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큐레이션] 좋은 마을이 세상을 구할 것

조회수 2018. 8. 27. 08: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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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의 마을공동체탐방기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중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이 궁금하다면

[오늘의 큐레이션]은 종교전문기자인 조현의 신간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에서 골라봤습니다.


이 책의 부제가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사람들을 위한 마을공동체 탐사기'입니다.


국내 공동체 마을 18곳과 세계적인 공동체 5곳을 저자 자신이 직접 방문 취재해서 소개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소감을 담았습니다.


서문 '왜 지금 마을과 공동체를 이야기하는가'에서 발췌했습니다.

인간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모순된 존재'라 하겠다. 정반대의 것을 갈구하는 인간의 정신 상태가 그렇다. 인간은 고립을 견딜 수 없는 존재다. 심심하고 외로운 걸 무엇보다 못 참는다. 어떤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홀로 두거나 심지어는 좁은 원룸에 두고 나가곤 하는데, 만약 인간을 그런 식으로 가두고 아무런 자극도 없이 온종일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될까.


온종일 SNS에 매달린 이들이 많다. 그러고도 틈만 나면 동창회와 취미 동아리를 갖고, 교회와 성당, 절에 나가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관계가 늘어도 더 외로워질 때가 많다. 이해타산을 위한 모임에선 힘자랑의 줄 세우기를 피하기 어렵다. 배고픈 것도 참기 어렵지만 배 아픈 것은 더욱더 참지 못하는 한국인이 충족감을 느끼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도 늘 누군가와 만남을 고대하며 약속을 정하고, 합치고, 뭉치려고 애쓴다.


인간은 원하던 걸 손에 쥐었다고 만족하는 법이 없다. 애타게 갈구하던 것을 일단 손에 쥐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그토록 누군가를 그리워해놓고 상대방이 내 사람이 되면 지겨워 미치겠다고 돌변한다. 쟁취를 위해 투쟁하던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정작 그 하늘의 별을 따고 나면 이 직장이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할지 몰랐다며, 먹고사니즘에서 벗어날 날만을 꿈꾼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만두지도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로또나 한 방 맞아 해외여행이나 다니며 살고 싶다는 공상 속을 유영한다.


가끔 직장 일에 바쁜 지인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며칠만이라도 쉬고 싶다"면서 종교전문기자인 내게 조용한 산사나 수도원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몇 번의 경험으로 안다. 정작 별 자극이 없는 상태를 한나절도 견뎌내지 못하고 좌불안석한다는 것을. 세속에선 사람 때문에 괴롭고 산속엔 아무도 없어서 괴로워하는 변덕쟁이 인간을 누가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소속되고 합일되어 안정감을 주는 공동체야말로 행복의 원천이라며 좇다가, 그것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압살하고 피곤하게 하는 주범이라며 반공동체적으로 돌변하는 모순 덩어리를 말이다. 몸은 하나인데 얼굴은 둘이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샴쌍둥이가 모순된 인간의 자화상이다.


그 모든 것의 뿌리엔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의 큰 욕심이 있다. 특히 한국인의 유별난 욕심은 엄청난 상승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이젠 브레이크가 파열돼 멈추지도 못한 채 죽어간다. 자살률, 세계 최고다. 다들 죽지 못해 산다고 한다. 최근 평등의식이 급격히 높아졌지만 그 또한 모순이다.


금수저의 갑질에 분노하면서도 빈곤층과 같은 대우를 받거나 임대주택 청년들과 한 동네에서 사는 것이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한다. 자신이 약자일 때는 정의의 투사이지만, 개인으로 돌아와서는 자신도 모르게 차별하고 박해에 가담해버리는 반공동체적 삶을 살기도 한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대안문명 시리즈로 1999년 영국 다벨 브루더호프공동체를 소개했다. 그 이후 다벨 브루더호프에 한국인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공동체는 농사도 짓고 소와 양을 키우고 목공일도 하고, 빨래를 하고 식사하며 살아간다.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아니라 일상의 삶터다. 영국의 전형적인 시골인 다벨에는 한국인이 영국인보다 더 많이 몰려들었다. 브루더호프에선 급기야 한 부부를 한국으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서울 대학로의 한 공동체에서 1년간 머물 때 "왜 한국인이 그렇게 브루더호프를 찾는지 알아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한국인이 너무 피로에 젖어 평화를 갈구하는 것 같다"면서 "브루더호프의 평화로움은 욕망을 버리고 소유조차도 내려놓은 비움에서 비롯된 것인데, 한국인은 욕망을 버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1층부터 10층까지 욕망을 켜켜이 쌓고 옥상 위에 천국조차 얹고 싶어 하는, 참 못 말리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건축업자는 더 많은 집이 필요한 핵가족과 1인 가구화를 고대한다. 4명이 한 집에 살 때는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세탁기도, 가스레인지도, 청소기도 한 대면 됐지만 혼자씩 살면 모두 네 대씩 필요하다. 기업이 어느 쪽으로 유도할지는 자명하다. 혼자 살면 불안하니, 보험이나 연금을 들게 하기도 용이하다.


홀로 살면 생일날 '딩동'하고 알람을 울려주는 것도 인터넷 쇼핑몰이나 보험회사다. 외로움과 허전함을 소비로 메우게 한다. 기업들은 인간의 무의식적 습관까지 코딩화해 구매케 한다. 카드 내역을 파악해 소비 패턴을 읽어 자기보다 자기를 훨씬 더 잘 아는 기업의 마케팅을 개인이 당해내긴 어렵다. 텔레비전과 영화, 게임, 인터넷의 정보와 재밋거리는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이를 즐기는 동안 우리의 데이터는 낱낱이 자본가의 빅데이터로 헌납되고, 이를 바탕으로 광고와 마케팅이 신 같은 위력으로 다시 나를 조종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카드를 사용하는 이상 일거수일투족이 자본에 파악돼 그 노예로 살아가는 걸 피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소비하고 즐기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자본에 복무하는 매스미디어의 최대 해악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프레임을 정해준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생을 스타들을 모방하며 보내게 한다. 라캉의 말대로 남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하게 부추겨 소비하는 노예와 로봇을 만들어버린다. 개인이 원했듯 원치 않았던 자본가들의 욕구에 충실하게 반응한 결과 세계 최고 갑부 8명에게 전 세계 하위 50퍼센트인 36억 명이 보유한 만큼의 재산을 안겨주었다.

마을공동체살이란 부익부 빈익빈과 지구 황폐화를 가속화하는 소비와 환경 파괴에 맞서는 혁명에 가담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마을과 공동체 사람들은 이웃과 어울리느라 인터넷이나 게임이나 텔레비전에 빠져 있을 틈이 없었다. 남한테 으스댈 필요도 없고 사치를 부추기는 마케팅에도 동요되지 않으니 돈을 지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혼삶이 대세가 되어가는 추세이지만, 홀로 살아가는 게 불리하다는 것은 진화론자 다윈도 일찍이 간파했다. 다윈은 경쟁해서 승리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식의 적자생존을 언급한 바가 없다. 그는 서로 협력하는 것이 진화에 유리하다고 했다. 공동체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협력해 생존을 도모하는 데서 나아가 '함께 행복'해진다.


마을공동체살이의 이점은 개인뿐만 아니라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고래가 뱃속에 8킬로그램의 폐비닐봉지를 담고 죽어 있다'는 뉴스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가엾다'는 한마디로 스쳐보내지만, 공동체 사람들은 그날부터 비닐이나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일회용품 안 쓰기를 실행한다.


몇 년 전 서울 신촌에서 열린 청춘멘토쇼에서 한 청년이 질문했다. "초중고 때는 좋은 대학에만 가면 고속도로가 펼쳐진다고 해서 죽도록 공부했는데, 대학에 가니 취직하면 장밋빛 인생이 보장된다고 한다. 취직을 해도 내 집 마련하고 노후 준비하느라 평생 언제 허리 펴고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게 보통 대한민국 사람들의 질문이다. 가끔 매스컴에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 이들을 미화하는 기사나 책을 보고 그런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럼 그 여행 뒤엔?"이라는 불안감을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늘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라고 배웠다. 실제로 현실이 그렇다. 자신이 즐겁게 몰입하고, 의미 있는 일을 찾아 그 성취를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은 행운아다.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아들은 드물다. 오직 생계를 잇기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도 많다. 각자가 처한 현실, 즉 재산과 학력 수준, 능력, 체력, 사회성이 다 다르다. 노력하는 만큼 보상을 얻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이 어디까지 언제까지 노력을 해야 하나.

마을이나 공동체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인간 홀로는 호랑이나 표범에 비해 무력하기 그지없지만, 서로 의지하고 돌보고 협조하고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면서 행복해지고 강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국민의 5분의 1 이상이 공유 주택에서 살고 있다. 공유 주택에 함께 거주하는 이들이 잘 조화되면 10개의 보험을 들거나, 북유럽 수준의 복지 시스템을 구축한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가 되는 이들은 가족임에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공동체는 닫힌 가족주의와는 다르다. 애증이 짙은 또 하나의 동굴 안 가족 안에만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살이를 하는 이들이 바깥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건 맞지만 그들이 더 많은 여유와 재미를 갖게 된 건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 가족들과 함께 협력하고 의지하고 서로 돌보며 친밀해졌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살이는 장소만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변화다. 마을공동체살이를 선택한다는 것은 남한테 자신의 잘난 점을 과시하고, 남의 약점을 발견해 짓밟으면서 상대를 이겨 출세하려는 식의 자본주의 방식과는 다르게 살아보는 것이다. 죽도록 달리다 보면 언젠가 행복해지겠지 하며 미래의 보험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소박하게 이웃과 서로 돌보며 친밀해지며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혼삶은 쉽게 택하지만, 마을 혹은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두려워한다. 둘이만 사는 것도, 가족끼리만 사는 것도 피곤한데, 아니 산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데, 그렇게 많은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초고속성장 시대에 부모를 일터에 빼앗긴 단절의 트라우마가 있고, 경쟁의 부추김 속에서 피로에 지쳐 있는 데다 직장 상사, 동료나 친구들에게까지 상처 받아 인간피로증후군에 시달리는 한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미 마을공동체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죽을 때가 되어서야 후회하지 않게 된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특히 반가운 일은 대단한 부자나 정치인이나 수도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선구자적 결단을 내려 행복한 삶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 공동체는 주거, 비혼, 출산, 육아, 교육 등 우리 사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와 직결돼 있다. 간디는 평생 마을공동체에서만 살았다. 인도의 독립보다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디는 '마을공동체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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