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당신 추기경 맞아?" 가장 낮은 곳에 임했던 삶

조회수 2017. 8. 4. 21:0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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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생애를 스스로 '바보'라 했던 거목 김수환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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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7주기를 앞두고 공식 전기가 출간됐습니다. 서울대교구 교회로부터 인가를 받아 펴낸 최초 공인 전기입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 산간 옹기장이집에서 태어나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라는 기록을 세웠던 사람, 격동의 우리 현대사 중심에서 교계의 수장을 넘어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했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사진과 함께 반추해 봅니다. 저자인 이충렬 전기 작가가 애써 수집해 책에 수록한 사진 360여 장 중 일부를 제공받아 소개합니다. 파란만장했던 87년 세월은 그가 한 그루의 우뚝한 나무이자 깊은 숲이었음을, 또한 그 속에는 우리 현대사의 장면 장면들이 나이테처럼 뚜렷이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1920년 옹기장이집에서 출생. 아호도 '옹기'
김수환 추기경은 1920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사진 속 왼쪽 뒤에 보이는 건물이 성유스티노 신학교다. 그 뒤편에 대구교구 주교관이 있었다. 이 인근에 천주교인들이 많이 살았다. 조선 말기 천주교가 박해받을 때 신자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붉은 흙으로 옹기를 구워 내다 팔면서 연명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아호도 '옹기'라고 지었다. 하지만 신앙의 선조들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 부족한 게 많다며 가슴 속에만 간직했다. 훗날 서울대교구가 북방 선교를 위한 사제 양성을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할 때 이름을 옹기장학회라고 붙였다.

원래 이름은 김'순한'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본래 이름은 '순한'이었다. 형제 중 첫째와 둘째는 달수와 필수, 셋째와 넷째는 동한과 순한으로 항렬에 맞춰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신학교 예비과 서류 준비를 하다가 이름이 '수환'으로 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출생신고 때 충청도식 억양으로 불러준 이름을 호적계 서기가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우짜겠노? 수환이도 괜찮다 아이가?" 하셨다. 순한도 속으로 '김수환, 김수환' 되뇌어보니 나쁜 것 같지 않았다. 그때부터 김수환으로 굳었다.
어머니 나이 마흔에 가졌던 늦둥이
김 추기경의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셨을 때 당신 연세 40이었고, 당신이 낳은 맏딸이 첫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외손자를 곧 갖게 될 그 나이에 나를 임신하신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서도 당신 젖을 물리지 않으셨고 먼저 애기를 낳은 누나 젖을 먹였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내가 병으로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대구 주교관 근처에 사셨기 때문에 죽기 전에 견진성사를 받고 죽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어머니는 나를 안고 달려가 주교님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게 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 견진성사의 은혜인지 죽지 않고 살아났다. 어머니는 그제야 불쌍하다고 당신 젖을 먹이셨다 하셨다."
"장가도 가서 효도하고 싶었지만..."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입학 사진. 앞 줄 열 명이 신입생으로, 왼쪽에서 세 번째가 소년 김수환이다. 현재 전해지는 추기경 사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김 추기경의 할아버지가 순교자였다. 어머니는 김 추기경과 형 동환에게 신부가 되라고 했다. 당시 추기경은 어린 마음에 커서 장사도 하고 장가도 가서 효도를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남루한 교복에 사전도 빌려 봐야 했다
1938년경 사진. 오른쪽 두 번째가 김 추기경이다. 교복 바지가 남루하다. 김 추기경은 "소신학교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라틴어사전을 사지 못해 친구들 것을 빌려봤다"고 회고했다.
"스테파노, 요왕 선생님이 왜 부르신 거니"
수환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대답했다. "며칠 전에 수신시험 답안지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라서 천황의 칙유(친히 내린 말)에 대해 소감이 없다고 썼다고 따귀를 맞았어.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 되겠다는 말씀도 하셨고. 아무래도 학교에서 쫓겨날 것 같아." /1권 100-101쪽
일본 신학교 유학 도중에 징병
1943년 일본에 있던 소신학교 동창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 추기경이다. 김 추기경은 서울 동성학교의 소신학교 과정을 졸업한 후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설발돼 도쿄 조치(上智)대학으로 유학 갔다. 이때 일제의 학도병 징용령에 따라 입대했다. 처음에는 일본 본토에서 근무하는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으나 사상검열에서 탈락해 일등병으로 지치지마섬에 배치됐다.
신학생 시절 가족들
1944년 1월 초에 찍은 가족 사진.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추기경. 그 오른쪽이 셋째 형 김동한 신부. 앞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어머니.
학도병 복무 시절 유해 발굴 작업
실종된 미군 조종사 유해 발굴 작업. 가운데 안경 낀 사람이 김 추기경으로 추정된다. 학도병으로 지치지마섬에서 복무하던 중 일제가 항복하고 미군이 상륙하면서 작업에 투입됐다. 나중에 김 추기경은 괌에서 열린 일본군 전범재판 증인으로도 참석했다.
일본군이 흩어지자 조선인 학병들은 우르르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김수환은 아, 조숙에서는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겠구나,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십자성호를 그은 후 감사기도를 드렸다. 안병지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일어나자 조선인 학병들은 축하 담배라며 서로 담배를 권했고, 김수환은 이렇게 좋은 날 나도 한 개비 피워보자며 담배를 청했다. 처음 피워보는 담배였지만, 쓰기는커녕 오히려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권 137쪽
형인 김동한은 해군 최초 군종신부
둘째 형 김동한 신부(오른쪽)가 해군 최초의 군종신부로 입대하기 전 가족을 만나러 대구에 왔을 때 추기경과 함께 찍은 사진. 김동한 신부는 훗날 동생이 주교, 대주교, 추기경이 되었을 때 누를 끼칠까봐 근처에 나타나지 않고 먼 시골로 가 가난하고 소외된 결핵 환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나를 받아줄 수 있겠어요?"
그는 깜짝 놀랐다. 하니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중략) 그는 도망치듯 대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었다.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사제의 길을 가야 할 사람이라는 확신이 굳어졌다.
김수환은 보육원으로 갔다. 그녀를 만나 단호한 목소리로 청혼을 거절했다. 그녀가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못하도록 화도 냈다. /1권 157-158쪽
엎드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다
김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1951년 9월 15일. 6.25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사진은 김수환 당시 부제(사제 전 단계)가 사제 서품식에서 부복해 있는 모습.

*부복(俯伏)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청원을 최고로 표현하는 동작을 말한다. 아울러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비우고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겠다는 뜻도 포함돼있다. 두 사람이 엎드려 있어서 사진만 봐서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당시 함께 서품을 받았던 정하권 부제(현재 몬시뇰)는 오른쪽부터 연장자 순으로 부복했다면서, 오른쪽이 김 추기경이라고 증언했다.
첫 사목지 안동성당 주임신부 시절
김 추기경이 신부가 된 후 첫 사목지가 안동읍성당이었다. 뒤에 안동성당이 보인다. 당시 안동읍 인구가 5만 정도였고 안동성당 교적에 올라있던 신자 497명 중 80%가 극빈자였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전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전 형 김동한 신부(군종 신부, 오른쪽)와 찍은 사진. 김 추기경은 사회와 비신자들에게 가톨릭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좀 더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유학지로 벨기에 루뱅 대학을 생각했다가 그리스도교 사회학의 대가인 요제프 회프너 교수가 있는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바꿨다.
독일 유학 시절 탄광 체험
1957년 8월 독일에서 간호직업훈련을 하는 한국 수련생들과 탄광 체험을 하면서 찍은 사진. 유학 중에는 학교 수업 외에도, 교포 간호훈련생들의 눈물겨운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도 김수환 학생신부의 몫이었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 발행을 맡다
김 추기경은 34세에 유학을 떠나 8년 만인 42세에 귀국했다. 곧바로 대구 가톨릭시보사 상임사장에 서임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발표한 가장 중요한 문헌인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전문을 직접 번역해 수 차례에 걸쳐 나눠 소개하기도 했다.
'세상 속의 교회'를 위해 펜을 들다
김 추기경이 대구교구장 비서신부로 있을 때 가톨릭신보에 다섯 번에 걸쳐 발표한 글. 가톨릭적 생활의 회복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가 34세에 왜 독일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러 갔는지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마산교구 초대교구장 서품 "많은 이들을 위하여"
김수환 신부의 주교 서품식. 위는 제대 앞에 엎드린 김 주교, 아래는 신부들의 순명 서약 장면이다. 그는 부산교구에서 분리된 마산 교구의 초대교구장 주교로 임명됐다.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를 사목 표어로 정했다.
2년 만에 서울대교구장 대주교가 되다
1968년 5월 29일 명동성당에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플래카드가 내걸린 모습. 김 추기경은 주교가 된 지 2년 만에 대주교로 승품되면서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그는 '세상 속의 교회'를 사목 목표로 정하고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첫 대면 "선을 넘지 마세요"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한 후 인사차 청와대를 방문해 박 대통령과 환담하는 모습. 비서관은 대통령과 악수할 때 바닥에 그려진 선을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야 자연스레 허리가 굽어지기 때문이었다. 면담 시간은 15분이라면서, 가능하면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다
1969년 3월 28일 김 추기경은 47세 나이에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면서 교황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됐다. 한국 천주교의 경사였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 대해서는 '순교자의 나라'인 한국 가톨릭의 위상이 높아진 결과라는 해석과 함께, 교회의 쇄신과 현대화에 대한 기대가 반영됐다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잠시 강론을 멈추고 신자들을 바라봤다. '독재' '폭력혁명' 같은 단어가 나오자 미사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중략)
"왜 그럽니까? 만약 이 법이 통과돼서 대통령이 이 법(국가보위 특별조치법)을 수행한다면 국민은 대통령을 신뢰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나머지 그분을 경원하게 될 것입니다. 경원하는 나머지 그분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훗날 알려지기로, 박 대통령은 이 순간 방송 중단을 지시했다. /1권 389-390쪽
독재로 치닫던 박 대통령.."자기 말만 했다"
박정희 정부가 독재로 치닫으면서 천주교와 긴장이 고조됐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육영수 여사가 김 추기경과 박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했다. 특별열차를 함께 타고 진해로 내려간 김 추기경(맨 오른쪽)이 박 대통령의 국정 계획을 듣고 있는 모습. 기차에서 7시간, 진해 공관에서 4시간, 모두 11시간 동안 마주 앉았지만, 박 대통령이 설명만 이어졌을 뿐, 김 추기경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국 성명 "비상사태 철회하라"
박정희 정부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8.3 긴급명령(사채동결 조치)을 발동했다. 이에 맞서 김 추기경은 정부의 비상사태 철회를 요구하면서 '이 난국에 임하는 천주교회의 소신 6개항'을 발표했다.
유신 정권과 대립하다
박정희 정부가 1972년 10월 유신과 함께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은 높아져 갔다. 김 추기경은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정부가 민청학련 사건 연루자로 지학순 주교가 구금됐다가 풀려난 후 성모병원 마당에서 양심선언을 낭동하는 모습을 김수환 추기경이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다. 당시 언론에는 양심선언 내용이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지 주교는 그 뒤 재판에서 '내란 선동 및 긴급조치 위반' 죄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버스 타고 간 빈민촌 "당신 추기경 맞아요?"
김 추기경은 몸소 사회 약자들을 돌보는 것을 좋아했고, 시간이 나는 대로 찾았다. 빈민 지역 공동체인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의 전화를 받고, 목동 무허가촌 인근에 지은 '협조의 집'을 찾아가 함께 찍은 사진. 추기경은 버스를 갈아타고 수녀들이 알려준 정류장에서 내려 물어물어 수녀원에 도착했다. 동네 사람들은 진짜 추기경이 맞는지 따지듯이 묻기도 했다.
무너진 유신 정권과 조문
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청와대에 차려진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는 모습. 이에 앞서 김 추기경은 시국 기도회에서 유신 정권을 향해 "국민은 절대로 계속 눌려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기를 누르고 있는 정부에 대해 항거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독재정권들이 무너지는 근본 이유입니다. (중략) 우리에게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라고 경고했다.
신군부 전두환 대통령과 면담.."비상계엄 해제를"
김 추기경은 1980년 청와대에서 전 대통령을 만나 비상계엄의 빠른 해제를 요청했다. 김 추기경은 "정부가 주장하는 정의사회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위정자들에게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인간 상호간 사랑의 정신이 사회에 자리잡고 궁극에는 밝은 사회,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어느 것 하나 명쾌한 답을 주지 않은 채 정부 입장만 이야기했다고 한다.
전두환 소장은 12.12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길게 설명을 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김수환 추기경은 12.12사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전 소장 말을 들으니까 어떤 점은 좀 이해되는데,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전체를 위한 정권이 서부활극 모양으로 돼서는 안 됩니다. 어느 쪽이 총을 먼저 빼들었느냐에 따라 군의 전권이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전 소장쪽이 총을 뽑았기 때문에 군대의 실권을 잡은 것 아니오?"
전두환 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2권 21-22쪽
난지도 찾아가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으로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난지도 '아기들의 집'을 찾아가 성탄미사를 봉헌하는 김 추기경. 이날 방문 일정이 기자들에게 알려져 대혼잡이 일자 다음 해부터는 비공개로 진행했다. 이날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 통조림으로 만든 저녁을 주민들과 함께 먹으며 이곳 사람들을 위로했다.
부천 성고문 사건.."무어라 위로하면 좋을지"
부천경찰서에서 여학생을 성고문한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피해자 권인숙 씨에게 보낸 자필 위로 서한. 권 씨의 변호인단 중 한 명인 김상철 변호사가 당사자에게 큰 위로가 되고 사건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강론
19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후 김 추기경은 미사 강론 등을 통해 각성을 촉구했다. 강론 원고를 서울대교구 각 성당 주일미사 때 배포되는 '서울 주보'에도 싣도록 했다. 2월 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발행한 주보.
성매매지역 '막달레나의 집'에서 막걸리를 나누며
'막달레나의 집'은 서울대교구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 속한 복지기관으로 용산역 부근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곳이었다. 김 추기경은 이옥정 복지회 대표의 요청으로 이곳을 찾아가 격의 없이 윷놀이도 하고 막걸리도 건네며 시간을 보내다 왔다. 시골 성당에 갔을 때는 신자들과 화투 '나이롱뽕'을 배워 어울리기도 했다. 그는 늘 낮고 그늘진 곳을 마다하지 않았다.
막달레나의 집 자매들과
용산 막달레나의 집에서 봉사하는 이옥정 대표(맨 왼쪽), 문 요안나 수녀(맨 오른쪽) 등과 찍은 사진. 문 수녀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파견돼 부산 메놀리병원 문 앞에서 밀려드는 환자에게 번호표 나눠주는 일로 '문 수녀'라 불리게 됐다.
사후 안구기증 서약에 앞장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김 추기경은 '한마음 한몸 운동'을 선포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후 안구기증 운동', '헌미헌금으로 빈곤국가 돕기' 등을 주도했다. 김 추기경은 1990년 안구기증 서약서에 서명했다.
'내 탓이오, 내탓이오'
김 추기경에 승용차에 '내 탓이오' 스티커를 붙이는 모습. '내 탓이오'는 가톨릭의 '고백의 기도'에 나오는 구절이다. 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신뢰 회복 운동으로 스티커를 배포했고 전국으로 퍼졌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진보적인 자세에서 보수로 방향 전환을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진보에서 보수로 바꾸거나 자기정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때그때 종교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계속 기도를 해왔습니다. 민주화가 안 되었을 때는 민주화를 이야기했고, 요즘처럼 민주화 과정에서 혼란이 생기면 우려를 표명한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2권 267쪽. 1990년 9월말, 경향신문 창간 44주년 기념 인터뷰 중에서
유서대필 조작 사건과 불면증 속 고뇌의 기도
1991년 5월 20일 서울 가르멜 수녀원에서 열린 십자가의 성 요한 서거 400주년 미사 시작 전 목장에 의지에 기도하는 김 추기경. 그는 당시 어려운 시국을 맞아 극도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날 강기훈 씨 유서대필 의혹 반박 기자회견이 있었다.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은 서준식 전민련 인권위원장과 함께 명동성장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고 정부는 공권력 투입을 경고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란


1991년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 김기설의 분신자살에 대해, 검찰이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처벌한 사건이다. 강기훈 씨는 1991년 5월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서강대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린 전국민족민주연합 고(故)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1994년 만기 출소하였다. 그러나 2005년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유서의 필적이 자살한 김기훈의 것으로 보인다는 결과를 내놓았고, 2007년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김기설의 유서 재감정을 의뢰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07년 11월 유서는 김기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1991년의 감정 결과를 뒤집었다.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의 최종판결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추기경님 전용차는 티코"
1992년 7월 서울 주요 일간지에 실린 티코 자동차 광고 만화에 김 추기경이 등장했다. 추기경이 작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본 대우차 직원이 '국민 계몽' 차원의 광고 허락을 요청했다. 하지만 광고가 나간 뒤 '추기경의 상업적 이용'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중단됐다. 어느 것 하나 평탄하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외국인 근로자와도 손을 맞잡고
추기경 서임 25주년이 되던 1994년 그는 거창한 경축 행사를 사양한 채 4월 24일 명당성동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 후 성당 앞마당으로 나와서 외국인 근로자들과 손을 잡고 위로했다.
"눈물 흘릴 줄 아는 사회가 됩시다"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전진상복지관이 1989년 1월 새 건물을 짓기 전 임시로 차린 비닐하우스에서 20주년 기념미사를 드리고 봉사자들과 찍은 사진. 1975년 판자촌에서 시작한 복지관은 의료봉사와 빈민구제사업을 병행했다. 그는 이날 강론에서 "우리 모두 새해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몰인정한 사회, 돈만 아는 사회가 아닌,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 정이 있는 사회,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회로 변화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노력하며 기도하며 살아가자"고 했다.
추기경의 분노
1995년 6월 명동성당에 처음으로 공권력이 투입된 후 김 추기경이 임시 소집된 서울대교구 긴급 사제평의회를 마치고 침통한 표정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정부는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한국통신 노조 간부들에 대한 구속영장 집행을 위한 협상이 결렬되자 공권력을 투입했다.
망월동 5.18 묘역을 찾다
1996년 2월 8일 김 추기경은 광주 망월동의 5.18 묘역을 찾아 희생자와 민주인사들의 영령을 위한 기도를 했다. 피해자 유족으로부터 "광주 망월동 민주화묘역이 확장된 장소로 옮겨가기 전에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윤공희 광주대교구 대주교 등과 함께 방문해 헌화했다.
그분들의 지적은 저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지금까지 너무 칭찬 말씀만 듣고 살아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는가" 하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을 때 '너는 그동안 칭찬을 다 들었기 때문에 나에게 칭찬 들을 말은 없다'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도 했습니다. 비판과 욕을 먹는 것이 제 삶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강연에서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고 한 것은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2권 178쪽
달동네 찾은 추기경 "바다 위 외로운 섬 같구나"
서울 강북구 미아동 재개발 지역의 달동네 언덕길을 20분 정도 걸어 올라갔다. 달동네 제일 높은 곳에 솔샘공동체가 있었다. 철거일을 며칠 앞두고 주민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았다. 그는 산 아래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이곳은 서울이 아니라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솔샘공동체는 이전해 주민 자립을 위한 봉제생산협동조합, 솔샘일터, 재활용협동조합 등으로 발전돼 갔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 배려합시다"
1990년 6월 16일 금호동 '샛마루공동체'가 운영하는 출소자들 재활공동체인 '평화의 집'을 방문한 김 추기경. 1987년 상계동 철거민들이 명동성당에 와서 천막을 쳤을 때, 김 추기경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통한 교회의 복음화' 정신을 강조했다. 이 때 여러 가난한 지역에 공소가 설립됐다. 그 중 한 곳이다.
"고 신부, 고독해보았는가?"
"예, 고독하게 사는 편입니다."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절규하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시려고 그러시나 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겠지? 아마, 죽고 나면 자네나 나나 모두 하나일 거야. 내가 죽으면 자네 꿈에 나타나서 꼭 가르쳐주겠네." /2권 524쪽 (2008년 5월 23일 고천근 비서신부의 일기에 기록된 대화)
"나를 용서하세요"
김 추기경은 소신학교 시절 반장을 했던 최 도마(토마스) 형제를 용인 성직자묘지에서 만나 인사를 받고도 알아보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가 그 사이에 화상을 입은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이 사실을 들어서 알고 두고두고 자책했다. 일기장에까지 썼다. 몇 년 후 성탄전야 미사에서야 그를 만나 포옹했다. 이어 그와의 인연을 신도들에게 소개한 후 헤어지면서 사죄의 편지까지 건넸다. 자필 글씨로 "제가 도마 형을 알아보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하여주십시오. 용인서 못 알아본 것은 절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 신학교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즉시 알았을 텐데... 부디 주님의 은총 속에 평안하시기를 빕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내가 사실은 바보야..."
2007년, 김 추기경이 85세가 되던 해였다. 동성고등학교 동창회에서 개교 100주년 기념 장학금 마련 미술전을 기획했다. 김 추기경을 찾아가 그림을 부탁했다. 앉은 자리에서 오일스틱으로 도화지에 까까머리 얼굴을 그린 후 '바보야'라고 적었다. 자화상이었다. 추기경은 "내가 사실은 바보야...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걸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라고 했다.
아, 아득한 그리운 옛집
김 추기경은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 자화상을 그린 후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선산에서 네 살 때 이사 가서 8년을 살았던 경북 군위 용대리 옛집에서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종이 위에 오일파스텔로 쓱쓱 그려나갔다. 초가 지붕을 그리고 집 옆에 있던 미루나루도 그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기다리며 바라보던 초승달도 그려넣었다.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이었고, 70년도 더 지난 아득한 세월의 달이었다.
말년의 모습
추기경은 은퇴 후 혜화동 주교관에서 살았다. 기력이 떨어진 후로는 외출도 자제했다. 주교관 뜨락과 뒷동산을 걷는 일도 쉽지 않았다. 조금 걷다가 힘이 들면 벤치에 앉아 북한산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곤 했다.
"여러분들도 서로 사랑하세요"
2009년 2월 16일 김 추기경은 전날 시작된 폐렴 증세로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다. 문병 온 이들에게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세요."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후 6시 12분 선종했다. 87세였다. 다음 날,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각막이식수술을 받고 눈에서 붕대를 풀었다. 빛이 보였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사랑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현대사에서 몇 안 되는 정신적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약자를 사랑했고,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던 어려운 문제를 대화를 통해 풀어내곤 했던 사회 갈등의 중재자였다. 이런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보여준 삶과 정신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가치관에서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과 방법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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