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서사적 자아를 찾아서

조회수 2018. 7. 23. 16: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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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렬 교수 '복학왕의 사회학' 이면에 담긴 생각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오늘의 큐레이션]으로 오늘은 최종렬 교수 <복학왕의 사회학>에서 골라봤습니다.


저자는 대구 계명대학교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인 문화사회학자입니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청년 담론에서 소외돼온 지방대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서글픈 단면을 조명했습니다. 재학생과 졸업생, 보모들의 심층 인터뷰를 토대로 지방의 현실, 자기 인식, 꿈과 생각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그와 함께 이 책에는 저자의 이론과 방법론에 관한 글도 보론으로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그중에서 서사적 정체성에 관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선한 삶과 자아


찰스 테일러는 자아 됨과 선을 연결시키는 정체성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선에 대한 지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이 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좌우된다(즉, 적어도 우리는 특히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정의한다). 자아는 단순히 자신을 초월해서 만들어낸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자아인 것은 오직 어떤 질문들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한에서만, 즉 선에 대한 지향을 추구하고 찾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다시 말해 "무엇이 선한 삶인가?"와 같은 가치론적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지향하지 않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아마 가장 고차원적인 초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테일러는 이러한 생각을 에고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으로부터 빌려왔다. 에릭슨에 따르면 정체성이란 나로 하여금 유의미한 도덕적, 영적 문제와 관련하여 내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서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지평을 말한다. 그것은 내가 현재 행하고 있는 어떤 일에 헌신하는 의미를 일러준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헌신하고 동일시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 이 헌신과 동일시는 나에게 틀이나 지평을 제공해준다. 이 안에서 나는 매 경우 무엇이 선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무엇을 찬성하고 반대할 것인지 결정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나의 정체성은 하나의 지평이다. 이 안에 있음으로 해서 나는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정체성을 잃으면 인간은 완전히 넋이 나가고, 내가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하게 된다. 인간에게 정체성은 옵션이 아닌 필수다. 정체성 없이 사는 인간은 깊은 위기 속에 빠져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정체성 위기'인데 격심한 형태의 방향 감각 상실을 뜻한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표현하지만 또한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불확실성 속에 휩싸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틀이나 지평을 결여하고 있다. 이 안에 있어야 사물들은 안정된 의미를 취할 수 있고, 어떤 가능한 삶들이 좋거나 의미 있는 것이고 또 다른 가능한 삶들이 나쁘거나 하찮은 것인지 분별될 수 있다.

대화의 망과 서사의 정체성


정체성은 타자와 인정을 주고받으면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정체성은 실체로서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 사이 어딘가에 있다. 나의 자아는 타자와 대화할 때 출현한다. "나는 어떤 대화자들과 관계를 맺을 때만 자아이다... 자아는 내가 '대호의 망webs of interlocution'이라고부르는 것 안에서만 존재한다."


자아는 오로지 타자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는 동안 출현한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적 상징 체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적 상정 체계라는 것이 있어 이것을 사용한다면 자기만 알고 상대방은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만 알아듣는 말로 백날 떠들어봐야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혼잣말로 그친다. 그러니 타자의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타자와 인정을 주고받으려면 공적 상징 체계를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문화화용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이야기의 제 1의 청자는 이야기하는 당사자다. 인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계속 이야기하는 녹음기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남들에게도 들려줘서 그 의미를 나누려고 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초등학생을 앞에 두고 난해한 형이상학을 강의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나도 알아듣고 상대방도 알아들을 수 있는 공적 상징 체계를 골라 이를 활용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럼 화자는 왜 청자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경험을 서사적으로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왜 하필 '서사적으로' 유의미한 것인가? 화자는 항상 '말하는 현재' 내부에 과거와 미래를 확장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된 삶'이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단순히 참과 거짓을 가리는 인지적 논증만이 아니라, 독특한 정서적 에너지를 지닌 가치평가적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이야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래의 삶에 대한 기획을 품고 있다. 그 기획이 실현되는가의 여부는 현재 이야기된 삶이 실제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느냐에 달려 있다."


이야기가 말하는 사람의 실제 삶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그것이 청중에게 공명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절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인간은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와 같다. 청중이 하나도 없는데 배우 혼자 무대 위에서 맡은 배역에 녹아들어갈 수는 없다.


오로지 청중의 호응 속에서 배우와 청중이 하나가 되었을 때에야 진정한 배역으로 거듭난다. 인간은 말하자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서사적 정체성'을 가진다. 화자는 이야기를 통해 말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규정하고, 그 규정이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청중의 호응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일이다.

서사와 삶


"서사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시간에 따라 유의미한 에피소드로 구성하는 일차적인 방식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한다. 하지만 모든 경험이 바로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경험을 시간 순으로 연결시킬 때에만 의미가 창출된다.


이 경험이 어떤 정체적인 경험의 일부분이라고 여기거나, 뭔가 다른 경험의 원인이라고 언급할 때 서사적 의미가 만들어진다. 어떤 경험의 의미는 이해 가능한 전체 경험에서 그것이 차지한 시간적 자리와그 역할에 의해 생산된다.


어떤 사람이 현재 사업이 실패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하자. 그냥 지나가겠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 경험이 너무나 지대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만약 그가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좀 더 큰 신의 섭리 안에 넣어서 이 고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신이 나에게 축복을 주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련을 주는구나, 이렇게 의미를 구성하면 그 이후 그의 삶의 행로가 바뀔 수 있다. 고통의 경험이 오히려 미래의 행복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방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독실한 종교인이 아닌 경우에도 그냥 좌절하고 살아갈 수도 있지만, 사업 실패의 의미를 물을 수도 있다. 사업을 벌이기 전에 사전 시장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든지, 경쟁 회사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든지, 재정 관리를 방만하게 했다든지, 사람을 잘못 뽑아 썼다든지 여러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원인을 통해 사업의 실패를 인과론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사업의 실패를 운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사업 실패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 나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어찌 해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사업 실패의 경험을 시간에 따라 유의미한 에피소드로 구성하기 어렵다.


어떤 경험의 의미는 시간으로 조직될 때에만 가능하며, 인간의 시간은 행위자의 목적과 의도를 지닌 일련의 사건을 통해 펼쳐진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업 실패를 자신의 목적 및 의도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라 본다면 그 실패의 의미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게 된다. 폴 리쾨르가 시간성과 서사성이 서로를 전제하고 강화하는 건설적인 순환 관계에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사는 또한 인간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화자가 이야기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 중 특정의 사건을 선택해 기억하고 이를 미래의 기획으로 재조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특정의 사건을 불러내 이야기한다는 것은 화자 자신은 물론 청자로 하여금 그 사건에, 현상학적 의미에서의 '주의attention'를 기울이라는 규범적 요구다. 화자는 불러낸 특정 사건 각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특정 시간 순으로 조직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특정 시간 순으로 조직하면, 삶의 방향도 이러한 서사에 영향을 받는다.

서사적 자아의 만남


나는 이러한 문화화용론을 통해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을 실행했다. 지방대생의 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만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이야기의 한 종류인 자기계발 담론은 청년 세대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화 산업, 또는 출판 산업이 적극적으로 고안하고 퍼뜨린 담론이다. 기업가, 동물, 속물, 생존주의자 역시 모두 학자들이 청년들의 자아에 대해 만들어낸 이야기다. 청년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서사한 것이 아니다.


만약 청년 세대가 어떤 집단으로 존재한다면, 여기에 직접 다가갈 수는 없다. 오로지 그들이 스스로 산출한 집합 표상을 통해 에둘러 접근해야 한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가용한 공적 상징 체계를 활용하여 자신과 사회에 대한 집합표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청년 세대가 어떤 공적 상징 체계를 활용하여 주관적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의미의 안내를 받아 행위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는 청년 세대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봐야 알 수 있다.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이 필요한 이유다.


나는 지방대생이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서사하도록 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서사적 인터뷰를 실행했다. 서사적 인터뷰는 연구자의 학술적 또는 과학적 언어에 특권을 주지 않는다. 대신 연구 참여자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는 물론 지금까지 연구 주제에서 배제되고 누락되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정해주기 위해서다. (중략)


서사적 인터뷰는 연구 참여자와 연구자가 서로 '인간으로' 현상하는 폴리스다. "폴리스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현상의 공간, 즉 나는 타자에게 타자는 나에게 현상하는 공간이며, 여기에서 인간은 다른 유기체나 무기체처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이 현상한다." 서사적 인터뷰 과정 속에서 연구 참여자와 연구자는 말과 행위를 통해 서로 인간으로 현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서사적 인터뷰는 일종의 사회적 공연이다. 연구 참여자와 연구자가 서로를 청중으로 해서 사회적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구 참여자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서사적 정체성을 제출하고, 연구자는 이러한 정체성을 인정한다. 연구자 역시 연구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연구 참여자에게 제출하고 그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이러한 호혜적 인정 속에서 둘 사이에 일종의 폴리스가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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