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왜 우리는 다 알 수는 없는가

조회수 2017. 4. 30. 13: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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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의 답 "우리가 실재의 일부이기 때문"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오늘의 큐레이션]은 한번쯤 읽어볼 만한 국내외 책과 글을 골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영국의 과학 전문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 3월 29일자 특집 '지식이란 무엇인가(What is Knowledge)'에 실린 글 일부를 발췌 소개합니다.


제목은 '왜 우리는 앞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가(Why we’ll never know everything)'입니다.


과학과 더불어 세상 만물에 대한 지식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실재를 모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도록 운명지워져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지 들어보시죠.

우리는 우리가 우주 안에 산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데에는 넘어서기 힘든 물리적 한계가 있다.


가령 빛의 제한속도 때문에 우리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관찰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양자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가 원자 단위 이하 소립자에 대해 이해하는 데에도 한계가 불가피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개발한 거대한 망원경으로 빅뱅 이후 수억 년 시점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서 관찰할 수 있고, 미세 현미경을 활용해서 원자에서 피해다니는 광자를 추적할 수도 있지 않나? 우주는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고,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 아주 잘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빅뱅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고 블랙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앞으로 자연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고안해내고 증명만 하면 될 문제 아닌가.

글쎄, 과연 그럴까? 지금보다 더 잘 알기 위해서는 더 나은 계산 능력이 필요하다. 이게 말보다 어렵다. 우리가 우주를 이루는 물질의 아주 세밀한 움직임들까지 다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우주의 진화와 운명을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인류가 가진 계산 능력으로 그것을 수행하려면 우주가 우리에게 허용하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주변의 여전히 신뢰할 수 없는 일기예보부터 문제투성이의 물품배송 경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계산 능력의 한계로 돌릴 수 있다. 수천 곳 이상의 목적지를 연결하는 경로를 최적화하려고 들면 계산이 아예 불가능해진다.


이런 어려움만 해도 이보다 더 큰 한계의 벽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설사 계산 능력을 아무리 강력하게 키운다고 해도 그것을 프로그래밍할 때에는 인간의 사고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대단한 것이지만 동시에 무척 소란스럽고 복잡한 혼돈으로 가득하다. 가령 '이 명제는 거짓이다'라는 모순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또한 누군가를 미워하지만 사랑한다는 표현도 한다. "언어는 정신의 표현인데, 우리의 정신과 언어는 모순으로 가득하다"고 노손 야노프스키 뉴욕시립대 정보학과 교수는 설명한다.


인간은 사고의 유연성 덕분에 '상자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인간 존재가 (상자 안에 있어서 밖을 생각할 수 있는) 모순 위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서나 모순을 본다.


하지만 세상에 실재하는 것(reality)의 핵심적인 특징은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양자를 측정할 때 우리가 어떤 방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대상은 파동으로도 혹은 입자로도 보인다.

리처드 파인만이 양자 세계의 '유일한 미스터리'라고 부른 이중성을 보자. 실재의 기본적인 구성 단위는 파동도 입자도 아닌, 완전히 다른 무엇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태 경험을 한 적도 없고, 경험한다고 해도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인지 능력도 없는 무엇이다.


우리가 가진 논리와 그 위에 구축된 수학이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수학은 우리가 형상화할 수는 없는 것에 대해 잘 훈련된 두뇌가 추상적인 용어로 기술할 수 있는 보다 순수한 중립적인 언어이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좋다.


하지만 수학 그 자체에도 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 어떤 수도 영으로는 나눌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유명한 공리가 대표적이다. 1=2를 증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수학이 완전무결한 우주의 언어라면 그런 모순된 언명을 허용할 수 없다. 수학을 모순 없이 계속 수행해 나가려면 어느 지점에서는 제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조만간 수학의 한계에 이르게 된다. 오스트리아 수학자 쿠르트 괴델(1906-1978)이 1930년대에 보여줬듯이, 수학적 규칙을 포함한 어떠한 논리 체계도 증명 여부가 불가능한 명제를 포함하게 마련이다. 마치 우리(존재)와 똑같은 비일관성의 덫에 걸려 영원히 '불완전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괴델이 말한 불완전성은 '이 진술은 거짓이다'라는 논리적이면서도 비논리적인 명제의 수학적 표현에 해당한다. 근본적인 진실은 단순한 명제이든, 어떤 논리 체계이든 인간 존재이든 그것에 관한 완전한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 언명(self-reference)의 문제는 타고난 것이다. 괴델과 같은 시대를 산 앨런 튜링은 우리가 컴퓨터 프로그램에게 앞으로 성공적으로 작동할지 여부를 미리 물어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양자 역학에서도 패러독스가 쏟아진다.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측정하려는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따라서 진실은 이렇다. 우리는 가장 강력한 망원경과 현미경과 컴퓨터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결코 그것으로 우리 정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재에 관한 우리의 시야는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굴절돼(skewed)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 실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은 자신의 시에서 "모든 진실을 말하되 비스듬히 말하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진실은 한번에 감당하기에는 벅차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시의 진실이 과학적 진리와 통하고, 사색의 시인이 일찌감치 경험 과학의 정수를 꿰뚫어본 셈입니다.

말하라, 모든 진실을, 하지만 비스듬하게-

성공은 우회로에 있나니

우리의 허약한 즐거움 앞에선 너무나 밝구나

진실의 비할 바 없는 경이로움이란

아이들 눈에는 번개의 공포도

친절한 설명과 더불어 가라앉듯

진실의 빛도 조금씩 쏟아내야 한다

아니면 모두의 눈이 멀고 말 테니-


Tell all the truth but tell it slant —

Success in Circuit lies

Too bright for our infirm Delight

The Truth's superb surprise

As Lightning to the Children eased

With explanation kind

The Truth must dazzle gradually

Or every man be blind —


/Emily Dickinson, 'Tell all the truth but tell it slant'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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