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언어의 기원은 詩

조회수 2018. 10. 2. 05: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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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전통에서 본 말과 단어의 진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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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은 언어의 기원에 관한 흥미로운 글입니다.


영문 글로벌 지식 사이트인 이온(Aeon.co)에 소개된 영국 작가 마크 버논의 에세이입니다. 제목은 '대지의 말: 언어는 정신이 만들어내는 것인가? 낭만주의 이론은 다르게 설명한다: 말은 우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며 우주의 영혼을 표현한다'입니다.


저자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더럼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워릭대학에서 고대 희랍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런던에서 정신치료사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오늘날 언어에 관한 지배적 견해인 진화생물학적 설명의 한계를 지적하고, 낭만주의 전통에 입각한 언어의 기원론을 제시합니다.


맨 아래에 원문을 링크합니다.

지난 5월 웨일스에서 열린 헤이 페스티벌에서 대화하던 중에 영국 시인 사이먼 아미티지가 흥미로운 견해를 소개했다. 그는 언어의 본질을 논하면서, 왜 언어가 살아 있음의 경험을 포착하는 데 그토록 능한지 이렇게 설명했다. "내 느낌에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언어, 그리고 시를 위한 최선의 언어는 대지에서 직접 나오는 것 같습니다."


아미티지는 자신이 언어의 기원을 낭만주의적 전통에 따라 이해하는 부류에 속한다고 했다. 이 전통에 따르면, 단어와 문법은 인간의 뇌나 정신의 자의적인 발명품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과 우주 자신에 의해 인간 존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언어는 우주를 이해하는 탁월한 방법인데, 왜냐하면 언어는 그것이 묘사하는 것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1930-40년대 옥스퍼드대 잉크링스(문학 토론반) 회원이었던 영국 철학자 오언 바필드는 문헌학자로서 자신이 연구한 결과를 놓고 볼 때 큰 틀에서 낭만주의 전통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면서, 그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단어에는 영혼이 있다.


단어는 세계의 내적 생명을 반영하는 활기를 품고 있으며, 이런 연계성에서 단어의 힘이 나온다. 어떤 형식의 언어든지 암묵적으로 그 힘을 펼친다. 시인이 그 힘에 남보다 예민하다고들 하는데, 시인이란 그 힘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적 언어관은 언어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에 혁명적인 함의를 갖는 통찰이다. 주된 이유는 근대 과학의 지배적 가설들은 언어를 아주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어를 대상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는 영혼 없는 기호나, 대상을 재빨리 알아보도록 도와주는 상징으로 본다.


영국의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이런 입장의 두 가지 주요 접근법을 이렇게 요약한다. "역사적으로, 다수의 견해는 언어가 진화하면서 인간이 물리적 세계에 관한 사실적인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다른 견해는 언어가 진화한 것은, 적어도 근대 인간에 관한 한, 사회적 결속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요컨대 우리가 아는 대로의 언어가 출현한 것은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즉 언어의 유용성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언어는 사냥의 성공률을 높이거나 협력의 범위를 넓히는 식으로 우리 조상의 생존 확률을 끌어올렸다. 언어 덕분에 어떤 것이든 설명할 수 있었고, 계획과 과거 경험을 효율적으로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혜택은 단어의 영혼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단어로 어떤 현상에 인격성이나 주체성을 부여할 때에도, 예를 들어 바람을 두고 '무심하다'거나 산을 두고 '지혜롭다'고 묘사할 때에도, 그것은 세계의 내적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어내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은유가 생명에 색은 더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공상이며 만들어낸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현실에 관한 그릇된 추론으로 이어질 때도 많다. 예컨대, 바람을 혼이라고 하거나 산을 신이라고 할 때가 그렇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이런 견해를 옹호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서 "우리의 언어가 가진 정말 고유한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정보를 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썼다. "허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이 사피엔스 언어의 가장 고유한 특성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란 대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인간의 (종종 오도된) 뇌에서 나온다.

던바와 하라리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끙끙설(grunt theory)'이라 불리는 것을 옹호한다. 이들의 작업 가설은 이런 식이다. 초기 인류 혹은 아마 우리 진화적 사촌은 바나나나 사자를 가리키며 끙끙대기 시작했다. 이 끙끙대는 소리는 신호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어떤 실험실 침팬지들이 몇 년간 훈련을 거치면 차츰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shoe'나 'eat'에 해당하는 신호들이 되었다.


그 다음에 미국 인류학자 재럿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대약진'이라 부른 인지 혁명이 있었다. 그리고 별안간 뇌는 재배선되었다. 그 결과 몇 가지 신호를 구사하던 수준에서 말과 문법을 정교하게 고안하는 단계로 옮겨갈 수 있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많은 문제를 풀고 생존에 도움이 되는 등 실용적 잇점이 뒤따랐다. 그것은 마치 정신에 스위스 군용 나이프가 생긴 것과 같았다고 또 다른 진화적 설명의 옹호자인 캐나다-미국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언어 본능>에서 말한다.

문법이 생기고 난 뒤에 은유가 왔다. 이 기간을 두고 '은유의 단계'라 부르기도 한다. 이제 발달하는 인간의 뇌는 물리적 대상을 위해 만들었던 단어들에서 상상의 도약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단어들을 실체가 덜 분명한 정신의 느낌을 명명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실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마치 선사시대의 수많은 시인들이 나서서 독창적인 밈을 생산해냈고 온 세계로 퍼져나간 것처럼 해석된다.


이 단계에 온갖 공상이 생겨났다는 것이 끙끙설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이론은 대체로 초기 인류가 터무니없이 미신적이었며, 그래서 실제의 본질에 관해 온갖 실수를 다 저질렀다고 가정한다. 초기 인류는 바람이 혼이라거나 산이 신이라 생각했고, 이런 몽상과 착각을 통해 한데 결속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생존에도 너무나 자주 도움을 준 것으로 간주된다. (숲속의 나뭇잎이 흔들린 것을 보고 귀신이 있기 때문이라 믿고 달아나는 것이, 포식자 때문에 나뭇잎이 움직였을 때 달아나지 않고 있다가 위험에 처하는 것보다 나았다.)


이런 가정은 가령, 고대 희랍어로 프네우마(pneuma)가 어떻게 '혼'을 뜻할 뿐 아니라 '바람'도 뜻하고 때로는 '숨결'을 뜻할 수도 있는지 설명해준다. - 이런 식의 의미 공유는 고대 언어들 사이에서 폭넓게 발견된다.


끙끙설에 따르면, 마지막에 문학이 왔다. 이때가 되면 단어들은 오로지 인간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재동원된다. 이때는 우리가 아는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예외적인 현상, 즉 의식이란 것이, 그렇지 않았으면 무의식 상태인 우주로부터 어찌어찌해서 출현했다.

이런 유의 언어 진화가 진행된 경로의 세부 내용을 두고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이 분야의 일부 연구자들은 사실 언어의 기원은 생명의 기원만큼이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조용히 인정한다. 하지만 여전히 단어와 언어는 진화의 경로, 최소한 이런 것과 비슷한 길을 따라 출현했다는 가정이 널리 퍼져 있다. 끙끙 가설 혹은 그 비슷한 것이 지배한다.


낭만주의 언어 이론은 다른 경로를 제시한다. 이 이론의 주창자들 (분명히 소수다)은 끙끙 가설은 이론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고, 그에 반하는 증거들이 많다고 주장한다. 논리적으로 자명한 반대 의견으로는 이런 것이 있다. 만약 언어가 본래 허구에 관해 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과학을 포함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정교한 거짓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엔 과학이 힘을 발휘하는 것도 그것이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기술 사회에 공통의 담론을 제공함으로써 사회 결속과 생존을 돕는 부산물을 얻기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요컨대, 언어가 속임수라면 과학 역시 속임수투성이일 것이다. 혹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끙끙설은 자신이 앉아 있는 가지를 자르는 것과 같다.


바필드는 문헌학자로서 자신의 연구를 통해, 단어는, 그것을 소급해서 추적할 수 있는 한, 결코 물리적 대상만을 가리키거나 자의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은유 단계'라는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단어는 결코 한갓 신호, 즉 끙끙대는 소리의 파생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어는 언제나 물리적인 의미와 내적인 의미를 다 가지고 있었으며, 토착적인 시의 성격을 띄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바필드는 <자연의 재발견The Rediscovery of Meaning>에서 "초기 인간은 자연을 우리처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관찰하지 않았다"고 썼다. "초기 인간은 정신적인 동시에 육체적으로 자신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런 관찰을 한 사람은 바필드 혼자가 아니었다. 미국 초월주의자 랄프 왈드 에머슨과 영국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덤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도 비슷하게 봤다.

벤덤은 그의 유작 <언어에 관한 에세이Essay on Language>에서 이런 식으로 요약했다. "언어의 전 영역에 걸쳐 물리적 언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의 선과 병행해서... 비물질적 언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의 선도 이어진다... 비물질적 의미를 가진 모든 단어마다 물질적인 단어가 짝을 이룬다. 아니면 최소한 과거에 그랬다."


프네우마는 원래 비물질적이면서 물질적인 의미를 가졌던 옛 단어의 사례다. 하지만 다른 단어를 생각해보자. 아주 오랜 단어 'heart'는 라틴어로 카르디움(cardium), 희랍어로 카르디아(kardia)다. 그보다 앞선 선행어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 단어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흉곽 약간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펌프 같은 신체 기관(우리말에는 심장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옮긴이)을 가리킨다. 또 다른 뜻으로는 ‘warm hearted(따뜻한 심성의)’ ‘cold hearted(냉정한 마음'’, ‘soft hearted(인정 많은)’, ‘hard of heart(몰인정)’이란 표현에서 보듯이 어떤 느낌을 지칭한다.


끙끙설은 후자, 내적 의미가 비유적이거나 은유적이라고 가정한다. 단어가 본래 가지고 있던 물리적, 문자적 의미 위에다 나중에 더해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관련 증거들은 반대쪽을 가리킨다. 느껴진 의미가 단어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옛날에 사용된 사례를 보면 heart는 펌프가 아니라 감정의 처소로 여겨졌다. 오히려 지금의 기계적 의미가 나중에 더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heart라는 단어가 펌프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초 영국 외과의사 윌리엄 하비가 혈액 순환을 발견한 뒤부터이지 그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하비는 heart를 동시에 영적인 기관으로도 간주했다.)


따라서 많은 증거로 볼 때, 언어의 진화는 끙끙 가설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단어의 내적 의미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도 말이 된다. 만약 언어가 문자적-신호에서 상상적 은유로 진화했다는 가설을 믿는다면, 오래된 호머의 작품에서는 은유가 적고, 그보다 후대의, 가령 버지니아 울프와 해롤드 핀터의 작품에서는 은유가 더 많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로선, 그런 반증 사례 또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결국 수천 년이 넘는 단어의 진화 과정을 직접 추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끙끙 가설의 신빙성을 더 떨어뜨리게 하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은유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곰곰히 따져보면 오직 자신에게만 뭔가를 뜻하는 비유나 은유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만약 내가 나의 애인을, 가령 가지에다 비유한다면 당신은 내가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여름날에 비유하면 다를 것이다. 이것은 만일 은유가 본래부터 그저 개인의 두뇌에서 나오는 공상일 뿐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특이한 것이라면,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었겠는지를 말해준다. 언어가 개인 두뇌의 산물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모두가 저마다 사적인(자신만의) 언어를 말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은유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언어와 세계에 내재된 시(innate poetry)를 풀어놓는 의미들을 혁신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내면의 생을 의식적 자각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아침을 가리켜 '높은 동쪽 언덕 위로 이슬을 밟으며 걸어오는' '적갈색 망토'라고 묘사했다. 이런 그의 은유가 통하려면, 당신은 아침이 무엇이고 적갈색 망토는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마음 속에서 그 둘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단어들의 조합은 어렴풋하게는 알지만 그전까지는 완전히 생각해보지 않은 어떤 것을 불러일으킨다. '아침이 적갈색 망또라고?' 우리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깨닫게 된다. '물론 그렇지!' 셰익스피어는 아침의 새로운 감각을 자신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그전까지는 그늘 속에 드러나지 않은 채로 잠복해 있던 아침의 내면에 관한 무언가를 드러낸 것이다.


혹은 '바람(wind)'과 '혼(spirit)'의 결합, 그리고 우리의 먼 조상은 먼저 바람을 느끼고 그 다음에 창의적인 확장을 통해 같은 단어를 혼을 지칭하는 데도 사용했을 거라는 가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이 그토록 미신적이었다면 왜 그전에 '혼'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끙끙설이 원래 '물리적 미풍'이라는 엄격한 문자적 의미만 있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해당하는 단어가 어떻게 전 세계에 걸쳐 '비물질적인 혼'에 해당하는 은유로 사용되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바람'의 개념과 '혼'의 개념 사이에 즉흥적인 친연성이 없었다고 믿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둘 간에는 연계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둘은 함께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언어의 기원은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끙끙대는 소리와 신호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렇게 보기보다는, 단어는 처음 생겨날 때부터 늘 내면과 외면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었으며, 그것은 우리 조상이 자연 속에서 감지했고, 처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선사 시대 교감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의미의 축은 나중에야 갈라졌다. 이때 우리의 훨씬 최근의 조상은 근대의 과학적 의식의 정점에 이르러, 자연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중단했고, 근대의 이원론을 부과했다.


이제는 언어의 진화에 관한 대안적인 이론이 필요하다. 영국의 순고생물학자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는 <진화의 노래The Runes of Evolution>에서, 언어의 기원에 관한 지배적 설명은 부적합하다면서, 그 이론이 본질적으로 공리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언어 자체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단어가 본래부터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품고 있는 시성이 우리로 하여금 실제의 보다 심층적인 구조를 지각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단어는 자연 세계의 생기를 연결해준다. 단어에 영혼이 있는 것은 자연이 그렇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그런 것은 불신하는 경향이 아주 강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결손을 깨닫고 난 영국 작가 로버트 맥파레인은 단어를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나섰다. 그는 <획기적 사건들Landmarks>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문해력의 진행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은 소중한 무엇이다. 그것은 일종의 단어 마술, 즉 어떤 용어가 자연과 장소와 우리의 관계에 마법을 걸 수 있는 힘이다."

좁은 의미의 다윈식 설명은 언어의 기원을 기술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진정으로 단어의 발달을 이끈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발달 과정이란 단어와 문법이 묘사된 것과 공유된 경험에 관여하는 동시에 그것에서 솟아나는 방식을 말한다.


환원적인 전통의 덫에 걸려 있지 않은 사상가들은 대안적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세부 내용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논쟁거리다. 하지만 대체로 봤을 때,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가 <인간 진화 속 종교Religion in Human Evolution>에서 '오프라인 이론'이라고 부른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우리의 먼 조상은 많은 시간을 '온라인'으로 보내야 했다. '온라인'이란 먹이를 찾아 다니고 싸우고 달아나고 후손을 낳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 시간을 '오프라인'으로 보내기도 했다. 즉, 다른 많은 동물들이 그런 것처럼 그들도 놀았다. 아니면 의식에 참가하거나 음악을 즐겼다.


모든 관련 증거들은 그런 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뼈 파이프가 발견된 것만 해도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슬과 석조물은 더 오래됐다. 아니면, 잠만 해도 인간이라면 보통 하루 24시간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활동이다.


이런 오프라인 활동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은 정통 다윈식 이해의 틀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오프라인 활동으로 생기는 적응적 잇점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놀이와 의식, 음악, 수면은 유용성이 별로 없는 데다, 심지어 그것에 빠져든 생물의 생존을 저해할 수도 있다.


이런 적응적 비효율 때문에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런 활동의 출현을 두고 '잘 이해되지 않은 것'이라고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혹은 이런 활동들 자체에 어떤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핑커는 음악을 '청각적 치즈케이크'라고 불렀다), 생존을 돕는 다른 활동을 자극하는 데 기여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낭만주의 학파는 이런 설명을 엉터리라며 배격한다. 그대신 주창자들은 언어도 오프라인 활동이라고 인정한다. 이것은 포식자를 보고 지르는 경고음이나 먹을 것을 발견한 후의 탄성 같은 온라인과는 다르다. 벨라가 말하는 것처럼, 언어의 주종은 물질 세계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말의 대부분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을 위한 스위스 군용 만능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즉각적인 실용성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상태에 있는 것은 적응적인 것도, 부적응적인 것도, 적응적 발달의 부산물인 것도 아니다.


혹은 마치 우연한 뇌의 재배선이 있고 난 후 대약진이 있은 다음 불현듯 출현한 것과 같이, 그저 불가해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주변에서 충만하게 느낀 생명의 거대한 질주에 참여하기 위해 그것과 관계를 맺을 때 일어난 현상들 중 하나이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이 말이 맞다면, 언어의 진화가 진행된 경로는 아주 달라진다. 첫째, 끙끙대는 소리와 신호가 아니라 음악과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마치 물고기와 파충류의 자기 과시부터 새와 고래의 노랫소리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회적 동물에서도 발견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이런 생물들은 음악과 의식을 온라인으로, 그러니까 추측컨대 짝을 유인하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오프라인용으로도 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성 선택에서도 미학적 감수성이 요구되는 것과 같다.


찰스 다윈 자신도 그것에 관해 관찰하고 상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암컷 아거스 꿩이 수컷의 과시를 보고 짝을 고르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관찰 후에 다윈은 암컷의 행동에는 단순히 짝을 선택하는 것 이상의 많은 것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왜냐하면 수컷 꿩들은 분명히 암컷들을 매료시키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새들은 자신의 춤에서 미학적 즐거움을 취하고 있었다.


"암컷 새가 고운 색조와 정교한 패턴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터무니없다고 단언할 것이다. 암컷이 이와 같은 거의 인간 수준의 미감을 가졌음은 의심의 여지 없이 놀라운 사실이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이렇게 썼다. 그 자신은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신중한 관찰은 그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보여줬다.

이와 같은 토양 속에서 음악과 의례는 단어와 언어도 싹 틔웠을 것이다. 짐작건대 초기 인류의 지능 덕분에,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에만 음악과 의례가 이야기와 신화로 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세상 곳곳에 가득한 바람-혼을 탐구하도록 내모는 추진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언어가 발달하는 데는 주로 생존 욕구가 아니라 자연 세계의 생명 속에 함께 참여하려는 충동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초기 인간은 그 속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런 경험은 우리도 잠시나마, 가령 어떤 의례 속에서 다시 맛볼 수 있다. 촛불을 켠다든가 신성한 나무에 천조각이나 리본을 맬 때의 기운을 생각해보라. 혹은 시의 구절을 들을 때 느껴지는 힘도 좋다. "하지만 보게, 아침이 적갈색 망토를 걸친 채 높은 동쪽 언덕 위로 이슬을 밟으며 걸어오고 있어" 그런 시간에, 그런 순간에, 우리 내면의 삶은 잠시 자연의 내면과 또 한 번 합쳐진다. 


이야기와 신화 뒤에 생각이 왔다. 마침내 아주 마지막 단계에 와서야 축자적인 것(literalness: 문자적 의미만 갖는 상태-옮긴이)이 도착했다. 과거 자연의 내면적 삶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던 단어는 이제 그것에서 얼마간 분리된 의미를 띄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경험을 적는 데도 적용되었고 결국 오로지 인간 내면의 경험에만 적용되었다. '바람'은 더 이상 '혼'을 뜻하지 않게 되었고 '가슴(heart)'은 몸 속 펌프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언어의 발달 과정은 끙끙대는 소리에서 신호로, 문법으로, 은유로, 문학으로 순이 아니라, 음악에서 신화로, 생각으로, 축자적인 것으로, 정신적 고립 순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반전이 이뤄지면서, 과학은 원시적인 지시가 원초적인 시 이전에 왔고, 무의미한 신호가 살아 있는 상징물 이전에 왔으며, 실용적 필요가 관계의 자각 이전에 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사실은, 언어는 생명과의 어울림에서 솟아난다. " 바필드는 이렇게 요약했다. "맨처음의 은유는 인공적이 아닌 자연적인 것이었다."


이런 설명이 혁명적인 이론이라면, 여기서 도출되는 생각들도 혁명적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 내면의 삶을 기술하게 된 단어들이 진화하려면 우주가 혼으로 가득한 상태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최초의 인류는 그저 창의적인 구경꾼이 아니었다. 저 넓은 의식 속의 지적인 참여자였다. 다른 생물들과의 차이는 오직 자기 주변에서 고동치는 의미를 의식적으로 교신하는 능력에 있었다.


바필드는 <역사와 죄책감, 습관History, Guilt and Habit>에서 단어의 진화 연구는 "언제나 사고와 지각 간의 상호침투가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긴밀했던 문화적 시대를 되돌아보게 한다"고 결론내렸다. 낭만주의 과학의 출발점에 있었던 주역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은 어디에서나 인간의 영혼에 친숙한 음성으로 말한다."


나아가, 과학이 가능한 것도 우리가 물질적으로 그리고 상상에 의해 자연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자연의 바깥에 서 있으며, 그래서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말이 안 된다. 훔볼트는 "나 자신은 자연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언어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실로 언어는 대지에서 나온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언어는 힘이 있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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