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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

[미니북] 나는 왜 조선의 여성을 파고들었던가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 "똑똑한 큰 누이가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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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의 [미니북]은 손바닥 안의 책 한 권입니다. 화제의 저자 인터뷰를 비롯한 긴 호흡의 글을 전합니다.


오늘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입니다. 강 교수는 국내 한문학자들 중에서도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서 걸어온 학자로 족적이 뚜렷합니다.


일찌기 조선을 왕조나 지배층 중심에서 봐오던 시각에서 벗어나 여성을 비롯한 중인, 기생, 무당 같은 사회 약자 내지 하위층의 삶에 주목하는 한편, 민족주의에 기초한 일제강점기 하의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해왔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 역사 속의 책과 지식 문화에 관한 연구와 저술도 꾸준히 병행해 왔습니다.


여러 갈래로 뻗친 그의 학문적 가지가 어떤 문제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어디를 거쳐 어디로 향하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러가지를 주제로 한 책을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죽음에 관한 제의와 문학의 역할에 대한 저술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인터뷰는 온돌방처럼 좌식으로 개조된 그의 부산대 연구실에서 진행됐습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이라는 책은 참 독특합니다. 어떻게 쓰게 되셨지요?

내 학문적인 관심이 좋게 말하면 넓지만, 있는 대로 말하자면 잡다하지요. 사실은 여성사나 여성 문학에도 일찍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열녀의 탄생>이라는 책도 10년 가까이 집필해서 내기도 했습니다.

-10년 가까이라면 어디에 연재를 하셨던 건가요?

아니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한 작업이었어요. 물론 그 사이에 다른 책도 썼지만. 그 책에서 한 얘기는 결국 이런 겁니다. 남성 사족(士族)이 조선을 건국한 후 여성을 통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 여성들 머릿속에 남성이 원하는 생각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성은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된 존재라는 점을 깊이 심어주고 그럼으로써 그것이 침범 받을 때 스스로 목숨까지 버린다, 이런 생각을 집어넣은 거죠. 그걸 밝히는 데 한 10년이 걸렸어요.

그 작업을 마치고 나니까 의문이 생기더군요. 남성이 여성을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재단해 왔다면 여성은 그저 남성이나 남성 권력에 재단되기만 했던 존재인가? 그럴 순 없잖아요. 그럴 경우엔 인간의 주체가 사라져버리니까. 그렇다면 여성은 그런 남성의 권력 집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저항하고 대응했던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사례를 찾아봤는데 참 드물었어요. 계속 실록과 자료를 보다 보니까 신태영이라는 여성이 이혼소송 사건에 연루된 게 있더군요. 이 사건을 미시사적인 방법으로 다뤄서 여성이 소수자로서 남성 권력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저항하고 대응해왔던가를 써봤어요. 그게 이 책입니다.

-그 이혼소송 사건은 새로 찾아내신 건가요? 아니면 이미 알려진 것을 새로 해석하신 겁니까?

내가 쓴 대로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된 적은 없었어요. 그냥 악녀로만 알려져 있었지요. 물론 여성사 하는 분들은 신태영이라는 인물이나 이혼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는 있었죠. 학문적으로 엄밀하게 따진 것은 아니었어요. 재작년인가 3년 전쯤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제가 논문으로 보고를 했어요. 그 다음에 책을 냈는데 그 중간에 어떤 분이 논문을 썼더군요. 읽어보니까 상세하진 않아요. 그전엔 조선왕조실록을 가지고 주로 이야기했는데 이번에 책을 쓰면서는 <승정원일기>라든지 <비변사등록>이라든가 문집에 있는 자료들도 깡그리 뒤져서 썼습니다.

사건을 본 관점도 달라요. 악녀로 본 게 아니라, 여성이 가부장제 속에서 어떻게 남성 사족의 권력 집행에 적응하고 대응했는지 살펴보려는 입장에서 썼어요. 그리고 여성에 대한 책은 또 한 권이 있어요. <그림으로 보는 조선 여성의 역사>라고 해서, 합쳐서 세 권을 쓴 셈이죠.

-여성 연구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니구요?

워낙 여러 가지를 동시에 연구하다 보니까. 원래 처음엔 우리 한문학을 연구하기로 하고 대학원 석사 과정에 가긴 했는데... 학부 때 부산대 국어교육과를 나왔는데 거기선 한문학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전부 한글로 된 국문학을 가르치고 한문학은 거의 안 가르쳤어요.

하지만 실제로 우리 문학 유산에서 한글로 된 것은 얼마 안 돼요. 아무리 빨라도 훈민정음 창제 이후란 말이죠. 그전으로 올라가서 고려가요라고 해도 몇 수 안 되고, 더 올라가도 신라 향가 몇 수밖에 안 되니까. 반면에 한문학은 고려시대만 해도 상당한 양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는 굉장히 많아요. 학부생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문학의 주류는 국문 문학이 아니고 한문학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문학을 공부하겠다면서 대학원을 간 거죠.

제가 부마항쟁 세대예요. 79년에 부마항쟁이 났는데 대학 3학년이었어요. 그때 나로서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어요. 그때가 유신 말기인데. 뭔가 막연히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내 머리가 사회과학 쪽은 아닌 것 같았어요. (웃음)

그래서 내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분야인 고전문학, 관심이 가는 한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해서 대학원엘 갔는데. 그때도 사족, 그러니까 양반들 한문학은 구미가 안 당겼어요. 그래서 중인을 선택했어요. 여항문학이죠. 창작과비평에서 첫 책을 냈는데 <조선후기 여항문학연구>라고 해서 주로 중인들 문학이었죠. 지배자의 문학보다는 피지배자들의 문학,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 뒤에 나온 저술들도 대개 그런 식으로 나왔죠.
<열녀의 탄생>의 경우에도 후기에 짤막하게 썼는데, 결국 우리 집안에 있었던 일이었어요. 큰 누님이 상당히 똑똑한 여자였는데 집안의 남형제들과 비교해 봐도 굉장히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큰 누나는 대학에 안 보냈어요. 그때 괜찮은 대학에 합격했는데도 남동생 위해서 희생하라면서. 남자 형제는 중학교에 보내면서 말이죠. 초등학교 때 그걸 봤는데 굉장히 이상한 거예요.

어머니를 기억해보면, 일제시대에 외조부 따라서 후쿠오카에 살다가 해방 후에 귀국했는데 그때 어머니 보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하나코(당시 일본식 이름)야, 조선에 들어가지 마라, 가봐야 나라가 두 조각 나고 너는 공부도 못하게 될 거야" 라고 했대요. 우리 어머니가 공부를 잘했나 봐요. 그러니까 "너는 머리도 좋고 똑똑하니까 일본에 남아 있으면 공부시켜 줄께" 라고 말했다는 거지요. 일본인 교사가 보니 똑똑한 아이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까웠던 거죠.

-나라가 조각난다는 것은 남북 분단 이야기한 건가요?

그렇죠.

-그때 그걸 내다봤다는 이야기네요?

일본인 선생님은 아무래도 식자층이니까. 당시 북쪽으로 소련군이 진군하고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가는 것 보고 난 다음이니까, 그런 감각이 있었던 모양이죠. 하지만 우리 외조부는 청송의 오랜 옛 잔반의 자손이었으니까 귀국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어머니는 따라 들어와서 열여덟에 결혼했어요.

그 이야기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들었어요. 그때 결혼하고 난 다음 일본으로 달아나려고 밀항선까지 타러 갔다가 도저히 우리 큰 누이가 눈에 밟혀서 마음을 바꿔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고생만 하셨는데. 내가 어렸을 때 보더라도 아버지가 하는 일과 비교해보면, 어머니 말을 들으면 우리 집안이 잘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안 되더군요.

그 뒤로도 그게 늘 가슴에 밟히는 거예요. 큰누이는 분명히 똑똑했고 아버지가 밀어주면 잘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안 하지, 그리고 어머니 말씀 들으면 잘될 텐데 왜 저러지, 이런 생각을 내내 했어요. 그때는 남녀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 당연한 게 아니잖아요.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합리적 견해를 따라야지 성별로 차별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늘 생각했어요.

그러다 내가 한문학을 공부하게 되니까 그런 걸 탐구해보고 싶었어요.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서 조금씩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고 쓰기 시작하고 보니까 엄청나게 큰 문제였어요. 그렇게 해서 그 책을 쓰게 된 거지요. 그걸 쓰면서 어떻게 보면 학문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왜냐하면 사회의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책으로 이론으로만 배우다가, 실제로 그런 불평등과 성적 차별이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작동하고 담론이 만들어지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그 뒤에는 이 문제를 확장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성사 연구를 놓지 못한 거예요. <신태영의 이혼소송 사건>도 그런 차원에서 쓴 것이고. 여성에 관한 것은 앞으로 기생 무당 같은 하위 주체 여성에 대해서도 글을 좀 더 쓰고 싶어요.

-그전에도 기생 같은 하위 주체에 관심을 써오신 편인데요.

네, 논문으로 조금 썼는데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어요. 자료도 봐 놓은 게 있고 해서. 워낙 이것저것 손댄 게 많아서 어떤 형식으로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어요.

-벌여 놓은 게 많으시다고 했는데 갈래를 좀 짚어주시겠어요?

첫째는 몇 년 전에 쓴 '책과 지식의 역사'라는 게 있어요.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고 책의 형태로 유통되느냐의 문제를 다뤘어요.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다뤘는데, 책을 낼 때 모두 다섯 권 내겠다고 했어요. 조선 전기 두 권, 후기 두 권, 애국계몽기(1876년 개항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 한 권까지 해서 모두 다섯 권 내겠다고 했는데, 그게 남아 있어요. 요즘은 생각이 좀 더 확장이 돼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 합쳐서 냈으면 싶어요.
원래 이 책을 한참 쓰고 있던 2002년에 뇌경색이 와서 1년쯤 쉬었어요. <책과 지식의 역사>를 쓸 때 원고지 6천 매 정도로 몰아서 썼는데, 첫 권을 완성해서 돌베개 출판사로 보낼 때 이 책은 잘 안 팔릴 것 같아서, 신윤복의 그림에 관한 책 원고 7백 매짜리를 써서 같이 보냈어요.

돌베개가 신윤복 책부터 먼저 만들겠다고 했는데, 책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혜원전신첩>이라는 30장짜리 도판의 원화를 찍기 위해 간송미술관에 갔더니 도판은 물론이고 이 그림으로 책을 못 낸다고 제동을 걸었어요.

당시 돌베개는 한국의 미(美) 시리즈를 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간송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처지여서, 책은 조판까지 되어 있었지만 못 내게 됐다고 전화가 왔어요. 그러고 나니까 <책과 지식의 역사> 1권도 내키지 않아서 다 중단시켰어요. 그래서 그 책과 나머지 세 권 정도의 원고가 그냥 13년간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어요.

그러다 재작년에 휴머니스트 출신 선완규 주간이 새로 '천년의 상상'이라는 출판사를 내면서 원고를 달라고 해서 나오게 됐어요. 1권만 나왔고 나머지 원고는 그동안 메모리가 상해서 새로 다시 많이 써야 했어요. 그 책이 몇 년 안에 다 정리되면 6권으로 나올 겁니다. 그림 원고는 결국 다른 출판사로 넘어가서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라는 제목으로 나왔어요.

-<책과 지식의 역사>와 비슷한 주제의 책으로 <책벌레 조선을 만들다>가 있는데요?

아 그건, 내가 쓰러질 무렵에 원래 원고가 6천 매 정도 돼 있었잖아요. 그때 신동아 출판사에서 내가 그런 상태인 줄 모르고 원고 청탁을 해왔어요. 당시에 오른쪽이 마비돼 자판도 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의사 지시에 따라 집에만 무료하게 있을 때였어요. 책도 보지 말라고 했어요. 그걸 보고 집사람이 "손도 회복할 겸 청탁 원고를 써보는 게 어때요?"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게 <조선의 뒷마당 풍경>이었는데, 출판될 때는 <조선의 뒷골목 풍경>으로 개작이 됐죠. 그게 좀 많이 팔렸죠.
그 뒤에 주간동아에서 격주에 한 번씩 연재를 청했어요. 심심하기도 하고 당시에 골치 아픈 책만 쓰다가 머리도 식힐 겸해서 쓴 게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였어요. 원래 <책과 지식의 역사> 원고 안에 있던 내용을 쉽게 고쳐 써서 냈죠.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공부할 게 좀 남아 있고.
그리고, 내가 청년 시절 공부를 시작할 때 상당한 영향을 끼친 책이 한 권 있는데 에두아르트 푹스가 쓴 <풍속의 역사>예요. 그래서 나도 옛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풍속의 역사를 한번 써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뒤로 여태 한문학을 공부해오면서 실록 같은 자료를 보면서 준비는 해왔는데, 그것도 정년할 때까지는 출간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몇 권이 될지 모르겠지만.

-원고를 쓰기 시작하신 거예요?

그건 자료만 계속 축적하고 있어요. 집필은 정년 직전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고. 지금은 학교에서도 논문 써야 할 게 많이 밀려 있어서.

그리고 요즘 집에서 쓰고 있는 것은 장지연 평전이에요. 그 사람이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글을 7,8백 편 정도 기고를 하면서 식민 통치에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처음 논문으로 써서 학계에 보고한 사람이 나거든요. 그 뒤로 장지연 평전을 쓰고 있어요.

그리고 자질구레한 원고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전반적으로 한문학 연구에 관련된 것들인데, 내가 2002년에 쓰러지면서 답답했던 게 있었어요.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처음에 중인 문학, 역관이나 경아전(서울 각 관청의 서리)들 한문학이 18세기 이후에 굉장히 발달해요. 지금 서촌 일대에 산 사람들이죠. 이들을 문헌에서 여항인이라고 부르고 이들의 한시문학을 여항문학이라고 하죠. 그걸 연구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고 책까지 냈는데 그 과정에서 이상한 걸 많이 발견했어요.

여항인 중에 홍신유라는 사람이 있어요. 역관 집안 사람으로 시를 썼는데, 시에서 독창성, 그러니까 작가의 개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계속 해요. 또 이언진이라는 천재로 소문난 역관이 있었어요. 연암 박지원과 같은 시대 사람인데 연암한테서 천재 소리를 들었으니 굉장히 똑똑한 거죠. 신분이 다르니까 왕래는 없었지만.

이 사람이 남긴 얇은 시집이 있는데 그 안에 '동호거실(衕衚居室)'이라는 시 150수 정도를 남겼는데, 지금으로 치면 이상의 시 비슷한 거예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쓴 거지요. 보통 오언시나 칠언시인데 이 친구는 육언시를 썼어요. 그 안에서 독창성을 굉장히 강조하는데,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독창성과 홍신유가 말하는 독창성이 비슷해요. 그 논리가. 조선의 현실에 입각해서 조선의 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해요.

홍신유가 굉장히 긴 시를 써서 자신의 시론과 창작관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독특한 용어들이 있어요. 이걸 추적해봤더니 중국의 공안파(公安派)라는 문예비평 그룹과 연결돼 있어요. 사실은 이들 논리를 그대로 따온 거예요.

연암 박지원 같은 사람이 과거의 문학을 답습 모방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선 현실에 맞는 조선 어휘를 가지고 작가의 독창성과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걸 두고 사람들은 연암 박지원의 민족문학론으로 해석했거든요. 그런데 홍신유부터 출발해서 박지원도 검토해보니 거의 비슷한 논리를 구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박지원을 다시 추적해보니 이 역시 공안파 이론을 가져온 거예요.

공안파 이론이라는 게 뭐냐면, 명나라 때 발달한 이론이에요. 그보다 앞에 의고파(어떤 문학 작품의 최고의 성취는 이미 과거에 이뤄졌기 때문에 내가 현재 문학에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루는 방법은 과거 작품을 어떻게 모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주장)라는 게 선조 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한 동안 문단을 휩쓸었거든요. 이 의고파에 대한 반발과 비판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 논리가 마땅하지 않던 차에 중국의 공안파를 알게 된 거죠. 그 논리를 가져온 거예요. 박지원도 홍신유도.

그래서 그때부터 연구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죠. 우리가 과거 조선의 민족문학론이라고 불러온 것이 사실은 비민족에서 민족으로 간 게 아니라, 의고에서 당대 개성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문학으로 간 거라고 읽게 된 거죠. 거기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어요.

공안파가 조선 문학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려고 들자니 의고파에 대한 연구를 안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의고파에 대한 연구도 국내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었어요. 한문학 연구도 아주 폐쇄적이고 내재적인 방법으로만 이뤄지고 있었고. 그전까지 조선의 한문학은 조선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거죠.

그게 아니란 걸 알고 나니까, 의고파 연구를 하다보니 명나라 때 의고파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봐야 하고, 거기에 맞선 공안파는 어떻게 발생했는지도 이해해야 하고, 그 공안파가 조선에는 어떻게 들어와서 어떻게 이해돼서 변형되는지도 연구해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죠. 그걸 한꺼번에 다 하게 됐어요.

-우리 한문학에서 출발해서 결국엔 중국 문예사까지 다 할 수밖에 없었던 거군요.

그렇죠. 그러다 보니까 공부할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거죠. 너무 늘어나서 감당을 못할 정도로. 밖으로 논문으로는 발표하지는 않은 채 혼자서 끌어안고 계속 연구를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쓰러진 거죠. 저기 서가에 책이 보이죠.

<농암잡지 평석>, <공안파 조선후기 한문학>, <안쪽과 바깥쪽>,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그런 책들. 이 네 권이 한꺼번에 나왔어요. <공안파 조선후기 한문학> 이게 원래 목표였는데 이 책을 내려다보니 앞의 <안쪽과 바깥쪽>, 의고파 연구를 안 할 수 없었어요. 그 다음 의고파에서 공안파로 넘어가는 중간의 것이 <농암잡지 평석>이란 책이에요.
이것을 계속 공부하다 보니 한국문학사가 뭐냐, 이토록 폐쇄적이고 내재적인 것이란 말인가, 한국문학사의 구성 자체에 대해 반성하게 됐어요. 한국문학사가 원래부터 그렇게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에 구성된 것이라고 보게 된 거죠. 그 이론적 틀을 마련하기 위해 쓴 게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였어요. 이걸 한꺼번에 다 썼어요. 그런다고 애를 먹었어요.

-쓰시고 쓰러진 거예요?

쓰는 도중에. 원고는 80%쯤 됐는데 쓰러진 거죠. 2002년에 쓰러져서 1년 쉬고 회복해서 마무리했어요. 그러는 중에 <열녀의 탄생>, <책과 지식의 역사>도 썼고.

-'멀티'로 작업을 하셨군요.

네. 그걸 하면서 장지연 쪽도 더 공부했지요. 그러다 보니 1876년 개항부터 1910년 사이 즉 근대계몽기에 우리나라에 어떤 지적인 변화가 있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뭘 했냐면, 1898년부터 우리나라에 민간 출판사가 생겼어요. 이 민간 출판사들이 중국과 일본 책을 굉장히 많이 갖고 들어와서 번역하고 역술을 했는데 그게 한 1000종 정도 돼요.

그게 어떤 책들인지 조사하기 위해 목록을 만들었어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도 보고 대학 도서관도 조사하면서 리스트 만드는 데 몇 년 걸렸죠. 그중에 앞서 말한 책들도 쓰고 <조선풍속사>라는 그림책도 쓰고. 엄청 바빴어요.(웃음)

-쓰고 계신다는 장지연 평전에 대해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최근까지도 친일 문제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요.

장지연 평전의 제목이 '주체 없는 근대'예요. 그게 뭐냐면 근대를 하긴 하는데 장지연의 경우에는 주어가 일제란 말이죠. 원래 민족주의자들이 믿는 근대라는 것은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을 근대화했다는 거예요. 민족이란 주어가 민족이란 목적어를 근대화한 거죠.

장지연의 경우 한일합방 다음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하게 되는데, 그건 말하자면 주체 없는 근대화죠. 민족이라는 주체를 상실해버린 근대화. 지금 국내에서 논쟁거리인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주체 없는 근대화론이죠.

그 관점의 또 다른 오류가 뭐냐면, 근대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로 설정이 돼 있다는 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자본주의적 근대에 아주 깊숙이 진입했는데, 이것이 정말 우리 민족, 혹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으로 다가왔느냐면 그건 아니라는 거죠. 이제는 근대 자체를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성찰하는 단계에 도달했는데 그 주체 없는 근대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학문적으로 낙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문제는 근대화와 관련해서 조선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와도 관계가 있어 보이는데요.

저는 이렇게 보고 싶어요.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한 것을 민족이 망한 걸로 보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라 사족 체제가 망한 거예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족 체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조선이라는 나라를 두고 세종, 성종 때까지는 굉장히 훌륭했는데 임진왜란을 맞아 흔들렸고 영정조 때 다시 르네상스를 맞이했다가 결국 일제 식민지가 됐다고 설명을 해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 사족 체제는 자기완성을 이루면서 동시에 스스로 모순에 봉착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봐야 해요. 사족의 가치, 지배가 관철된다는 점에서 자기완성이지만, 그 자기완성이 곧 민중에 대한 강고한 압박으로 나타나 결국 사족체제 자체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사족체제가 스스로 자기모순을 갱신하지 못하는 한 붕괴할 수밖에 없지요. 만약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세력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사족 체제는 오래 못 버텼을 거예요. 사족체제 다음에 뭐가 왔겠느냐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거죠. 거기에 대해 이래 저래 말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흔히 전근대 즉 중세가 있고 근대가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조선후기 사회를 근대의 내재, 근대기로 설정해요. 하지만 19세기로 오면 사족체제라는 게 자기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되지요. 그 조선의 사족체제를 민족과 등치시키면 곤란해요. 사족체제가 붕괴되고 있을 때 불행하게도 옆의 일본 제국주의가 들어온 거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민족 내지 국가 공동체와 지배계급의 질서와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조선의 사족체제가 붕괴했다고 봐야죠.

-그 문제는 전작 <서양에서 온 물건>에서도 언급하신 것 같은데요, 서양의 물건을 일찍 접하긴 했지만 기호품으로만 봤지, 깊이 원리를 탐구하고 사회를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고 쓰셨지요.

그렇죠. 그 점이 미묘한 부분이기도 한데. 사족체제는 사실 안정적인 농민의 생산이 있고 사족이 그들의 생산 일부를 수탈하여 존재하는 것이지요. 사족체제가 안정적일 때는 과거를 쳐서 여러 지방에서 동시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벼슬을 하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오는 식으로 순환이 되는 거죠. 그게 좋은 건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나면 사족체제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버려요.

대표적인 게 뭐냐면, 사족체제 하에서 모든 양반들이 과거시험을 칠 수 있지만 관료제의 정점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한정돼 있었어요. 17세기 중반부터 서울과 경기, 충청도 사람만 벼슬하게 됐어요. 전라도는 임진왜란 직전에 정여립의 난이 일어난 이후 관직에서 배제했어요. 평안도와 함경도는 국방에 전념해야 한다고 아예 문반직에 등용하지 않았지요. 조선 초부터 차별한 것이지요. 강원도는 조선전기에는 허균 집안 같은 집안이 있어서 관직에 등용되지만, 조선후기 되면 거의 관로에 등장하지 않지요. 인구가 희박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황해도는 원래 고려가 터 잡은 곳이었기 때문에 차별했고.

조선 건국 후 벼슬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남쪽의 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인데 이게 17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점점 경화세족이라고 해서 서울, 경기, 충청, 사람만 벼슬을 하게 돼요. 경상도가 좀 있었다가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면서 남인이 떨어져나가고, 17세기말이 되면 서울, 경기, 충청만 남아요.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다시 남았던 남인과 소론의 상당 부분이 제거됩니다. 그러다 19세기가 되면 충청도조차 향반이 되는 경향이 있지요. 과거를 통해 고급 관직을 독점할 사람들의 풀이 점점 좁아졌어요.

우리가 아는 정약용, 박지원 같은 실학자들만 해도 전부 서울 사람이에요. 서울에 집이 있고 동시에 충청이나 경기에도 있어요. 정약용은 경기도 남인이기 때문에 서울에 집이 있고 양수리 그러니까 두물머리에도 있었고, 담원 홍대용은 서울에 집이 있고 또 청주(지금은 천안)에도 있었고, 추사 김정희는 서울 가회동에 집이 있고 시골집은 충청도 예산에 있었어요.

이 사람들만 북경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이들이 서양지도와 책, 새로운 물건을 갖고 왔어요. 그런데 경화세족의 범위도 갈수록 점점 줄어들어요. 1755년에 윤지의 옥사가 일어나 소론은 당파의 위세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궤멸당하지요. 물론 그전에 1728년에 이인좌의 난으로 한 차례 크게 위축이 된 뒤지요. 그렇게 점점 소론 역시 기반이 줄어들어요. 그 결과 극소수 집안만이 북경을 오가며 선진 문물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 대신 남은 가문들은 점점 덩치가 커져요. 모든 학문이 학파별로 형성이 안 되고 대부분 극히 좁은 범위 내의 당파별, 가문별로 이뤄져요. 이게 망할 징조죠.

옛날 같으면 퇴계가 안동 살면서 서울 가서 벼슬하고 내려오고 이런 식으로 순환이 됐을 때는 서울 문화가 지방에 퍼지고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는데. 이건 서울 시내에 앉은 사람이나 경기도 부근에 사는 사람, 자기 가문 안의 사람만 알게 되니까, 특히 당파별로 경쟁이 굉장히 심해서 서로 원수가 되니까 남인이 하는 학문과 노론이 하는 학문이 서로 공유가 안 됐어요. 이게 정말 괴이한 일이죠.

똑같이 정보를 가져와도 성호 이익이 아는 정보와, 노론인 홍대용이나 박지원이 아는 정보는 교환이 잘 안 돼요. 굉장히 폐쇄적이었던 거죠. 사족과 상민 사이의 불통은 말할 것도 없고, 사족들은 사족들대로 경화세족과 지방사족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또 경화세족 내부에서도 당파별 가문별로 갈라졌으니, 서로 격실(隔室) 속에 갇혀 버린 꼴이 되었지요. 이 격실화 현상으로 인해 문화의 창조적 역동성이 크게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게 사족체제가 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봐요.

영호남이나 다른 지방 양반들에게 권력을 나눠주지 않고 벼슬 기회도 봉쇄해버렸으니까 안 됐고, 서울 양반들은 개혁을 할 힘이 없었던 거죠. 그런 식으로 사그라들어 간 게 당시 사족체제의 참모습 같아요.

-외국으로부터 문물을 접하고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국가의 힘으로 전환되지는 못한 거군요.

네. 홍대용을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어요. 홍대용이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을 받아들이잖아요. 당시 양반들의 평균적 수준으로 보면 그것을 상당히 깊이 있게 이해한 사람이에요.


우리는 홍대용이 동양 최초로 지전설 이야기도 했다면서 굉장하게 여기잖아요.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잘 모르니까 굉장하게 평가하지만 그가 이해한 서양 천문학과 수학의 깊이의 수준을 보면 그리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중국만 해도 달랐어요. 서양에서는 마테오 리치가 1601년에 북경까지 와서 자명종을 주고 호감을 얻어서 성당을 세우고 천주교를 포교하잖아요. 그때 선교사들이 포교하면서 중국의 관심을 끈 게 몇 가지 있어요. 물건으로는 자명종, 학문으로는 천문학과 수학이에요. 수학 중에서도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


서양 천문학이 처음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 있었고, 곧이어 코페르니코스가 태양중심설을 내세웠는데 천주교 입장에서는 지동설이 신학에 문제가 되니까 안 받아들여요. 그 뒤에 티코 브라헤가 나와서 천동설과 지동설을 결합한 모형을 만들어요. 이 모형을 서양 선교사들이 갖고 들어와서 천문 역법, 달력을 새로 만들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중국 천문학은 음력을 계속 쓰다 보니 오차가 누적돼 24절기를 맞출 수가 없었어요. 경칩에도 개구리가 안 나오는 상황이 된 거죠. 명나라 때 달력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왔어요. 그런 상황에서 서양 천문학자들 달력이 정확하거든요. 서양 천문학자와 중국 학자 간에 일식 예측을 두고 경쟁이 붙었는데 서양 천문학자들이 이겼어요.


그래서 마테오 리치 이후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 흠천감을 장악했어요. 달력도 완전히 새로 만들었어요. 1644년에 청나라가 북경 함락 후에 중국을 차지했을 때 아담 샬이 찾아가서 우리 달력을 이용해달라고 해요. 청이 받아들여서 달력을 바꿔버려요. 이게 시헌력이고 우리가 지금까지 쓰는 음력이에요.


청이 1700년대 초에 오면 서양 천문학과 수학을 다 받아들여요. 강희제 명령에 따라 1723년에 <율력연원>라는 어마어마한 책을 만들어요. 그 안에 <수리정온>이라는 수학책이 들어있고 <역상고성>이라는 천문학 책이 있는데 조선에서도 몇 권을 구입했어요. 그중 한 사람이 홍대용이었어요. 홍대용이 남긴 수학이나 천문학 책을 보면, 청나라에서 완벽하게 나름 이해해서 정리한 서양 지식을 제대로 이해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조선이 중국을 통해 새로운 서양 학문과 기계를 들여왔다고 했을 때, 왕조 전기 세종 때처럼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만한 활력 같은 게 있었으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어요. 조선 후기에 와서는 얕은 수준의 정보 이해에 머물다가 사그러든 거죠.

-임진왜란 이후 사족체제가 사실상 자기완성과 자기모순을 동시에 경험하고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해 붕괴한다고 하셨는데, 정조의 역할이나 업적은 어떻게 보세요?

그 부분도 중요하게 짚어야 할 게 있는데, 제가 정조에 대해서도 원고를 상당히 많이 썼어요.

-평전용으로요?


학문적으로 궁금한 것도 너무 많고 또 마침 출판사의 요구도 있고 해서 정조의 평전을 쓰려 한 것이지요. 정조 때 문화가 왜 그런 식으로 이전과는 달라 보이느냐 하면 요지는 이래요.

정조 때 활동했던 사람들이 경화세족들이에요. 그 가문들이 축소되기 시작해서 유수한 가문들만 남게 됐어요. 이 사람들이 북경 정보를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해본 차원이 하나 있고, 다른 한편으로 경화세족 내부에서도 다른 움직임이 생기는데, 이런 식으로 가면 체제가 망한다, 그러니 모순을 제거하고 사족체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조정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부류가 있었어요.

사족체제의 모순에 대한 자기조정 프로그램이 우리가 말하는 실학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실학이란 것을 독립적인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것은 재래의 유교적 경세론의 일종이지요. 또 실학이라고 하면 전근대를 넘어 근대로 지향하는 담론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이른바 실학에서 근대로 향하는 그 어떤 요소도 찾아낼 수가 없어요.

-구질서의 연장이라는 뜻인가요?

궁극적으로 사족체제의 지속이죠. 그런 과정에서 일련의 개혁적 담론들이 제출되는데, 그런 것들하고 서양과 중국에서 들어온 여러 가지 새로운 학문과 사상들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여러 담론들이 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새롭게 보이는 거죠. 그래서 정조 대가 새롭게 보이 것처럼 이야기들 하는데, 사실 새롭다고 할 것도 없지요. 또 정조는 절대 개혁적 인물이 아니에요. 개혁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18세기의 가장 큰 문제가 토지 문제였어요. 토지를 일부 경화세족, 지방 사족들이 거의 다 차지했어요. 경주 최부자라고 있어요. 어마어마한 땅을 갖고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해요. 수확량을 만석을 절대 넘기지 말고,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말라고 했다지요.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말라는 것은 흉년에 땅을 쉽게 늘릴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조선 후기에는 3, 4년에 한 번꼴로 흉년이 들었어요. 흉년이 들면, 박지원의 글에 잘 나오는데, 사람들이 먹고 살 게 없어서 토지문서를 들고 부잣집을 찾아가요. 부자들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높게 쳐줘요. 땅을 차지하고 난 다음에는 계속 소작을 붙여먹게 하면 땅이 다 그 집에 모이게 돼요. 우리가 아는 모 대학의 설립자로 알려진 사람 집안도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된 것이라고 하지요.

이런 식으로 부자가 토지를 광점하게 되니까 결국 농민이 땅으로부터 축출 당하게 돼요. 남은 길은 두 갈래예요. 도둑놈이 되거나 유민이 되는 것. 둘 다 사족체제의 입장에서는 안 좋죠. 도둑놈 되는 것 중에도 독특한 게 있어요. 박지원의 '허생전'을 보면 변산반도 도둑들이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참여해요. 이런 일이 지배체제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에요.

그래서 토지를 어떻게 농민들에게 되돌려줄 건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백출해요. 성호 이익 같은 사람은 토지를 개인한테 모두 나눠주되, 요즘 이야기되는 기본소득처럼, 영원히 팔아먹을 수 없는 토지(영업전)를 주자. 그러면 최소한 먹고 살 수는 있지 않느냐는 주장을 해요.

연암은 토지소유 상한제를 제안해요. 지금 땅을 많이 가진 것은 인정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땅부자들이 자손이 늘어나 상속을 하고 또 이런 저런 일로 땅을 팔아먹을 터이니,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수준으로 이하로 내려가면서 균등해질 거라고 본 거죠. 다산은 마을마다 토지를 공동 소유하는 안을 내요. 이런 제안 하나도 실현 안 됐어요.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홍재전서>를 보면 정조는 토지 문제를 환히 다 알고 있어요. 그 역시 깊은 고민을 했는데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려면 현재 토지소유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치지 않겠어요. 문제는 그 저항을 압도할 권력적 강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고려가 전혀 보이지 않지요. 또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지요. 토지 제도에 손을 대려면 현재 토지 보유 상황을 측량해야 하잖아요. 조선 전기에는 그걸 했어요. 세종 때는 전국적으로 다 했어요.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니까 할 수가 없어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비용 문제입니다. 나가서 토지를 측정하는 하는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려면 돈이 드는데 재정이 부족하니까 지방에 비용을 물려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파산이 속출한다는 거예요. 관리 말먹이며 점심 값이며. 그래서 토지 측량 하지 말라는 상소가 쏟아지니까 못 한 거예요.

둘째는 수학을 몰랐어요. 토지제도를 바꾸려면 토지를 정확히 측량해야 하고 그걸 하려면 수학을 알아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정조가 결국 하지 말라고 해요.

-수학이 문제라면, 조선 전기에는 토지 측량을 했다면서요?

그때는 수학 공부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관리들도 하고 세종대왕도 수학 공부를 했어요.

-후기에는 수학 공부 자체가 쇠퇴했다는 건가요?

이야기가 더 깊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성리학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가 1392년 조선이 유교국가로 건국된 것 생각하면 당시에 성리학이 아주 높은 수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굉장히 낮아요. 가령 19세기말 개신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시골 기독교 신자와 21세기 기독교 신자의 신학 이해 수준은 상당히 차이가 나겠지요.

그것처럼 조선 초기 지식인들의 성리학 이해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이지요. 성리학이란 극도로 추상적 학문은 이해가 만만하지 않거든요. 우리가 퇴계 선생을 왜 높이 평가하느냐면 퇴계가 처음으로 성리학, 곧 주자학의 전체적인 구성을 이해한 사람이거든요. 성리학을 이해하려면 주자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주자가 모든 성리학을 종합했기 때문에. 주자를 이해하려면 <주자대전>을 봐야 해요. 그 문집이 1543년에 우리나라에 출판됐어요.

그걸 처음으로 전부 몇 번씩 반복해서 골똘히 읽고 연구한 최초의 사람이 퇴계였어요. 그러니 당시 학문의 종장이라 불렸죠. 그러니 적어도 16세기 중후반까지는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사족들도 100% 성리학에 의식화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성리학 이외 학문이나 학술 담론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거죠. 다른 기술학에 대한 이해가 조선 전기 중에서도 중종 이전에는 굉장히 깊었어요.

중종 반정을 일으킨 주역들이 사실 양심적인 세력은 아니었잖아요. 연산군이 워낙 자기 이익을 많이 침해하니까 반정을 일으켰던 거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사실은 기본 질서를 위반한 거죠. 그걸 희석하려고 개혁 세력을 들이는데 그게 조광조 일파였어요. 대개 조광조를 높이 평가하고, 나 역시 그에 일부 동의하지만, 엄격히 말해 그 사람은 철없는 도덕주의자라고 할 수 있어요. <소학>을 입에 달고 오직 그 책을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길처럼 말하고, 도덕군자들만이 모여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이지요. 어쨌든 조광조는 그렇게 ‘과격한’ 주장을 펼치다가 반대파에 의해 기묘사화 때 추출당하죠.

그때 사신이 실록에 이렇게 썼어요. 조광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학>만이 학문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광조 이전과 후를 비교해 보면 그전의 모든 기술학들이 후퇴했다, 라고 얘기해요. 조광조 일파가 처음으로 성리학에 깊이 의식화된 사람들이거든요. 성리학이 학문적 세계를 일관되게 지배하고 난 다음부터는 우리가 말하는 기술학에 대한 인식이 아주 희박해졌다는 뜻이에요.

-유학이 사변화되면서 기술학이 위축 내지 밀려났다는 얘기군요.

네, 천시된 거죠. 그래서 18세기 말에 가면 정조 같은 사람이 이런 얘길 해요. 일본, 중국에서 신기한 물건 사들인다고 은이 다 소모된다고. 제 책에도 썼는데, 강세황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해요. 거울 같은 것은 간단해 보이는데 이것도 못 만든다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예요. 조선 전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후퇴한 거에요. 하지만 우리 교과서에는 그렇게 못 쓰는 거죠.

-집권층의 지배 학문이 사변화되더라도 일상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 전수되는 실용적 지식까지 그렇게 소멸 내지는 위축될까 싶은데요?

착취가 그만큼 심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요. 일본만 해도 조닌(町人, 에도 시대에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장인, 상인의 총칭) 문화가 있어서 무사들이 조닌 문화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어요. 상업 자체를 아주 멸시한 데다 기술학 자체를 아주 우습게 알았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기술학이 제대로 양성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렇게 보면 조선 지배층의 지식 자체가 사회에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한 셈이네요.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마저 자생적으로 지속되거나 성장할 여지를 제약했다면 집권 세력의 지배 학문이 굉장한 힘을 발휘한 거잖아요.

그렇죠.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유교라는 이데올로기가 이토록 국가화된 것은 조선밖에 없다고 해요. 중국이 유교의 본산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도 도교도 있고, 오히려 민중을 지배하는 것은 도교란 말이죠. 양명학도 있고, 오만 가지가 다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는 거니까.

-삼강오륜이라고 해서 일상까지 지배했지요.

우리가 보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누잖아요. 그러면서 전기에는 성리학이 지배했던 사회이고, 후기가 되면 성리학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비판되면서 실학이 나왔다는 구도로 보는데, 그게 아니에요.

조선 전기는 성리학이 전국적으로 지배도 못했고, 유교적 가부장제가 완벽하게 관철되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여자들이 결혼도 두 번, 세 번 했어요. 양란 지나고 난 후에야 진짜 양반 사족들이 바라는 유교 가부장제가 100% 관철되는 사회가 도래한 거죠. 성리학이 절대 진리로 군림하는 시대가 된 겁니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관과 반대죠.

서유구라든지 18, 19세기 진보적인 경화세족들은 우리 기술력이 일본에 엄청나게 뒤져 있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해요. 지금은 우리가 아무리 일본을 업신여겨도, 과거 나가사키 데지마(1636년 일본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으로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에 네덜란드 상선이 계속 와서 해부학 책도 갖다 주고 해서 난학이 발전했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 메이지 유신 때 서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기초가 됐어요.

반면에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았죠. 조선후기에 일본 통신사로 파견된 사람들이 일본 지식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한시 쓰고 글씨 쓰는 건 우리가 훨씬 더 잘해요. 일본 지식인들은 일단 우리 쪽에 굉장하다고 이야기해주고 난 다음에는, "너희는 서양을 아는가, 인도는 아는가" 물어봐요. 모른다고 답하니까 뭐랬는지 아세요. 말은 공손하지만 그 속에 깔린 뉘앙스는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이런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최근에 홍대용을 공부하다가 본 자료가 있어요. 홍대용이 1765년 겨울 북경에 가서 1766년 1,2월을 머무르다가 그때 중국 지식인 3명을 사귀고 돌아와서 편지를 주고받는데, 반정균이란 사람이 홍대용한테 편지를 썼어요. 거기 보면 필리핀이 식민지가 된 걸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그것이 천주교 때문이다, 조선은 어떠냐, 조선은 절대 천주교를 받아들여서 식민지 되는 꼴이 없어야 한다고 했어요. 홍대용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그러니까, 북경에 앉아서도 벌써 스페인 선박이 필리핀을 접수해서 가톨릭 퍼뜨리고 식민지로 만든 상황을 알고 있는데, 조선은 모르는 거예요. 지금 우리 생각으로는 그런 소식을 들으면 이게 뭔가 하고 연구해볼 것 아니에요. 듣고도 연구를 안 해요. 그래서 사족체제가 망한 것이 아닌가 해요.

-그래도 조선 왕조가 500년을 지속된 데에는 나름의 저력이 있었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그건 달리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해서 중국 대륙에서는 명 체제는 스스로 모순을 노정하다가 결국 이자성이란 민중반란군에 의해 멸망하고 그 권력의 빈 공간에 청이 들어서서 새로운 체제를 세웁니다. 청은 명이 노정한 모순을 일소하고 이내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지요.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무로마치 막부 이래 오랜 전국 시대를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하여 에도의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만은 사족체제가 연속되지요. 전쟁으로 사족체제가 허약해진 것은 분명한데 왜 사족체제가 붕괴하지 않았을까요. 사족체제를 붕괴시킬 압력조차 전쟁으로 사라졌던 것이지요. 원래 조선은 노비가 50%에 이르는 사회였습니다. 노비와 농민들은 조선초기부터 군도의 형태로 끊임없이 저항했지요. 홍길동과 임꺽정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지방 곳곳에서 민중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진압되었고 사족들이 피해를 입은 것 이상 민중들도 피해를 입었지요. 달리 말해 사족체제의 변혁을 강제할 민중적 에너지 역시 사라진 것입니다. 사족체제가 나름대로의 저력이 있어서 존속한 것이 아니지요.

민중들은 계속해서 군도의 형태로 저항하다가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진압되지요. 이인좌의 난 이후 한동안 지방의 군도가 사라졌다는 기록 자체가 시사하는 바 크지요. 곧 민중의 저항적 에너지가 위축되는 것이야말로 조선 사족체제가 길이 연장되었던 결정적인 이유겠지요. 이 외에도 사족체제의 민중에 대한 우민화 정책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만, 그건 기회가 되면 따로 말씀 드리지요.

이 기회에 또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조선을 보는 시각 자체가 상당히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지요. 아까 한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한데, 조선후기에 실학이 존재했다는 그 이야기 말이지요. 실학은 근대를 향한 내재적 기획이라는 발상은, 조선이 중세를 마치고 조선후기라는 내재적 근대를 거쳐 스스로 근대로 나아갔다는 설정을 내부에 갖고 있지요. 그런데 이 시대구분은 서양사에서 가져온 거지요. 서양사에서 말하는 고대-중세-근대의 역사 발전 단계를 그대로 가져온 거란 말이죠. 하지만 어떻게 서구라는 작은 지역에서 뽑아낸 역사 발전 단계가 전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살아온 동양, 특히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느냐는 말이죠.

만약 서양의 고대-중세-근대라는 도식을 적용하려고 들면, 저기 중남미에 가서 잉카나 마야에도 갖다 대면 그런 나라는 역사도 없는 것 아니에요. 제 말은 고대-중세-근대라는 서양의 도식을 보편적 도식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거기에다 우리를 끼워 맞추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다만 역사 자체가 하나씩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단층 지대 같은 것이 존재하지요. 20세기로 말씀 드리자면, 조선 사족체제가 끝났을 때 일본의 제국주의가 들어와서 우리 역사를 간섭해 뒤바꿔 놓는 거대한 단층작용이 한 번 일어난거죠. 역사라는 게 꼭 무슨 전근대-근대-내재적 근대-근대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순서대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까 내가 말한 방식은 우리 역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라는 말은 맞아요. 이렇게 말하면 무슨 자학사관인 것처럼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니지요. 달리 말해 우리의 전근대가 완전히 부정적이고 볼 게 없는가 하면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린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심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의 목적은 소비가 되고, 소비를 위해 돈을 버는 게 됐어요. 어떻게 하면 상품을 더 많이 구입할 수 있느냐, 그러기 위해 화폐를 얼마나 더 축적할 수 있느냐가 목적이 됐지요. 그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대학도 보면 지금 화두가 아무것도 없어요. 인문대도 요새 온통 취업이에요. 대학의 목적은 노동자를 길러내는 거예요. 교회도 신자들 많이 모으고 헌금 짜내고 예배당 크게 짓고, 완전히 자본주의 경영 시스템을 그대로 갖고 들어왔어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사회에서는 돈 이외에 가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게 필연적인 역사인가 하면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서구 사회가 자본주의로 나아갔을지언정 다른 지역의 역사라는 것 역시 반드시 자본주의로 나아갈 필연성은 없는 거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칼 폴라니가 이야기한 것처럼, 경제라는 것은 인간의 여러 사회 관계 속에 묻혀 있는 거란 말이죠. 그 시절의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반추해 본다면 자본주의를 넘어갈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이란 과거를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가져올 것도 너무나 많다는 거예요.
가령 아기를 낳는다고 할 때, 지금은 맡길 데가 아무 데도 없잖아요. 그래서 어린이집에 맡기곤 하는데 국가 보조금이 적으니까, 보모나 교사들 처우도 안 좋고 아이들한테 짜증내고 한다잖아요. 아기를 키우는 보육조차 자본주의적 상품화폐 관계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지요.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성장이란 상품이 아닌 것들, 비화폐적 관계에 있던 것들을 상품화, 화폐화하는 것이지요. 그 사이에 인간은 상품과 화폐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요.

조선시대에는 마을이 존재했어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근대적 공동체가 살아 있었어죠.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외출할 때는 대가족이나 옆집에 누구에게 맡길 수가 있었어요. 그게 친족이나 마을 공동체 사회, 전근대 사회에서는 가능했어요. 그 관계들이 다 무너져버렸어요.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화, 상품화, 시장화, 이것이 지구의 진리처럼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전근대 사회를 아주 나쁘게 평가하지만 그 속에는 정말 우리가 되찾아야 할 공동체의 가치가 아주 많아요. 그런 것은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전근대를 볼 때 제 입장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비판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져올 게 너무나 많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한 사회의 질서가 그 시대에 그 나름으로 오래 지속된 것은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했으니까 존재했겠지요. 조선이 지금도 문제적으로 논의가 되는 가장 큰 맥락은 결국 외세의 식민 통치를 초래했다는 사실 아닌가 싶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지배층에 책임을 묻는 평가가 한 축에 있다면, 다른 한 축에서는 불가항력의 외적 변수가 컸다는 반론의 구도로 전개돼 온 감이 있습니다.

네, 그렇게 양분해서 보는 것이 저로서는 못마땅한 거예요. 잘 안 받아들이더라구요. 제가 요즘 집에서 계속 하는 작업 중 하나가 뭐냐면, 허생에 대한 이야기예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허생전>을 썼잖아요. 흔히 허생을 평가할 때 고리타분한 양반 행세 버리고 상업에 뛰어들어 장사를 해서 어쩌고 하면서 이런 것이 북학파 박제가의 상업주의, 통상론과 맞물려서, 북학파는 상공업을 주장했다, 이렇게 말들을 하잖아요.
하지만 연암의 <허생전>을 잘 읽어보면 과일과 말총을 매점매석해서 돈을 버는데, 그 돈이 상업자본이라면 그 돈으로 다른 장사를 해야 하잖아요. 그 돈 10만냥을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면, 당시 제일 골짜기인 변산으로 가서 도둑놈들 데리고 무인도 들어가요. 거기서 농사를 지어요. 풍년이 드니까 곡식을 가지고, 당시 흉년이 든 나가사키에 내다 팔아서 1백만 냥을 받아와요.

이걸 가지고 또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50만냥을 바다에 쓸어 넣어버려요. 화폐를 폐기처분해요. 섬에서는 돈이 필요 없으니까. 그 다음에 섬을 떠나는데 문자, 즉 한자를 아는 사람을 다 데리고 나와요. 이게 뭐냐면 화근인 이데올로기, 지식을 끄집어낸다는 거에요. 그리고 돈 50만 냥 중 40만 냥은 국내에 다니면서 굶주린 기민들 구제하고 10만 냥을 다시 갚아요.

이 사람이 섬에 만든 것은 아나키의 공동체였어요. 섬에서 나올 때 배도 없애버려요. 드나드는 사람이 없게. 이걸 보면 연암이 생각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사회예요. 거기에는 무역이나 상업이 없어요. 나중에 변 부자가 가서 허생을 만나 물어봐요. 당신 어떻게 해서 돈 벌었냐고. 허생이 답하기를 내가 매점매석해서 돈을 벌었는데 하면 안 되는 짓이라고 해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상업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탈화폐적이고 탈상업적인, 탈무역적인, 탈국가적인 논리가 가득해요.

우리가 작품을 정확히 봐야 하는데, <허생전>을 이제까지 상업이나 화폐, 무역을 지향하는 것처럼 봐왔단 말이죠. 우리 머릿속에 모든 사태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경로를 발견하고야 말겠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죠. 이걸 걷어내야 해요. 연암이나 박제가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정당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오는 것이라는, 역사적 필연이라고 본다는 거죠. 생각이 너무나 깊이 의식화 돼있고 중독돼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회를 상상할 수 없게 돼 있어요. 역사라는 것이 사실은 과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어떻게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느냐, 어떤 사회를 새로 상상하느냐는 건데, 우리는 완전히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요.

-실제로 자본주의의 지구화가 현실이 되지 않았나요?

그렇죠. 우리도 그 속에 들어가 버린 거죠. 강제로 편입됐다고 보는데. 그 논리에 젖어서 살아왔고 역사도 그런 식으로 쓰고 살아왔는데. 과연 지금 생각해볼 때 우리가 온당하게 사는 삶일까? 물어보게 돼요. 첫째, 우리 커뮤니티가 다 무너졌어요. 아파트밖에 없잖아요. 옛날에 갖고 있던 지역 공동체, 마을 공동체가 완전히 무너졌잖아요.

금은 앞집 사람도 잘 몰라요. 어디 갈 때 열쇠를 맡길 수 없어요. 아기 맡길 데도 없어요. 그런 것들 보면 인간을 낱낱이 분리해서 화폐가 없으면 생존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 속에 굉장히 깊이 들어온 마지막 형태인데, 이런 식의 삶의 형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대로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죠.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대한 문명 차원에서의 비판은 여전히 뜨겁고 앞으로도 계속되겠지요. 많은 문제를 노출해왔고 지금도 불평등이나 환경 문제 같은 것은 더 심각해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로 오면서 점점 더 현실에서 지배적이 된 힘이었단 말이죠. 그것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역사의 흐름으로 닥쳤을 때 조선이 준비가 안 돼 있었다던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것대로 논의가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네,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검토해봐야 하는데, 나도 아직 거기까지는 손을 안 뻗쳤지만, 구한말 유학자들 중에 자본주의 문명 자체가 아주 몹쓸 것이고 야만의 문명이라고 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많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철학계, 사상사 쪽에서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뭐냐면 그런 움직임이 유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했다는 점이죠. 유교 자체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자본주의를 비판해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그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자본주의 질서라든가 외부로부터 닥치는 불가항력의 세력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와 그것이 어떻게든 현실로 닥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는 다르지 않나요?

그건 굉장히 큰 문제 같아요. 사실 그 문제는 학문적으로 토론하거나 내가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간디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간디가 자본주의라든지 근대 기술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잖아요.

간디가 쓴 작은 책자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자신이 인도의 무수한 판차야트라는 작은 농촌공동체를 가지고 국가를 수평적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결국 인도가 독립할 때 간디 말을 안 들었다는 거예요. 네루가 지향하는 사회주의 쪽으로 갔다가 결국 뒤흔들려서 엉망이 되니까 1992년 다시 신자유주의로 넘어오는데, 그런 걸 보면 이게 인간의 운명인가 싶기도 해요.

-전지구적 차원에서 불가항력의 힘으로 닥치는 상황 앞에서, 한 나라가 나 홀로 문을 닫을 수는 없지 않나 싶어요. 자족적인 오타키의 형태로 생존할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죠. 대책이 없는 거죠.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 인문학 하는 쪽에서 심각하게 제기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지적 풍토라는 게 그런 것을 제기할 상황이 전혀 준비가 안 돼 있어요. 특히 고전학 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줘야 해요.

-다시 조선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그동안 조선에 대한 이해 자체가 이분법적으로 대치돼온 인상을 받는데 선생님은 그걸 넘어서 우선 진상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 같습니다. 정조나 실학에 대해서도 사실 우리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굉장히 강한 것 같은데요.

그 고정관념이라는 게 어떤 점에서는 필연이에요. 우리가 국민국가에서 살고 있으니까. 실학이라는 게 왜 탄생하게 됐냐면, 일본에서 식민사학이 들어왔단 말이죠. 조선이라는 나라는 스스로 근대로 갈 수 있는 내재적 동력도 의지도 없다는 얘기잖아요. 한국 입장에서는 이미 민족주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니 해방이 되고 나니까, 그건 반드시 무조건 부정돼야 하는 것이었죠. 내재적 근대화라는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있는 것이어야 했어요.

-국사학의 존재이유랄까 출발점이 민족국가의 정당성 확보, 당시로서는 항일과 맞물려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국사라는 것 자체가 국민국가에서 'Nation(민족 혹은 국가)'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 기술이란 있을 수 없어요. 다 긍정적인 서술이지요. 내재적 근대화가 없었더라도 있었다고 해야 해요. 그것은 이미 정식화된 담론이에요. 그 위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얹는 거죠.

-그 점이 국내에서 한국학을 보게 되면 꼭 부딪히는 문제인데요. 선생님도 예전에 인터뷰에서 우리 문학을 연구할 때 민족을 빼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네. 거기서 나온 문제의식이죠. 그런 식으로 보게 되면 국문학사라는 게 민족이라는 주어가 문학을 빌려서 어떻게 근대로 나아갔던가의 이야기가 돼요. 한국사라는 것도 민족이라는 주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이야기가 되지요. 하지만 민족이라는 주어만 내세워 쓰게 되면 국사책이 이상해져요.

그럴 경우 종놈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세종 때 조선시대 인구의 50%가 노비란 말이죠. 그 사람들이 진짜로 '한국 민족'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잖아요. 여성들은 어떻게 해요? 나아가 소수자들 이야기는 전혀 할 수 없어요.

임진왜란 때 일본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잡아 갔어요. 조정에서 사람을 일본에 보내 그 사람들 데려오려고 하니까 안 온다는 거예요. 잡혀서 몇 년 있다 보니 차별 받은 조선에 다시 올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걸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런 사람들의 선택은 민족사의 구조에서 뭐가 됩니까?

-민족 입장에서는 배신이겠지요.

배신이죠. 그런 건 민족사에서 기술할 수 없죠. 민족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에 생긴 개념이에요. 그걸 가지고 저 고구려,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기술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예요. 국민국가가 탄생한 후에 모든 나라가 저지르고 있는 일종의 만행이죠.

-민족이나 민족주의라는 게 우리 근현대사에서는 나름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형성됐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지적으로 극복돼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쉽게 말해서 이제는 좀 어른스러워져야 한다는 거죠.

-지금 말씀하신 것과도 관련이 되는데요, 권력과 지식의 문제를 질문 드릴까 합니다. 선생님이 쓰신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을 보면 책이, 혹은 책을 통해 지식이 역사를 주도해왔다, 권력이 책을 통해 관철되기도 했다고 쓰셨습니다. 조선의 책 문화는 어땠나요?

지배 문화죠. 책이라는 것 자체가 전근대 어느 사회나 지배 문화입니다. 서양도 마찬가지고. 책이 워낙 비싸니까. 말하자면 활자가 발명되고 난 다음 쿠텐베르크 이후에야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면서 책을 구해 볼 수 있었고 그전에는 다 귀족계급 전유물이었어요.

-언문이나 한글 문화는 어떻게 해석해야죠?

한국 사회에서 금속활자가 나온 것은 고려시대지만 상용화된 건 조선시대로 봐야 하거든요. 활자가 대량으로 사용된 것은 세종 때부터인데. 당시에 한글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한글 활자가 없어요.

있긴 있어도 한문책을 언문으로 번역할 때만 잠깐 만들어 썼지요. 한글 활자 자체가 구한말까지도 없었으니까 민중에 대한 책의 대량 보급이라는 게 있을 수 없었죠. 한국어로 된 책이 순수하게 나온 것이 19세기 방각본 소설이에요. 그전에는 있을 수 없었죠.

-그렇다면 책이 지배의 도구에서 해방의 역할로 등장한 것은 우리 사회의 경우 언제부터인가요?

개항 이후죠. 다만 그것도 제한적이지요.

-한글 성경의 확산 같은 것과 관련이 있나요?

한글 성경이 퍼지고 갑오경장 이후 신분 제도가 무너지고 그때부터 비로소 민간 출판사가 생기기 시작해요. 근대식 인쇄기가 들어오면서 납활자가 들어와요. 그때부터 책을 찍기 시작했고 대중이, 국민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거죠. 그때부터 온전치는 않지만 지식이 해방되기 시작한 거죠. 목판본 만드는 데에는 돈이 어마어마하게 듭니다.

영남 지방, 안동 같은 곳에 가보면 목판본이 많은데 이걸 만들려면 비용이 엄청나죠. 그런 건 가문에서나 만들어야 해요. 그러니 책이 값싸게 나오겠어요? 집안의 누구 문집 만드는 데도 그렇게 판각을 해서 만드는데 민가에서 활자로 백성들 볼 책을 마구 찍는다? 상상도 못하죠. 지금 남아있는 한글 소설을 봐도 아주 조잡해요. 내용도 대부분 요즘 말하면 연속극과 똑같아요. 민중을 각성시키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조선 후기에도 책이란 철저하게 지배를 위한 도구였다는 건가요?

그렇죠. 글자를 익히는 것 자체가 어렵잖아요. 한자, 한문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조선후기가 되면 한자도 많이 알게 돼 사정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보면 선생님 작업이 역설적인 면이 있군요. 주류 문화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을 조명하려는 거잖요. 하지만 방법론적으로는 문헌을 통해서 하위 주체들을 복원하려는 건데, 정작 하위 주체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것도 아니고, 지배층의 글이나 드문 변론에 등장한 것을 겨우 발굴해내는 방식인데요.

그런 것과 더불어 기존에 알려진 작품들도, 가령 허생전 같은 것도 새롭게 해석해서 조선 사족체제의 지배구조를 폭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어떤 행복한 민족주의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어요. 과거, 전근대에서 가져올 것도 우리가 지금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이고. 그것도 최근에 와서야 그런 작업을 시작한 거죠.

-지금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해서, 과거에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작업인가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단순화한 것이 됩니다. 과거 조선시대를 사족체제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인데, 민족을 투영하지 말고 사족이 지배한 사회로 봐야 하고 그 체제 안에는 사족이 어떻게 자기 권력을 관철시킬까 하고 쓴 전략들, 그걸 다 드러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가 지금 근대사회와는 또 다른 면이 있어요. 근대사회라는 것은 국가권력이라든가 자본의 권력이 우리의 미세한 신체 영역까지 다 영향을 미치잖아요. 쉽게 말해 오늘 내 행적도 추적해보면 다 알 수 있어요. 반면에 전근대 사회는 지배체제가 그런 기술이 없기 때문에 파고들지 못한 부분이 많았어요.

그런 점에서 오히려 인간의 자율적인 공간이 많았다는 거죠. 그런 것을 어떻게 끄집어내느냐가 숙제예요. 전근대가 스스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아주 고대로부터 갖고 왔던 공동체적 삶, 자본이나 화폐가 전일하게 지배하기 전의 모습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그게 다 묻혀버렸다는 것이고 그런 걸 다 소환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림에 대한 책도 많이 쓰셨지요. 그림을 좋아해서입니까, 사료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인가요?

두 가지 다인데요. 하나는 내가 대학 다닐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지루하면 머리 식힌다고 참고열람실에 오래 있었는데 화집이 많아서 그걸 꺼내 봤어요. 그게 뒤에 그림에 대한 눈을 뜨는 데 도움이 됐어요. 또 그림이 중요한 사료가 될 수도 있어요. 회화사나 미술 전공한 사람은 그림을 미적 장치의 구조물로 보는데 나는 역사적인 자료로 보니까 접근이 다를 수 있죠.

내가 부산대에 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수 시절 이야긴데, 유명한 미술사학 전공자가 여기 와서 풍속화에 대해 강의한다는 거예요. 나도 풍속화에 대해 꽤나 봤고 관심도 있고 해서 들으러 갔어요. 당시 교양 한문을 강의하고 있던 때인데 1시간 강의하고 휴강하고 갔어요. 사람들이 몇 백 명이나 와서 꽉 찼더군요. 맨 뒤에 서서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엄청 하는 거예요. 듣다가 도중에 나왔어요. 그 강연을 주최한 연구소 간사가 내 후배인데, 내가 하면 저거보다 열 배는 더 잘할 수 있겠다, 했더니 해보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못할 줄 알고, 하고는 책을 한 보름 만에 썼어요. 그게 앞에서 <조선의 사람들, 혜원의 그림밖으로 걸어나오다>예요.

그 원고가 돌베개출판사에서 나오지 못한 것은 이미 이야기했지요. 그냥 묵혀 두었는데 푸른역사의 박혜숙 사장이, 책을 몇 권 안 낸 작은 출판사였는데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해서 그 원고를 인터넷으로 전송했더니 다음날 연구실로 찾아왔어요. 책이 되겠다면서 그림은 자기에게 맡기라고 했어요. 그 뒤에 그림을 계속 보다 보니 확장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김홍도 그림, 다른 풍속화도 넣고 해서 작업을 확장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나중에 나온 게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였어요. 풍속화는 상당히 많이 봤어요. 연구도 좀 했고. 그게 아마 미술사하는 쪽 사람에게는 영향이 좀 있었던 모양이에요. 누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이쪽 공부한 사람들이 잘 모르던 걸 알게 돼 고맙다고 하더군요. 풍속화를 그런 식으로 해설한 것은 아마 국내에서는 처음이었을 거예요.

-조선의 선비 문화 같은 것은 어떻게 보세요. 오늘날 되살려야 할 유산 중 하나로 이야기되기도 하는데. 선생님은 비판적이시겠네요?

그건 아니죠. 우리가 목사님이다, 신부님이다, 스님이다 하면 성직자 신분에 맞는 기대치가 있잖아요. 이태석 신부 이런 분처럼.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아는 성직자들의 행각이 좀 다르잖아요. 우리가 선비라고 했을 때는 그런 이상적인 형태, 기대치로서 선비를 이야기하는 거지 현실 속의 '레알(real)' 선비가 아니죠. 우리가 종교인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은 이상화된 종교인, 혹은 이상화된 드문 실현 사례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거잖아요.

선비도 마찬가지 같아요. 그래서 선비정신이라는 것 자체는 하나의 이상화된 것이고, 모델로서 관념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런 걸 실천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죠. 남명 조식이라든가, 아주 비타협적으로 실천하는 사람. 그런 부분은 굉장히 높이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어떤 개인의 인품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비를 아까 말씀하신 사족체제에서 구현되는 인물상으로 본다면 양면적인 부분이 있잖아요. 사족체제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거기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선비도 해당되는 것 아닌가요?

그때는 선비가 아니라 사족이라고 봐야 하고.(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와 연결되는 부분인데, 선비나 사족이 아무리 타락해도 그래도 건질 부분이 있어요. 왜냐? 자본주의적 근대에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서 그래요. 선비나 사족들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오만 짓 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로 안 건드리는 부분, 지키는 부분이 있어요.

선비라는 인간을 만들 때 주조한 틀이 <소학>이란 책이에요. 그 <소학>이 인간을 윤리적 인간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어요. 그 사람들은 적어도 <소학>을 다 외우고 그걸 체화해야 선비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러니 해서는 안 될 짓은 안 하는 거예요. 가령 돈으로 남에게 갑질하는 것. 그런 건 선비라면 안 한단 말이죠. 요즘과는 다른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되죠. 인간이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걸로는 다 똑같다고 하면 끝이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선비라든가 학문 사족들의 최종 목적은 윤리적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학문하는 목적이 뭐냐, 선비로서 최종 지향점이 뭐냐, 라고 하면 벼슬도 있고 다 있지만 최종 목적은 성인이 되는 것, 윤리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 돼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21세기 우리가 사는 사회 사람들의 최종 목적이 뭡니까? 돈 많이 모으는 거잖아요. 그러니 예전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거죠. 60년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어른 개념이 있었어요. 장유유서라는 질서가, 윤리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선비, 사족, 양반 사회에 대해 아무리 비판한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윤리의 완성이 목적으로 설정된 사회와, 돈을 많이 버는 자본 축적이 목적이 된 사회와는 전혀 달랐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사족체제, 선비 이런 것에서도 우리가 평가할 부분이 분명히 있죠.

그 사람들이 읽는 책이 뭐냐면, 지금 우리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 국영수잖아요. 조선시대는 <소학> <중용> <대학> <논어> <맹자>였어요. 기본적으로 윤리적 인간을 지향한다는 거죠. 성리학의 영역이 참 넓은데 그중 가장 방대한 영역이 성과 리와 기의 문제, 즉 심성의 문제를 따지는데, 그게 뭘 지향하느냐면 어떻게 하면 인간이 물욕을 제한하고 자기를 절제하고 성인이 되는 어떤 명징한 마음 상태에 도달하느냐를 두고 따져요. 목적을 거기에 두는 사회니까, 국영수 배워서 국민이 되거나 돈을 벌어야 되는 도구적 학문을 배우는 사회와는 많이 다르죠.

-예전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인간의 품격'이라는 책을 썼을 때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성공 중심 문화를 비판한 책인데요, 대안으로 겸허와 겸양 같은 덕목을 얘기해요. 이게 동양적인 유교적 가치잖아요. 그래서 제가 우리는 그거 옛날에 추구했는데 근대 유럽의 힘에 눌렸다. 서구는 세상을 힘으로 평정하고 이제 와서 그런 덕목을 중요하다고 하니 아이러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전근대에서 뭘 가져올 것이냐 잘 봐야 해요. 지금까지 우리 역사학이 과거를 비판할 것은 하되 과거로부터 가져올 긍정적인 게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꼭 민족주의에서 시작해서 들이대요. 우리 민족은 과거에 겸손했다든지 이런 식으로. 그런 것은 빼고 인간 보편에 대해 호소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네,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주의... 얼마 전에 칼럼에도 쓰셨던데, 평전이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꽤 쓰신 것 같은데요. 얼마나 쓰셨죠?

홍대용은 탈고해서 보냈고, 정조는 꽤 많이 썼어요. 초고는 얼추 썼고, 장지연도 초고는 거의 썼죠. 조수도 없이 자료를 보는 것부터 혼자 다 해야 하니까. 힘이 달려서. 옛날 같으면 빨리 맺는데 맺질 못하고 있어요.

답답한 게, 공부를 지독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아요.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워요. 우리 과 정출헌 교수가 밀양 캠퍼스에 점필재 연구소를 냈는데 한겨레신문사와 같이 평전 시리즈 100권인가를 계획하고 내다가 한겨레에서 손을 뗐어요. 이완용 평전 같은 근대인은 나왔는데, 조선시대로 거슬러서는 안 나와요.
왜냐하면 한문이라는 숲을 통과해야 하니까. 한문도 봐야 하고 조선 사회라든가 문화를 많이 알아야 하니까. 그걸 공부하는 게 힘들어요. 그래서 잘 안 나와요. 자꾸 인문학 위기라고 해서 공부할 사람도 안 오게 하니까 걱정이에요. 이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예전엔 책 읽는 것에 대해 경외감 같은 것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하는 사람을 안 만들려는 게 이 체제의 목적 같아요.

-자동화라든가 알고리즘이라는 게 인간의 고민을 필요 없게 하려는 거지요.

알고리즘 입장에서는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문제 제기하는 것들은 귀찮고 성가신 존재거든요. 예외적인 것을 제출하는 것은 알고리즘 만드는 데에 위험하거든요. 그러니 정말 심오하거나 통찰하는 것은 드물어지죠. 내 다음 세대는 진짜 걱정이에요.

-공부방 이름을 책주산실(冊酒山室)이라고 붙이셨더군요.

주로 집에 있다 보니. 옛날 2013년에 부산대에서 교수들이 데모를 했어요. 총장실 점거까지 했어요. 총장이 직선제를 고수하기로 했는데 되자마자 교과부에서 강요해서 폐기처분해버렸어요. 그래서 다른 교수 몇 분이랑 총장실에 가서 7개월 점거 농성을 했어요. 그때 총장실 들락거리는 교수들 이면과 학내 민주주의 반대하는 사람들 진면목을 워낙 많이 보고는 덧정이 없어져서 농성 마친 후에는 학교를 거의 안 나왔어요. 집에서 책 읽고 원고 쓰고, 오후 4-5시쯤 산에 갔다가 내려와서는 막걸리 사와서 냉면 그릇에 부어 마시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 방을 '책주산실'이라고 했어요.

술을 좋아해요. 보통 아침 4시 반에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하는데 오후 4시반이나 5시쯤 되면 아무것도 안 돼요. 그때 아내와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두 시간쯤 걸려요. 내려올 때 막걸리 두 병 사와서 냉면 사발에 부어 마시고 얘기하다가 자는 게 일과인데. 한동안 건강이 안 좋아서 못하다가 최근에 다시 마시기 시작했지만.

-4시 반이면 꼭두새벽인데 일어나서 뭐하세요?

나는 학교도 아주 일찍 나와요. 6시나 6시 10분이면 연구실에 와요. 여기서 책도 읽고 원고 쓰고 점심 먹고 강의하고 집에 가는 거죠. 여섯시쯤 밥 먹고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안 해요. 건강 때문에 쓰러진 후부터는 집에 와서는 그냥 TV 보거나 아내와 이야기하거나. 산에 가거나 산보하는 정도. 저녁 때 왔다가다 하다 보면 9시반쯤 자요.

-독서량이 엄청나신데, 전공 책이나 자료 말고 따로 보시는 다른 분야 책은요?

책방이 세 군데에 있는데, 내 방 안에는 한문학 하는 책이 좀 있고 다른 방에는 이런저런 다른 분야의 책들이 대부분에요. 조금씩 조금씩 사들여서 짬나는 대로 읽고 하지요.

-정해놓고 일괄 구매하시나요?

신문 서평도 보고 하다가 관심이 가면 검색해서 사들이기도 하고. 2015년에 인도를 한 달 갔다 왔는데 돌아와 인도에 관련된 책 40-50권 구해 두어 달 내내 그거 읽었어요. 재미있어요. 『마하바라타』 같은 책은 이름만 들었는데, 이번에 읽게 되었지요.

-인도는 왜?

책 써놓고 머리가 아파서. 그런데 가서도 여행기를 썼지요. 남인도로 갔는데, 뭄바이에 내려서 아래로 인도의 땅끝마을인 칸야쿠마리를 돌아서 요새 제일 잘 나가는 도시인 첸나이로 갔지요. 거기서 스리랑카로 갔다가 돌아왔죠.

-부산에서 줄곧 강의하고 공부하셨는데, 지방에서 학문하는 데서 불리함이나 어려움은 없나요?

그런 건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부산이 더 좋은 면이 있어요. 한때는 몇 번 기회가 있어서 서울에 가려고도 했는데 외적인 이유로 좌절됐지요. 아마 젊은 시절 서울 있었으면 학문 외적인 일로 바빴을 거예요. 부산 오니까 그런 것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어 좋았죠.

중간에는 정보도 개방되고 인터넷하고 자료가 디지털화하면서 경향간에 정보 격차가 거의 줄었어요. 물론 고서점에서 나오는 개인 자료 수집이야 접근이 좀 어렵지만, 그런 거야 서울 있어도 돈 없으면 구입하지 못했을 테고. 학문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지장이 없어요. 책을 내는 데도 별로 어려움도 없고.

또 대한민국이 큰 나라인 줄 아는데 중국이나 인도에 가보면 우리는 지방 규모도 안 되잖아요. 다만 대학원 진학생이나 학생, 제자들이 잘 안 오니까 그런 게 어렵죠. 서울은 요즘은 모르겠어요. 마찬가지라고들 하더군요.

-왜 그런 질문을 드리냐면 학문도 주변에 동료나 동학이 있으면 자극도 되고 하니까.

나는 원래 시작할 때부터 아웃사이더 비슷하게 시작했고 또 내가 스스로 선택한 공부 방법이 다른 사람과는 또 다른 것 같아서 별로 자극을 받을 것도 없었지요. 그런 점에서 서울에서 누가 뭘 많이 하더라, 어떤 주제가 유행하더라, 하는 그런 것에 영향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다른 사람이야 그렇게 하든지 말든지, 내가 학문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계속 문제의식이 이어져 나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지요.

-힘들거나 외롭다거나 그런 느낌은요?

전혀. 바빠서 그런 것을 느낄 틈도 없었지요. 의고파, 공안파도 내가 처음 문제 제기를 했어요. 당시 한문학계에서는 내재적 연구를 많이 할 때였는데 밖의 중국과의 관계에서 엄청난 게 생겼다는 것은 내가 주장하는 바가 많았어요. 그러니 오히려 신나죠. 아무도 생각 못한 걸 내가 하는 거야, 이러면서.(웃음)

-우리 문학 공부를 시작할 때 한문학은 거의 배제된 상태였다고 했잖아요. 윗세대에는 한 분이 없었다는 얘긴데.

제가 대학 진학할 때 부산대에는 국문학과와 국어교육과가 있었어요. 후자는 졸업하면 국어 선생님이 되는 건데, 나는 그게 싫었어요. 사범대에 오게 된 것은 집안의 어려운 경제적 형편과 관련이 있는데. 사범대 국어교육과는 원래 꿈에도 생각 안 했어요.

고교 시절 원서 쓸 때 내가 상과대를 가려고 하니까, 담임선생님이 아마 부산대 진학률을 높이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너는 집안도 어려운 데다가 사범대는 등록금도 3분의 1밖에 안 되니 그리로 가라고 했어요. 그때 부모님 병세도 깊어서 학교에 모시고 갈 수도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한참 있다가 선생님 시키는 대로 하겠다 했지요. 그게 사범대 간 이유지요. 입학 후에는 교사 될 생각은 없고 하니까 막걸리 마시고 이리저리 시간을 허비하면서 허랑하게 살다가(웃음) 한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어요.

79년, 80년, 이때는 부마항쟁, 광주 민주화 항쟁 나고 할 땐데 학교가 계속 휴교였어요. 그때 나 혼자 한문을 공부했어요. <논어>도 보고 <맹자>도 보고, 홍인표 선생이 쓴 <한문문법> 책도 보고. 그때 학교에는 한문 가르치는 선생님이 딱 한 분 계셨는데, 김종우 교수님이라고 한문을 잘 하시는 분이었지요. 광주민주항쟁으로 1학기 내내 휴학했다가 2학기 되어 개학하니까 한 달인가 수업하시다가 그만두시더군요. 그때는 원래 4학년 2학기 되면 수업도 거의 안 했어요.

서울에 가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에서 한문학 과정을 들어가서 배웠어요. 그때 최신호 선생님이 석사논문 지도교수님이셨는데, 학문적으로는 훌륭한 논문도 많이 쓰셨지요. 하지만 전통적인 지식은 별로 전수해 주시지 않았지요. 한문학이 뭔지에 대해 연구자로서 좀 알게 된 것은 박사 과정에 가서 경인 선생님(지도교수이신 임형택 선생님)께 배운 뒤지요. 나는 다른 능력은 없고, 선생님이 하시는 것 따라하는 건 잘했어요. 경인 선생님 공부하시는 것 보고 공부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고 그저 따라 했지요.

-서울에 가실 때 방향을 정하신 셈이네요.

네. 왜 그러냐면 79년 3학년 2학기 때 부마항쟁이 크게 났어요. 나는 처음부터 데모 조직하고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이고, 그냥 젊으니까 의분에 차서 돌아다녔어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래서 원고지에 그 이틀 동안의 일을 기록하기까지 했지만, 그 이면의 역사적 의미를 알 리가 없었지요. 학교 휴교령이 났는데 탱크가 들어와 있어요. 대학생처럼 보이면 다 잡아간다고 해서 마산으로 달아나 골방에 숨어 있었어요.

어느 날 라디오에서 장송곡 같은 게 흘러나오는데 박정희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듬해 5월에 광주민주화항쟁이 터지고 4학년 2학기가 됐어요. 역시 도저히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대학원에 갔죠. 석사 과정 들어가면서 연구자의 길을 택한 셈인데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공부하는 것은 힘들지만 늘 즐거웠어요. 지금도 공부하는 게 제일 좋아요. 책 읽고 글 쓰고 새로 구상하고 그게 제일 즐거워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운전도 못해요. 옛날 학교 동창들 모임이 있는데 모두 골프를 칠 줄 알아서 모임이 있으면 으레 골프를 치는데, 나는 그것도 못해서 좀 쓸쓸하지요. 지금도 일상이 굉장히 단조로워요.

-그러니까 그만큼 성과가 나오는 거겠죠?

모르겠어요. 나는 학교 보직도 안 해봤어요. 학과장은 20몇 년 동안 두 번 했는데 두 번 다 다 하지 못하고 그만 두었지요. 학부제 도입할 때 반대 투쟁 위원회 들어가서 학장 탄핵해서 쫓아낸 적이 있어요. 그러니 학과장을 못 하겠더라고요. 두 번째는 BK21 사업 반대 투쟁하다가 그만두고. 그래서 보직도 안 해봤고 하기도 싫었어요. 생활을 간소하게 가지는 게 제일이다 싶어서 그렇게 살았어요. 요즘은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은 저러려니 하고 말죠. (웃음)

-지금 저술 계획은요?

지금 쓰고 있는 초고 상태의 책 정리하고, 평전 쓰던 것 다 정리해야지요. 그게 당분간 큰 일로 남아있고. 책과 지식의 역사와 풍속사를 잘하면 정년 때까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년 후에는 우리집 부근 지하철 장산역 가까이 오피스텔 얻어서 책 갖다놓고 그리로 출퇴근하려고요. 그렇게 해서 체력이 받쳐 줄 때까지 읽고 쓰는 것이지요. 달리 할 일도 없고.

-필생의 역작이랄까 도전해보고 싶은 목표 같은 게 있나요?

딱 하나 있어요. 어느 출판사하고 이야기했는데, 사람들 죽음 있죠. 저번에 상가에 갔는데, 요즘은 오늘 상이 나면 모레 출상하잖아요. 문상 온 사람은 '나 왔다' 하는 도장 찍는 것 같고 상 치르는 사람은 빨리 이 귀찮은 일을 처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죽음을 이런 식으로 해도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과거 조선시대 보면 사람이 죽으면 제문도 쓰고 행장도 쓰고 유사도 쓰고, 죽음을 굉장히 품위 있고 장중하게 처리했어요.

그래서 죽음과 관련된 제의와 문학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기능에 대해 한번 써보고 싶어요. 진짜 진심을 갖고 정중하게.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인간의 죽음을 이렇게 허술하게 취급하고, 사람을 마치 귀찮은 시체 치우듯이 치우는 것, 이런 식으로 죽음을 보내는 것은 인간의 생 자체에 대한 모독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도 옛 문헌으로 이야기하는 식인가요?

그렇죠. 앞으로 시간이 나면 자료를 모아서 한번 써보려고요.

작성자 정보

북클럽 오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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