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부드러운 마음

조회수 2018. 7. 29. 20: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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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타계한 작가 최인훈이 말하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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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으로 지난 23일 세상을 뜬 작가 최인훈의 산문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걸출한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 문학평론가였을 뿐 아니라 인류 차원의 역사와 문명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글로 써온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그 면모를 보여주는 저서가 『바다의 편지』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글 두 편에서 골라봤습니다.


첫 번째로 수록된 글인 <길에 관한 명상>의 후반 부분과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전문입니다. 이 글은 최인훈 전집 13권 <길에 관한 명상>에도 실렸습니다.


두 편 모두 길지 않은 글이지만 작가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길에 관한 명상


길이라는 말처럼 그것이 뜻하는 사물의 범위가 넓은 말도 드물 것이다... 하늘에도 길이 있고, 물에도 길이 있고, 땅에도 길이 있고, 짐승들에게도 길이 있으며 짐승과 식물과 사람 사이에도 길이 있게 되었다...


짐승들에게는 한 가지밖에 없는 길이 인간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짐승과 공유하는 길이다. 우리보다 먼저 존재한 자연과 우리 자신이지만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우리의 몸이다. 자연과 몸에는 그들의 길이 있다. 별과 강에는 그들의 길이 있고, 우리 몸의 혈액과 신경은 그들의 길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길은 우리가 말을 가지면서 만들어내게 된 지식의 길이다. 이 길은 자연과 짐승으로서의 인간의 길을 인간의 마음속의 지도로 옮겨놓는 능력에 의해서 가능해진 인간 의식이 걸아가는 길이다. 이 길이 지켜야 할 규칙은 첫 번째 길과 늘 대조하고 첫 번째 길을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자리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보통 이 길을 우리는 지식, 과학, 기술 따위로 부른다.


이 길은 끝이 없을 것이다. 이 길은 첫 번째 길을 개선하는 도구이다. 생물적인 종으로서는 진화를 완결시킨 인간이 스스로 발명한 방법으로 진행하는 비유기적인, 인공의 진화의 길이 이 길이다. 이것은 짐승들이 모르는 길이다. 인간의 영광과 비참은 이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낙원 추방'이라고 표현되는 종교적인 장면은 짐승들의 평화와 갈라진 인간의 운명을 말하는 것인데 이 추방은 분명히 비참이기도 하고 영광이기도 하다.


그 이후에 걸어온 인간의 운명은 이 사실을 단순히 영광이라고 할 만한 과정이 아니었고, 지금 도달한 성과도 미래의 전망도 영광의 한마디로 부를 수 있는 것처럼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자연의 길'과 '기술의 길'이 점점 더 분명해질수록 기술적인 인간의 길은 영광이라기보다는 비극, 용기, 사랑 같은 말로 얽어매어야 할 어떤 운동으로 보인다.


인간에게는 남아 있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환상의 길이다. 이 길을 전통적으로 우리는 종교, 예술 따위로 부른다. 종교와 예술은 첫 번째 길도 아니고 두 번째 길도 아니다. 첫 번째가 아닌 것은 종교나 예술은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며 두 번째가 아닌 것은 그것은 인간 문제의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해결을 위한 수단'이나 기술이 아니라 '해결'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해결'은 환상의 해결이다. 마음속의 길과 마음속의 지도를 현실의 길인 양 걸어가는 환상이다. 여기서는 마음=자연이라는, 관념의 실체화가 의도적으로 실천된다. 종교는 이 실체화를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예술은 이 실체화를 비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구별이다. 종교나 예술의 길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까닭은 자명한 것 같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우주의 움직임이다. 우주 쪽에서 보면 우주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 길 위에서 또 자기 길을 가고 있는 2차적인 존재이다. 그런데도 그가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를 제1차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이 2차적 존재가 자기 자신을 1차적인 존재로 착각할 수밖에 없는 이 근원적인 모순의 길이 표현되는 방식이 예술이나 종교라는 환상이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유한有限이란 것은 아무리 더해보아도 무한無限은 되지 못한다. 유한에는 언젠가 끝이 있다.


어림잡아 말한다면 옛사람들에게는 이 감각이 지나치리만큼 깊게 스며 있었다. 무상無常-영원한 것은 없다는 앎이다. 이런 앎 때문에 일어나는 폐단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가 있다고 해서 장미꽃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앎이 옛사람들에게는 모든 행위의 바탕이 되었다. 절제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사회를 사회로서 있게 하는 규범들은 이 같은 존재의 유한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연과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눈에 보였고, 그래서 그들은 자연을 의인화하는 데에 아무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자연을 연구해서, 그 법칙을 알고 응용하는 일이 많아짐에 따라 사람들은 차츰 자연과 멀어진다. 멀어진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동질성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유한한 앎이 우리 마음을 속이게 된다. 속인다는 것은 우리 존재가 유한하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교만해진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언젠가 있었던 것은 없어지고, 나하고는 상관없을 것 같던 일이 문득 나타난다. 그때 사람들은 놀란다. 그는 아무 준비 없이 이런 일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화 이후의 우리는 백인들이 만들어낸 것들-과학, 정치제도, 그들의 종교 같은 것들이, 마치 그것들을 알기 전의 우리 삶에는 끄트머리도 없던 것이나,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조상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무엇을 가져다줄 것처럼 생각해왔다. 마치 유한을 넘어선 무한과 같은 것을.


그러나 섭섭한 일이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백인들의 그 학문, 예술, 종교 들도 모두 우리의 옛 삶과 다름없는 유한 속의 제상諸相이었던 것을 깨닫기에 이으렀다. 이것은 유럽의 문명과 만난 모든 비유럽권이 고통을 겪으면서 배운 진상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서양에 대한 동양이라든가, 중국에 대한 우리 역사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다 알고 나서 우리가 역사의 어떤 시기에 얻었던 문명 감각- 인간의 삶에는 절대적 차이는 없다는 것,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그런 차별은 없다는 점- 이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잊어왔다.


이것을 다른 말로 종교 감각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굳어버린 교조주의와, 용기 없는 신물 숭배信物崇拜는 모두 참다운 종교 감각을 잃게 하는 것들이다. 이 감각이 없는 삶도 삶이긴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질인 평화에 어긋나는 삶이다.


이 감각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올까? 세상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닐 수 있게 한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한 이 삶에서 제일 슬기롭게 강한 것은 부드러운 움직임이다. 이 삶에서 서로 사랑하던 사람과 갈라지는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도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모진 마음은 받아야 할 것을 안 받으려고 애쓸 것이고, 그것은 새로운 슬픔을 만들어낼 것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업業의 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되찾는 것이 현대인의 행복의 첫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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