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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숲의 침묵이 건네는 말

이반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 <폴레시예로의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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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오리진 작성일자2018.02.18. | 21,701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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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레이션] 이반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 <폴레시예로의 여행>에서 골라봤습니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1818-1883)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3대 문호로 꼽히는 작가입니다.


1852년에 25편의 중단편 모음집으로 출간된 <사냥꾼의 수기>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폴레시예로의 여행>은 1857년에 처음 출판되었습니다. 일기처럼 쓰인 이 작품은 하루의 일과를 적어가는 기행문 형식의 글입니다.


첫째 날 인간이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지닌 무심한 대자연 앞에서 미약한 존재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무상함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둘째 날에는 자연에 순응하며 삶의 진리를 터득하는 농민의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땅불이 숲을 황폐하게 만들 수 없듯이, 인간사의 그 어떤 불행도 인간의 삶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다는 소박한 진리, 자연의 당위를 이야기합니다.

관련 책
투르게네프 단편집
투르게네프 단편집
저자
투르게네프
발행일
2008.01.15
출판사
지만지고전천줄
가격
정가 12,000원보러가기

첫째 날


거대한 숲의 모습, 하늘도 다 가려버리는 거대한 숲의 모습은 바다를 연상케 한다. 보는 이의 눈앞에 펼쳐진 광대하고 위엄있는 태초의 원시적인 힘이라는 점에서 이들로부터 받는 인상 또한 동일하다. 물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생명의 기원이 되는 원시림의 한가운데로부터 자연이 인간에게 전하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너희들의 일은 내가 알 바 아니다. 나는 지배할 뿐이며, 너희들은 죽지 않으려 발버둥칠 뿐이다."


그러나 숲은 바다보다 더 단조롭고 더 슬프다. 특히 끝없이 똑같은 모습에 거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소나무숲이 그렇다. 바다는 사나울 때도 안온할 때도 있다. 바다는 갖가지 색깔을 자아내며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바다는 또 다른 영원성의 상징이자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하늘을 반영한다. 그러나 변함없이 음울한 숲은 우울한 침묵에 잠겨 있거나 아니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그러한 숲을 보고 있으면, 우리 인생의 허망함에 대한 인간적 자각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깊이 우리 가슴 속을 파고든다. 어제 태어나서 오늘 죽을 운명인 하루살이 같은 인간으로서는 신 이시스의 시선 같은 숲의 그 차갑고 냉정한 시선을 견디기 어렵다. 그 앞에서는 얼음장 같은 자연의 숨결에 휩싸인 청춘의 무모한 열망과 꿈만이 스러져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조차 시들어버리고 움츠러든다.


인간은 지상의 마지막 인간이 사라져 갈지라도 소나무 가지의 솔잎 하나조차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고독함과 나약함, 자신의 우연성을 느끼게 되며, 그러면 인간은 놀란 가슴으로 일상의 자잘한 걱정거리들, 여러 가지 일들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 세상이 더 편하다. 거기는 집처럼 편안하며, 그 안에서 인간은 다시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힘을 믿게 된다.


몇 년 전, 늪지가 많은 레세타 강변에 지은 저택의 현관 계단에 서서 처음으로 저 거대한 숲을 보았을 때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었다. 푸르스름한 거대한 침엽 수림이 높고 긴 절벽처럼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크지 않은 자작나무 숲들이 녹색의 점들로 드러나 있었고, 사방은 온통 숲으로 덮여 있었다.


그 어디에도 하얀 교회나 평평한 경작지는 보이지 않았다. 온통 나무들과 뾰족뾰족한 꼭대기들,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엷고 푸르스름한 안개, 거대한 숲 위의 안개만이 보일 뿐이었다. 게으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 어떤 생의 정체 같은 것, 아니 그보다는 생명의 결여, 또는 장엄하기는 하나 그 어떤 죽음 같은 느낌이 지평선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당시 커다란 하얀 구름이 높은 곳에서 조용히 흘러갔고, 무더운 여름날은 침묵에 잠긴 땅 위에 낮게 깔려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강물은 관목들 사이로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고, 강바닥에는 삐죽삐죽한 이끼 더미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강변은 늪지에 잠겨 보이지 않거나 자잘한 모래에 덮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저택 바로 옆으로는 지방도로가 나 있었다.


(중략)

이틀 째


다음 날 아침 우리 셋은 다시 '가르'로 향했다. 그곳은 약 10년 전쯤 수천 헥타르의 숲이 불에 타 아직 나무들이 자라지 않고 있으며, 군데군데 어린 전나무, 소나무들만이 자라고 있고, 나머지는 온통 이끼와 불 탄 흔적만이 가득한 곳이다.


(중략)


사방은 어제처럼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마음을 짓누르고 압박하는 숲 속이 아니었고, 마른 이끼, 연보랏빛 풀, 부드러운 흙먼지, 어린 자작나무들의 가느다란 가지들과 깨끗한 잎사귀들 위에는 이미 강렬하지 않은, 맑고 낮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모든 것은 안심시켜 주는 듯한 서늘한 기운에 묻혀 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낮게 해주는 단잠의 저녁과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쉬어라 나의 형제여. 가볍게 숨 쉬고 슬퍼하지 말라. 곧 너도 편안히 잠들 테니." 나는 머리를 들어 잔가지 끝에 앉아 있는, 에메랄드 빛 머리에 몸이 길고, 투명한 날개가 네 개 달린 커다란 잠자리 한 마리를 보았다. 과장하기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은 그것을 '아가씨'라고 부르지만, 단순한 러시아인들은 '왕잠자리' 라고 부른다. 한 시간이 넘도록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잠자리는 햇볕을 받으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때때로 머리를 좌우로 돌리거나 들어올린 날개를 떨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것을 바라 보면서, 아직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밀스런 자연의 생명과 의심할 바 없는 자연의 명백한 의미를 내가 깨달은 듯 느꼈다. 조용하고 완만한 생명의 발현, 서두르지 않는, 억제된 감각과 힘, 모든 존재 내부의 건강의 균형-바로 그것이 자연의 기반이고, 자연의 변하지 않는 법칙으로, 자연을 받쳐주고 유지시켜 주는 것들이다.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는 것-더 높은 수준으로 가건 또는 더 낮은 수준으로 가건 마찬가지로-은 마치 불필요한 것처럼 자연에 의해 버림받는다. 많은 곤충들이 생의 균형을 깨는 사랑의 기쁨을 알게 되자마자 죽게 된다. 병든 동물은 이제 모두에게 공평하게 태양을 볼 권리도, 자유로운 공기를 마실 권리도 없으며, 살 권리도 없다는 것을 느낀 듯 숲으로 들어가 거기서 혼자 죽어 간다. 인간도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타인의 잘못으로 생의 불행을 겪게 되었더라도 적어도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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