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단어로 그림 가르쳐준 나보코프 은사님"

조회수 2016. 10. 7. 13:36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긴즈버그 미 연방대법원 대법관 "책읽기에 본을 보이신 어머니"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볼 만한 글을 소개하는 북클럽 오리진의 [오늘의 큐레이션]입니다.


오늘은 미국에서 존경받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년생) 연방대법원 대법관의 에세이입니다. 제목은 '인생의 조언(Advice for Living)'입니다.


미국 러트거스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의 로스쿨 교수, 연방상소법원 판사를 거쳐 1993년 미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된 긴즈버그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권리와 지위 향상에 크게 기여한 법률가로 평가받습니다. 2015년 8월 한국을 방문하면서 국내에도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 글은 긴즈버그 대법관과 매리 하트넷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 방송인 웬디 W. 윌리엄스의 공저로 출간될 예정인 '나 자신의 말(My Own Words)'의 일부를 뉴욕타임스가 지난 10월 1일 일요판에 발췌해 실은 것입니다.


어릴 적 엄마로부터 전수받은 독서와 독립적 사고의 중요성, 대학 시절 은사였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로부터 배운 글쓰기의 중요성, 자신이 겪은 결혼과 출산 및 육아, 직장 일의 병행, 의견이 다른 사람과의 협력 등 인생을 살아오면서 체득한 여러 국면의 조언을 들려줍니다.


아래에 원문도 함께 링크했습니다.

긴즈버그 에세이 원문 바로가기

"대법관님은 늘 판사가 꿈이었나요?"

아니면 그보다 더 터무니없을 때도 있습니다. "연방대법원 대법관?"


적어도 1주일에 한 번꼴로 법원의 저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진보했음을 보여주는 표시이지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여자아이가 장래희망으로 판사를 꿈꾸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옛날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졌습니다. 1956년 가을, 제가 로스쿨에 입학했던 때와는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서 법률직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전체의 3%가 안 됐습니다. 연방 항소법원에는 1명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전국 로스쿨 학생의 약 절반과 연방 판사의 3분의 1 이상이 여성입니다. 연방 대법원에도 여성 대법관이 3명입니다. 전국의 로스쿨 학장의 30% 이상이 여성이고, 포춘 선정 500대 기업 고문변호사의 24%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살아온 긴 시간 동안 큰 변화를 봐 왔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여성 대법관 3인

그러고 보면 저는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시민권이 헌법의 근본 원리임을 입법부와 법원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게 될 때까지 살아 있었고 법률가로 일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까지 페미니스트들과 배려심 있는 남자들은 몇 세대에 걸쳐 남녀 평등권 하나만을 위해 투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도 사회는 그들의 청원에 주의를 기울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딸과 아들 들이, 인위적인 장애물이 앞길을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자유롭게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에 제가 참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저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몸소 본을 보이면서 책읽기가 즐거움이 되게 해주셨고, 장차 어떤 운이 닥치더라도 자신을 지켜낼 수 있도록 '독립적'인 사람이 되라고 끊임없이 조언하셨습니다.

출처: 뉴욕타임스
젊은 시절 긴즈버그 대법관

둘째, 저의 성장기 동안 제게 영향을 주고 격려를 해주신 은사들입니다. 코넬 대학교에서 저를 가르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유럽문학 교수(러시아 태생 미국 작가, '롤리타'의 저자)는 저의 읽는 법과 쓰는 법을 바꿔 놓았습니다. 단어를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분한테서 배웠습니다. 적절한 단어의 선택과 적절한 단어의 배열이 심상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예시해 주셨지요.


콜롬비아 로스쿨 재학 때는, 헌법학과 연방법원을 가르치신 제럴드 군터(Gerald Gunther) 교수님이 제가 연방 법원 연수생으로 근무하는 문제에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졸업을 앞둔 제가 네 살 난 아이의 엄마였다는 사실이 당시로선 중대한 결격 사유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교수님은 영웅적인 노력 끝에 자신의 그 사명을 끝내 관철시켰습니다.

공개 강연을 할 때 종종 받는 또 다른 질문은 이런 겁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실 좋은 조언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박식하신 저의 시어머니로부터 얻은 조언입니다. 바로 제 결혼식 날 해주셨던 조언입니다. "좋은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때때로 어느 정도 귀머거리가 될 필요가 있단다."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그 조언을 성실히 따랐습니다. 비길 데 없이 좋았던 결혼 생활 55년 내내 저의 가정에서는 물론 제가 일한 모든 직장에서도 실천했습니다. 연방대법원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누군가 경솔한 말이나 불친절한 말을 했을 때는 흘려듣는 것이 상책입니다. 분노에 차서 혹은 성가신 듯 반응하면 오히려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대법관 선서를 하는 긴즈버그

시아버지가 해주신 조언 역시 제게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1954~56년 제가 남편과 떨어져 있던 시기에 해주신 말입니다.


저의 남편 마티가 육군으로 군복무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오클라호마 포트 실에서 포병 장교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1954년말 저는 임신 확진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7월이면 우리 식구는 셋이 될 걸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듬해 로스쿨에 입학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학업과 함께 갓난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이 됐습니다. 그때 시아버지께서 조언하셨습니다.


"루스, 로스쿨에 입학하고 싶지 않다면 너로서는 그렇게 생각해도 좋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런 선택을 한다고 해도 아무도 너를 얕보지는 않을 게다. 하지만 네가 정말로 법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걱정하는 걸 멈추고 육아와 학업을 어떻게 하면 잘 병행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거야."


그래서 남편과 저는 수업이 있는 날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유모를 두는 것으로 해법을 찾았습니다.

출처: Academy of Achievment
긴즈버그와 딸 제인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조차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제가 학업과 육아를 병행할 때 경험한 시간 안배에 꼭 들어맞는 표현입니다.


로스쿨에서 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상당 부분은 아기 제인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오후 4시까지는 부지런히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몇 시간은 제인의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공원에 가거나, 아이와 놀이를 하거나 웃기는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책과 A. A. 밀른('곰돌이 푸'로 유명한 영국 아동문학가)의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는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였습니다.


저는 제인이 잠든 후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는 법률 서적 앞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식으로 제 삶의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잠깐씩의 쉼표가 돼주었고, 그 덕분에 저는 법률 공부에만 훈련이 된 급우들에게는 없었던 균형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남편 마틴과 긴즈버그

저는 인생에서 적지 않은 행운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행운도 남편 마틴 D. 긴즈버그와 결혼한 것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저로서는 이렇게 머리가 특출나고, 생기 넘치며 영원토록 사랑스러운 배우자를 묘사할 만한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혼 초기부터 이미 요리는 저의 강점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했습니다. 음식을 좋아하는 아이들- 우리 식구는 1965년 아들 제임스가 태어나면서 넷으로 늘었지요 -로서는 감사하기 그지없게도 남편은 부엌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고 우리 집의 주방장이 됐습니다.


남편은 아들을 낳는 날까지 저를 지도했습니다. 제가 초안을 쓴 논문이나 연설, 보고서의 첫 번째 독자이자 비평자였습니다. 제가 암으로 두 차례 장기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병원 안이든 밖이든 언제고 제 곁을 지켰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제가 연방대법원 대법관직에 오르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은 비밀이랄 수도 없습니다. 1993년 론 클레인 당시 백악관 법률 부고문은 저의 대법관 지명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저는 단연코 그리고 기록을 위해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비록 어찌됐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연방대법원에 지명됐어야 하지만, 만약 그녀의 남편이 지금까지 감당했던 모든 것을 하지 않았더라면 긴즈버그는 지명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말한 '모든 것'에는 우리 고향 뉴욕주의 상원의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의 무조건 지지를 얻어낸 것과, 저의 과거 행적을 잘 아는 법률 학회와 개업 변호사 회원 다수의 도움을 끌어낸 것이 포함됩니다.

미 연방대법원 대법관들

제가 맡고 있는 이 공직(연방대법원 대법관직)은, 올해로 23년이 넘었습니다만, 법률가로서는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고 가장 수고스러운 일이라고 그동안 저는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연방대법원의 주된 책무는 연방법의 균열을 보수하는 것입니다. 주나 연방 헌법이 주문하는 내용의 의미를 두고 법률가들 사이에 의견이 나뉘었을 때 지배적인 효력을 갖는 해석을 내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맡게 되는 질문들은 쉬운 경우가 드뭅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옳은 대답을 내놓는 경우도 아주 드뭅니다. 하지만 우리는 토론을 통해 함께 숙고함으로써, 그리고 더 많은 깊이와 정확성을 가지고, 회람을 통해 초안을 돌려보고 서로 답을 교환함으로써 종국에는 첨예하게 갈라지기보다는 의견 일치에 도달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긴즈버그 왼쪽이 단짝인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

어느 한 대법관이 만약 다수가 틀렸다는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반대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습니다. 저의 동료들이 그렇게 하듯이, 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런 특권을 활용합니다.


대법관들은 주요 쟁점에 대해 서로 의견 차가 큽니다. 예컨데 정치 캠페인 비용 지출에 대한 규제, 소수우대 정책, 낙태권 같은 쟁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심지어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즐겁게 여깁니다.


동료들간의 협력 관계가 우리 직무의 성공에 결정적입니다. 동료 대법관인 앤터닌 스캘리아가 잘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넘어갑시다(get over it)!'라는 태도로 일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헌법이 우리에게 맡긴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여성의 직업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봐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으로 보자면 여전히 어두운 부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과 세계에서 빈곤층의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입니다.  미국과 해외에서 모두 여성의 소득은 교육과 경험에서 대등한 남성의 소득에 못 미칩니다. 우리 직장은 출산과 육아의 수요에 적절히 부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희롱과 가정내 폭력을 방지하는 효과적인 방안도 아직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국민"을 구성하는 사람 모두가 각자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운동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데 대해  낙관적입니다.


[북클럽 오리진] 컨텐츠 카톡으로 받아보기

북클럽 오리진 회원권을 선물하세요.


북클럽 오리진은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라는 물음과 대답이 서로의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사회를 꿈꿉니다.


카톡 선물하기를 통해 회원권을 구매하시면 오리진의 고급 콘텐츠와 책 소개는 물론 월 1권 도서 배송과 함께 북토크에 우선 초대받으실 수 있습니다.


회원권은 직접 도서 결재에 써도 좋고 다룬 분에게 카톡으로 선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책을 통한 성장과 소통을 꿈꾸는 오리진의 일원이 되어 주세요.

북클럽 오리진 회원권 안내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