한 세포부터 인간처럼 초사회적인 동물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서 전개되는 생명의 이야기는 점점 더 복잡한 협력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협력은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동시에 협력은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고, 도덕성은 이 도전에 대한 인간 뇌의 응답이다.


도덕에 관계된 심리적 장치들은 그렇지 않았으면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개인들 사이에서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협력적인 뇌를 갖고 있는 것은 궁극에는 협력이 제공하는 물질적 혜택 때문이다. 유전자가 더 많이 복제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자원이 협력을 통해 제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선함은 진화의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도 같다.


나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개선하면 평화와 번영을 향한 전망이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경합하는 도덕적 부족들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해줄 수 있는 세계적 차원의 조리 있는 도덕철학이다.


<도덕의 존재이유>


인간은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 간의 불일치를 극복하고 협력을 바탕으로 사회를 이루면서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종이 되었다. 도덕은 협력의 기제로 진화했다. 도덕성은 이기적인 개체들이 협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심리적 적응물이다. 그 핵심이 이타심인데 타인의 이익을 위해 개인적 손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뇌는 '집단 내' 협력을 위해 진화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집단들 사이 협력에는 이르지 못했다. 집단 간 경쟁을 넘어선 보편적 협력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협력은 그 자체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생존의 이점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어져왔다. 협력의 진화를 위해서도 경쟁은 필수적이다. 협력은 협력 성향을 지닌 개체들이 그렇지 않은 개체들보다 경쟁적 우위를 지닐 때 비로소 진화한다. 따라서 도덕성은 단순히 '나'보다 '우리'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우리'를 앞세우는 장치로서 진화했다.


<부족주의 도덕의 한계>


그 결과 현대의 도덕적 비극은 똑같은 도덕적 사고가 한 집단 안에서는 협력의 기초가 되지만 집단들끼리는 협력에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도덕성이 보편적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집단 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장치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모든 협력적인 집단은 자신들이 이용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그들'로부터 '우리'를 구별하는 능력과, '그들'보다 '우리'를 선호하는 성향이 발달했다. 내집단 편향(자신이 속한 집단 성원들을 편애하는 경향)과 민족중심주의(다른 민족을 배척하려는 경향)는 모든 문명에서 관찰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집단 내보다 한 수준 위에서 작동하는 도덕성이다. '상반된 도덕'을 지닌 집단들이 함께 살고 번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고이다. 서로 다른 도덕적 이상을 지닌 집단들 사이의 불화를 해소할 수 있는 도덕 체계가 고차 도덕(meta-morality)이다.


우리는 그동안 '옳다고 느껴지는' 보편적 도덕원리를 찾아왔다. 그런 것은 없다. '옳다는 느낌'은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 안에서는 작동할지 몰라도 그 이상의 수준(상이한 집단 사이)에서는 작동할 거란 보장이 없다.


<도덕적 판단을 위한 나침반>


하나는 전통적인 것으로 신, 이성, 과학 같은 특정 종류의 독립적인 도덕적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함께 묶는 동시에 서로 갈라놓는 여러 가치들과 신념들의 혼돈 속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다른 하나는 공리주의, 내가 새롭게 명명한 '깊은 실용주의(deep pragmatism)' 전략이다. 공유된 가치들 속에서 일치되는 부분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어떤 독립적인 도덕적 권위에 호소하는 대신, 경험을 토대로 경합하는 가치들을 비교 평가하기 위한 공통의 기준을 추구한다.


우리는 이성적 추론을 사용하면 '가슴'들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차이를 넘어 '머리'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실제로 처한 곳에서부터 합의를 추구하는 것이 깊은 실용주의의 핵심이다.

-현재 하버드 도덕인지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하고 있는 것은 뭐지요?

도덕성에 관해, 갈등 해소에 관련된 더 많은 응용 프로젝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기계 윤리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우리 연구소의 대부분은 '생각의 언어(Language of Thought)'의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뇌가 사고를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개념들을 합치는지, 그리고 상상과 추론 과정에서 생각들은 어떻게 조종되고 변형되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신경과학으로 옮겨갔다고 책에 쓰셨더군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도덕 철학은 우리의 도덕적 사고에 대해 더 잘 이해하지 않고서는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철학적 교착 상태를 깨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덕적 직관이 갖고 있는 한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도덕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 저는 신경과학의 방법을 사용합니다만 그보다 낮은 수준의 기술을 사용한 실험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판단과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하는 실험들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거지요. 제게 신경과학은 그것에 이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일 뿐입니다.

-이번에 번역돼 나온 책 '옳고 그름'은 어떻게 쓰게 되셨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제가 성인이 된 후로 내내 이 책에 관한 작업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교 학부생 시절부터 도덕적 판단에서 감정과 이성적 추론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학부 졸업 논문 주제가 '도덕 심리학과 도덕적 진보(Moral Psychology and Moral Progress)'였습니다.

그게 20년 전 일입니다. 그 주제는 결국 내 박사 학위 논문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학위 논문에서 시작된 결과물입니다. 물론 대학원 시절과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10년 사이에 내용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기는 했습니다.

좀 더 넓혀서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제가 몰두해온 작업은 우리가 도덕적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그리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우리의 도덕적 사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 더 잘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더 나은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것이 저의 희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도덕 심리학)적 이해만 가지고 도덕적 문제에 대한 모든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과학적 이해가 우리의 직관적인 도덕적 사고의 한계를 충분히 감안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사고를 개선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합니다.

저의 작업은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정신에 상당 부분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제 책을 (두 사람이 공저한 책인 'Thinking: Fast and Slow'과 비교해) '도덕적 사고: 빠른 기제와 느린 기제(Moral Thinking: Fast and Slow)'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를 빠른 직관과 느린 추론으로 구분하면서 주목받은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저서는 국내에는 '생각에 관한 생각'으로 번역됐다.

-원 제목이 '도덕적 부족(Moral Tribes)’입니다. 어떤 뜻으로 쓰셨나요?

'부족'이라는 단어로 제가 말하려고 한 것은 서로 공유하는 도덕적 세계관, 그러니까 옳고 그름에 대한 자기들 나름의 직감을 갖고 있는 집단을 말합니다. 부족은 말 그대로 소규모 민족 집단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큰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 중 다수는 복수의 부족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개의 사회적 동심원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구성된 사회적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에게 더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저는 '부족주의(tribalism)'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뇌는 부족주의를 추구하도록 조직돼 있습니다. 세상을 직관적으로 '우리'와 '그들'로 나누고 '그들'보다 '우리'를 선호합니다. 다만 뇌는 경험과 적극적인 학습을 통해 재조직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도덕적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고차도덕(meta morality)'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지요?

고차도덕이란 오늘날 도덕 문제를 풀기 위해 한 수준 높여 생각하는 철학적 해법을 말합니다. 도덕(morality)이란 본질에 있어서, 대체로 이기적인 개인들이 한 집단으로 협력해서 살 수 있고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진화한 체계입니다. 즉 '나(Me)'들이 모인 집합을 '우리(Us)'로 전환하는 문제를 푸는 체계입니다.

고차도덕도 같은 일을 합니다. 다만 그보다 높는 수준에서 그런 일을 합니다. '우리(Us)'의 집합을 더 큰 '우리(US)'로 전환하기 위한 체계입니다.

도덕의 기본적인 문제는 이기심 대 도덕성-'나(Me)' 대 '우리(Us)'에 대한 것입니다. 현대의 도덕 문제는 그보다 더 복잡합니다. 어떤 '우리' 대 또 다른 '우리', '우리(Us)' 대 '그들(Them)'의 문제입니다. 다른 가치와 이해를 가진 상이한 집단이 현대 세계에서 함께 지내는 것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트랙의 도덕적인 뇌를 갖고 있다고 쓰셨지요.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그게 왜 중요한가요?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빠른' 직관에 기초할 수도 있고, '느린' 추론(reasoning)에 기초해서 내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둘의 구분이 중요한 것은 직관은 어떤 종류의 문제를 다루는 데 아주 뛰어난 반면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나쁘기 때문입니다.

좋은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우리는 언제 우리의 직관을 믿는 것이 좋고 언제 그런 직관을 잠시 미뤄두는 것이 좋은지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언제 우리의 이성을 신뢰하고 언제 미뤄둬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 대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직관이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대 그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사고의 투 트랙>


인간의 뇌는 자동 설정과 수동 모드를 함께 지닌 듀얼 모드 카메라와 같다. 카메라의 자동 설정은 '인물사진' '활동사진' '풍경사진' 같은 전형적인 활영 상황에 맞게 최적화돼 있다. 사용자는 버튼만 누르면 된다. 수동모드는 사용자가 모든 설정을 직접 조절하는 것이다.


자동 설정은 매우 효율적이지만 융통성은 없다. 수동 모드는 정반대다. 둘을 합치면 양쪽의 최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려면 언제 자동 설정으로 찍어야 할지, 언제 수동으로 조절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고차 인지능력이다.


우리는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자동 설정이 지닌 효율성과 수동 모드가 지닌 융통성 둘 다에 의존한다. 이러한 인간의 뇌의 이중처리 능력에 대해서는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 잘 나온다.


우리는 흔히 감정과 이성으로 구분해서 이해한다. 감정은 기능적으로 봤을 때 자동적인 과정이다. 감정적 반응의 구조는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들을 체화한 결과이다. 감정은 즉각성으로 행동의 효율성을 높인다. 추론(reasoning)은 통제된 인지 능력이다. 의사결정 규칙을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행위이다.

-갈등의 해법으로 '깊은 실용주의(deep pragmatism)'를 제시했습니다. 무엇이며, 왜 최선의 해법이라고 생각하나요?

제 생각은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리가 갖고 있는 한계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입장은 모든 도덕적 판단을 '권리'의 문제로 만들려는 도덕적 관점과 대비됩니다.

흔히 '권리'라고 부르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우리 감정을 합리화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도덕 부족들 간에 진정으로 합의에 이르는 진지한 논의를 하고 싶다면 권리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리들은 우리의 감정을 가릴 뿐입니다. 그러나 '권리들'은 단지 아주 요긴한 심리적 무기이자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사고에 참여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하지는 않고 사람들의 심리적 동기에 호소하려고 할 때 특히 그렇습니다.

'깊은 실용주의'에서 '깊은'은 보다 큰 선을 증진하기 위해 깊이 헌신한다는 것을 담은 말입니다. '실용주의'는 인간 본성의 실체에 대한 세심함을 반영합니다. '깊은 실용주의'는 단순한 공리주의를 좀더 '현명하게' 적용한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공리주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은 실용주의'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당신은 '보편적 도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도덕적 공동통화(moral common currency)'를 '우리'와 '그들' 사이의 가교로 제시했습니다. 도덕적 공동통화란 무엇이고 어떻게 발견할 수 있나요?

우리의 가치들은 인간이 갖는 경험의 질에 거의 모두 관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시작해서, "왜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계속해서 끝까지 질문해 파고들어 가다 보면, 거의 언제나 인간(혹은 동물)의 행복과 고통에 대한 사실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공동통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각자의 행복(그리고 고통의 제거)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합의한다면, 각 사람의 삶의 질이 동등한 무게가 있다고 전제했을 때, 경쟁하는 부족들의 가치 사이에서 흥정(tradeoff)를 위한 공통 기준을 도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완벽한 해법은 아닙니다. 아주 불편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나은 해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분쟁이 다수결에 의해 해결돼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수결이 반드시 더 나은 선을 증진하지는 않습니다. 다수결은 폭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을 무엇으로 측정하나요?

'행복'이라는 말로 어떤 신비로운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의 행복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X' '네가 생각하는 행복은 Y'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는 '실질적인 경험(positive experiences)'과 같은 무엇을 뜻합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행복의 개념들이 공통으로 포함하고 있는 실제적인 무엇입니다.

저는 행복이 모든 사람의 개인적 목표가 돼야 한다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동안 나온 연구 결과나 상식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조언에 따르면 자신의 행복을 목표로 삼는 것이 행복해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저는 (치우침없이 가치평가된) 행복은 서로 경쟁하는 가치들 간의 흥정을 위한 최선의 기준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두 정책들 사이에서 결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려운 판단에 수반되는 모든 불확실성을 감안하되, 인류의 행복에 전반적으로 최선의 효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부족의 도덕을 이상적인 가치와 혼동하는 사람보다 위선자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인간이 낫다고 썼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우리 인간은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부족적입니다. 본질적으로 집단 수준에서 이기적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에 대한 한 가지 반응은 우리의 이기적이고 부족적인 성향을 한사코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것은 우리가 불가피하게 우리 이상에는 미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덜 이기적이고 덜 부족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저는 불완전한 존재(우리의 도덕적 위선들)가 아닌 척하기보다는 그런 불완전함들(failures)을 인정하고 그런 점을 제한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같은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 교수를 책에서도 언급하셨지요. 그가 방한했을 때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덜 독단적이고 덜 위선적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안고 있는 도덕적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썼지요. 왜 그런가요?

우리가 더 사이좋게 지내려면 우리는 모두 덜 독선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중의 거의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나아가 우리가 서로 다른 도덕적 직관을 지닌 서로 다른 문화적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도덕적 합리화를 간파하는 데는 매우 뛰어난 반면에 우리 자신의 합리화를 깨닫는 데는 그렇지 못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덜 위선적이고 더 타협적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중에서

조너선 하이트 인터뷰 바로가기

더 개방적이고 덜 독선적인 태도는 도덕적 문제의 해결을 촉진하겠지만 그것 자체가 해결책은 못 됩니다. 중요한 첫걸음은 될 수 있지만 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절충주의가 답은 아닙니다.

확실한 실수를 피하는 데는 도움은 주지만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차도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고차도덕은 경합하는 부족적 가치들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결과의 균형점을 찾는 것입니다.

-공동체주의 도덕철학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가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그의 도덕 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샌델 교수는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실질적인 도덕 이론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문제에 대한 접근법(approach)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샌델 박사는 도덕 공동체가 서로 간의 차이들을 일종의 이성적 도덕적 협상을 통해 해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협상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이론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글로벌 도덕 철학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샌델보다 낙관적인 이유는 과학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학이 우리 직관적 사고에서 한계를 이해하고 합의점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샌델은 과학이 도덕과는 대체로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도덕철학 비판>


서양 철학자들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식의 위대한 수호자이다. 그는 어떤 급진적인 도덕적 견해나 공식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게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란 복잡한 균형 잡기인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지속적인 습관과 기술이 '덕(virtue)'이다. 좋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명시적인 원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실천의 문제일 뿐이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도출한 몇몇 교훈들은 모든 도덕 부족의 성원들이 배울 만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부족들 사이의 불일치로 규정된 현대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진 못한다. 한 부족의 덕이 다른 부족에게는 악덕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그럭저럭 처리하는 상대주의자나 허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이성적 추론을 통해 자기 부족의 도덕을 보편 준칙으로 정당화하려 할 수도 있다. 이게 칸트가 한 일이다. 하지만 합리화를 논증이라고 착각했다. 그 누구도 도덕적 주장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

-도덕을 논할 때도 우리의 무지를 인정할 때 더 현명해질 수 있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도움이 된다고 하셨지요? 왜 그런가요?

깊은 실용주의자로서 저는 도덕을 이야기할 때 어떤 권리나 덕스러운 품성에 대한 모호한 추상화보다는 더 큰 선을 증진할 가능성이 높은지 아닌지에 대한 사실들에 우리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원인과 효과의 사실관계들은 종종 복잡하고 종종 불확실합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훨씬 나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무작정 확신하기보다는 교육된 추측 위에서 행동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더 나은 결과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꾼>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는 옳고 그들은 그른 측면들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증거를 평가할 때도 편향이 무의식적으로 끼어든다. 사람들은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를 때도 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왜 생겼는지 애매한 경우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작화증(confabulation)이다. 도덕 문제에서 작화증은 합리화로 나타난다. 자신의 행동을 해석하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면 더 현명해질 수 있다. 정치인들과 평론가들에게 어떤 정책을 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지 묻는 대신 그정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먼저 설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좋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관련 사실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기회를 제공하면 사람들은 더 온건한 입장을 갖게 된다.

-권리와 의무는 현대 도덕 논쟁을 위한 완벽한 수사학적 무기라면서 경계했지요. 왜 문제가 되지요?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강한 도덕적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리들에 관한 선언적인 주장들을 편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전략으로는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나쁜 철학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이성적 방법으로 우리의 도덕적 불일치들을 풀어가고 싶다면 우리는 '권리들'이라는 매력적인 겉옷 안에 우리의 감정을 담아 좋게 꾸미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권리를 앞세우면 타협이 어렵다>


오늘날 도덕을 '권리'의 문제로 보는 사람이 많다. 누가 어떤 권리를 가지는지, 어떤 권리가 다른 권리보다 우선하는지를 따진다. 하지만 이성만으로는 우리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권리가 다른 권리보다 우선하는지 알려줄 수 없다. 모든 이성적 사고는 자명한 전제를 필요로 한다.


오늘날 도덕적 논쟁에서 권리와 의무론은 정당화의 무기로 사용된다. 권리에 기댄 주장은 지적 토론이나 설득의 노력 없이 직감을 합리화할 뿐이다. 권리 의무에 기댄 '명령'은 타협불가능하게 만든다. 막다른 길과 다름없다.


물론 권리는 공통의 도덕적 약속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통성이 보편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덕적 분쟁이 이미 해결된 상황에서만 권리에 호소할 수 있다. 권리는 이미 이뤄진 도덕적 진보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나, 논증이 통하지 않을 때 도덕적 진보를 밀고 나가기 위한 수사적 도구로 사용된다. 상대를 진심으로 이성적으로 설득하려 한다면 권리의 언어를 되도록 피해야 한다. 권리에 관한 감성적 주장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반면에 공리적 합리화는 증거에 근거해서 정당화돼야 한다.


결국 우리는 부족적인 도덕적 감성에 의지하거나 그것을 합리화하는 대신 공동 통화의 체계를 사용해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들 속에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도덕 철학은 도덕 심리의 표현(manifestation)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지요?

도덕철학은 훨씬 크고 깊은,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인 빙산의 지적인 귀통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도덕 철학은 정신의 산물인데,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 그리고 개인 경험의 산물입니다. 만약 어딘가에 영원한 도덕적 진리(Moral Truth)가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그것을 감지하기 위한 합의된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대신에 우리는 도덕적 가치들을 우리의 생물학적, 문화적, 개인적 역사를 거치면서 생겨난 복잡한(messy) 산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가치들에 어떤 질서를 부과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질서는 우리로부터, 그러니까 어떤 초월적인 곳으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두뇌의 보다 질서잡힌 부분들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극우 성향의 민족주의가 최근에 다시 힘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 역시 시대착오적인 부족주의라고 보시나요?

그렇습니다. 부족주의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것이 과거의 유물에 지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부족주의는 우리 인간 본성에 깊게 자리잡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제한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자리에 그 이상으로 보상이 되는 무언가를 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족주의적이 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번영의 혜택을 보다 넓게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가 점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양극화하면서 타협의 중간지대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말했듯이, 사람들에게 부족주의보다 나은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자기 기반을 잃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엘리트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힘이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뒤처진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념 선동가들이 사람들을 항해 그들의 문제가 '그들', 다른 부족 사람들이나 자기 부족 내부의 반역자들 때문에 생긴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족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는 부족이후(post-tribal) 세계 질서 속에는 그들에게 좋은 지위가 마련된다는 사실을 믿도록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렇게 되도록 실현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진보, 심지어 도덕적 진보를 믿는 것 같더군요. 무슨 근거에서입니까?

스티븐 핑커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유, 교육, 보건, 부 등 거의 모든 지표를 봤을 때 세계는 전반적으로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혜택들이 그렇게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쫓아가느라 허덕이고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있는데 중간의 사람들은 점점 기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를 대단히 불안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결과 트럼프의 당선도 나왔고, 그것이 예컨데 (가정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전쟁을 초래할수도 있습니다.

-신경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신비로운 아우라'를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 존재와 삶의 '마지막 비밀'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마지막 비밀'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의식에 관해서는 물질주의와 비환원주의 사이에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입장인가요?

초자연적인 어떤 것은 믿지 않습니다. 행동이나 경험에서 비물리적인 어떤 원인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그 모두를 이해할 것으로 희망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의 정신이 모든 이야기를 이해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가능해 보입니다. 두고봐야겠지요. 어느 쪽이 됐든 우리는 노력을 통해 더 많이 배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공리주의 혹은 깊은 실용주의가 해법>


집단 간에 도덕적 갈등이 생기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거나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도덕적 관점 밖으로 나오질 못하기 때문이다. 수동모드로 전환해야 한다. 판단의 근거로 경험의 질이 중요하고 공평성이 도덕의 핵심이라면 이 둘을 수동모드로 결합한 사고가 공리주의다.


도덕적 공동 기반으로 공리주의는 다음을 전제로 한다. 첫째 우리 모두가 행복과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 우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공평성의 이상은 일종의 지적 깨달음에서 나온다. 공평한 해결책이어야 안정된 결과를 낳는다는 깨달음이다. 두 전제를 합친 결과 공리주의는 모두의 행복을 똑같이 중시하는 가운데 세계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철학이다. 


공리주의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나은 결과를 위한 행동을 융통성 있게 추구한다. 결과를 최적화한다. 행복을 공평하게 최대화하는 공리주의는 집단 도덕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고차도덕이 된다.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우리의 바로 주변 사람들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의 도덕적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인간적으로 가능한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시작은 자신의 부족적 신념에 기꺼이 의문을 제기하려는 태도다. 우리를 갈라놓는 부족적 감정들을 옆으로 제쳐놓고 무엇이든 전체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을 해야 한다. 무엇이 최선인가? 각 개인의 삶의 질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는 가운데 우리 경험을 최대한 좋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경험 사실 관계의 논증에 대해 과학이 개입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칸트는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에 경탄했지만, 내가 더 경탄하는 것은 우리 가슴 속에 새겨진 법칙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더 나은 무언가로 대체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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