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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하이텍, 동부그룹 시절 '투자 트라우마' 떨쳐낼까[넘버스]

조회수 2021. 5. 4. 14: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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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출처: (사진=DB하이텍)
DB하이텍 부천공장.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호황을 맞은 DB하이텍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적절한 설비투자 시점을 잡는 일이죠. 최창식 DB하이텍 부회장은 지난 2월 언론 인터뷰에서 “내부 실력을 축적하고 내공을 쌓은 뒤 진행해야 할 것 같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DB하이텍이 말하는 ‘내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잘나가는 DB하이텍은 무엇이 두려워 ‘설비투자’에 이토록 조심스러운 걸까요.


DB하이텍은 지난해 최고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DB하이텍의 주력 제품은 8인치(200㎜) 웨이퍼인데요. 웨이퍼는 반도체를 만들 때 필요한 얇은 원판을 의미합니다. 8인치는 원판의 직경을 뜻하죠. 한때 생산성이 높은 12인치 웨이퍼(300㎜)에 밀려 설 곳을 잃었는데요. 최근 이미지센서(CIS), 파워소자(PMIC) 등 8인치 웨이퍼가 필요한 시스템반도체 시장이 성장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DB하이텍이 지난해 최고의 나날을 보낸 이유죠.


그룹 내 위상도 달라졌습니다. DB하이텍은 2008년부터 7년 연속 적자를 내 DB그룹(옛 동부그룹) 내에서 미운오리 신세였습니다.


DB하이텍은 2015년부터 6년 연속 1000억원 안팎의 흑자를 냈습니다. 지난해 순이익률은 무려 17.7%(순이익 1660억원)를 기록했습니다. 제조업 평균 순이익률을 고려하면 수익성이 상당히 높죠.


현재 DB하이텍은 그룹 내에서 캐시카우(수익성이 높은 사업)로 평가받습니다. 김남호 DB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애정을 드러내죠. 신년사 일부를 같이 볼까요. 김 회장은 “DB하이텍 등이 탁월한 성과를 창출한 것처럼 2021년에는 모든 계열사들이 경쟁력을 높여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시기 바란다. DB하이텍 영업이익률은 코스피 상장기업들 중 최선두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제조업체가 잘나가면 꼭 듣는 말이 있죠. 생산 시설을 확대할 계획은 없느냐입니다. DB하이텍은 유독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이미 '풀(FULL) 생산 체제'에 돌입했기 때문이겠죠. 지난해 말 기준 DB하이텍 부천 공장과 상우 공장의 평균 가동률은 각각 98.47%, 97.27% 입니다. 더 이상 공급을 늘릴 여력이 없는 거죠. DB하이텍의 답변은 늘 비슷합니다. “고민은 하고 있는데, 언제 투자할지는 모르겠다”는 정도죠.


DB하이텍은 올해 1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설비투자 계획’을 밝힐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전히 DB하이텍은 투자를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DB하이텍은 왜 투자를 망설일까요.


‘1조원 투자’ 여력 없나?


DB하이텍이 생산 라인을 증설하는데 필요한 돈은 약 1조원입니다. 최 부회장이 지난 2월 <전자신문>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금액이죠. 최 부회장은 “DB하이텍의 연 매출은 1조원이 안 되고, 새로운 파운드리 라인 증설을 위해선 1조원이 훨씬 넘는 투자를 해야하는 게 전반적인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1조원은 큰 비용이 맞습니다. 그러나 DB하이텍 재무 구조에 문제를 줄 만큼 무리한 금액일까요?


투자 여력을 따져보기 전 DB하이텍의 재무 상태부터 살펴봐야겠죠. 최근 5년간 부채비율을 계산해봤습니다. 2016년 189%에 달했던 부채비율은 지난해 48%까지 떨어졌습니다. 부채비율은 기업이 보유한 돈, 부동산 등 자산에서 빚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보통 기업 부채비율이 100% 미만이면 재무 상태가 건전하다고 평가합니다. DB하이텍의 재무건전성은 우량하죠.


다음은 최근 5년 유동비율을 집계해봤습니다. 지난해 유동비율은 175%입니다. 예년보다 낮아졌으나 여전히 높죠. 유동비율은 기업이 빚을 잘 갚을 수 있는지 평가하는 지표인데요. 보통 유동비율이 100%를 초과하면 유동성이 풍부한 것으로 봅니다.

출처: DB하이텍 사업보고서
DB하이텍 부채비율 및 유동비율 추이.

DB하이텍은 재무 건전성이 우수해 보입니다. 그럼 투자 능력이 있는지 분석해봐야겠죠. 기업은 투자금을 확보할 때 자기 자본과 외부 자본(금융부채, 주주 자본)을 활용합니다.


지난해 말 기준 DB하이텍의 현금성 자산(현금 및 현금성 자산+단기금융자산)은 867억원입니다. 잉여현금흐름도 봐야겠죠. 잉여현금흐름은 투자, 배당 여력을 측정하는 지표로 쓰입니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DB하이텍의 잉여현금흐름은 1480억원입니다. 1조원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죠. 눈에 띄지 않는 현금성 자산인 미처분이익잉여금 5216억원을 더해도 1조원엔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DB하이텍은 외부 자본을 끌어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DB하이텍은 빚이 얼마나 많은지 볼까요. 지난해 말 기준 DB하이텍의 차입금(단기차입금+장기차입금+유동성장기차입금)은 1688억원입니다. 총 자본 중에서 외부에서 조달한 차입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차입금의존도라고 부르는데요. DB하이텍의 지난해 차입금의존도는 14.3%입니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의 차입금의존도가 16.6%라는 점을 감안하면 DB하이텍의 차입금의존도는 낮은 편입니다. 외부 자본을 끌어올 여유가 있어 보이죠.


자기 자본과 외부 자본을 더하면 DB하이텍의 1조원 투자 여력은 충분해 보입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큰 수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죠. 신한금융투자는 올해 DB하이텍의 실적을 매출액 1조259억원, 영업이익 2814억원으로 내다봤습니다.

출처: DB하이텍 사업보고서
DB하이텍 실적 추이.

연이은 투자 실패 경험 때문일까


DB하이텍이 설비투자에 조심스러운 이유는 글 초반에 언급한 주력 제품 ‘8인치(200㎜) 웨이퍼’ 때문입니다. 8인치 웨이퍼는 구(舊) 공정입니다. 반도체 품귀 현상, 시스템반도체 시장 성장으로 수요가 급증했으나 호황이 끝나는 시점을 예측하기 어렵죠. 설비투자를 결정해도 최소 3년은 건설만 해야 하는데 시장 전망을 확신할 수 없으니 불안한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다른 8인치(200㎜) 웨이퍼 파운드리 업체들도 투자를 머뭇거리고 있을까요?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8일 1분기 실적 발표 기관투자자 설명회에서 “8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 파운드리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라며 “8인치 파운드리 사업의 미래 전망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SK하이닉스는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IC를 통해 파운드리를 하고 있는데요. SK하이닉스는 올해 청주에 있는 시스템IC 설비를 중국으로 옮겨 가격경쟁력을 높일 계획입니다. 이를 거점으로 다양한 사업 옵션을 놓고 고민하겠다는 거죠.


반도체 산업은 설비 투자에 큰 비용이 들어가고, 반도체 산업 또한 빠르게 변하고 있어 시장 전망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투자를 결정할 때 신중하게 접근하는 건 당연합니다.


다만 DB하이텍은 유독 설비투자에 대해 언급조차 꺼리는 모습입니다. 업계에서 과거 동부그룹 시절의 '투자 실패 악몽'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죠.

출처: 사진=DB그룹 홈페이지
김남호 DB그룹 회장이 신년사를 하고 있다.

DB그룹은 ‘비운’의 그룹으로 불립니다.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은 재계에서 '자수 성가 기업인'으로 꼽힙니다. 그는 1969년 자본금 2500만원으로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을 설립했는데요. 1970년대 ‘중동 붐’을 타고 1975년엔 사우디아라비아 해군기지 건설공사를 4500만 달러에 수주하는 등 급성장했습니다. 창업 20년 만에 20대 기업까지 진입했죠. 금융·철강·반도체·농업 등으로 외연을 넓히며 한때 계열사만 60여개에 달하는 재계 10위권 그룹으로 위세를 떨쳤습니다.


하지만 몇 번의 투자 실패로 모든 걸 내려놓았죠. 동부전자의 반도체 투자와 동부제철의 전기로 투자가 대표 사례입니다. 김 전 회장은 ‘반도체를 키우겠다’는 야망으로 1997년 동부전자를 만들었는데요. IBM과의 계약이 무산되며 시작도 못하고 사업은 끝났습니다. 2001년엔 일본 도시바와 손잡고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을 이어갔으나 ‘IT 버블’이 꺼지면서 매출은 바닥을 쳤습니다. 여기까진 버틸만했습니다.


김 전 회장은 멈추지 않고 반도체 투자를 지속했는데요. 공정기술 확보를 위해 2002년 아남반도체를 1740억원에 인수합니다. 2004년엔 동부전자와 아남반도체를 합병해 동부아남반도체를 출범시키죠. DB하이텍의 전신이 동부아남반도체입니다. 동부일렉트로닉스, 동부하이텍을 거쳐 현재 DB하이텍까지 이어진 거죠.


DB하이텍은 과거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2001년과 2004년 산업은행 등에서 1조3000억원을 빌렸습니다. 하지만 2008년부터 장기간 적자가 이어져 자본금마저 까먹었죠. 차입금 규모는 2008년 2조원까지 불어났습니다.


동부그룹은 철강사업에서도 승부수를 던졌는데요. 동부제철은 2007년 산업은행 등 금융권에서 약 1조원을 빌려 전기로 3기 준공을 진행했는데요. 전기로 열연 수요가 늘고 있다는 점, 전기로 설비 시설이 준공되면 원가 절감과 열연 판매가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었죠.


하지만 시장 상황이 급변해 투자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동부제철 재무구조는 심각하게 악화됐죠. 동부제철 부채비율은 300%에 육박했고 1년 내 상환해야 하는 단기 차입금은 1조원에 달했습니다. 앞선 반도체 투자 실패로 다른 계열사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힘들었죠.


결국 DB그룹은 2013년 11월 주요 자산과 계열사를 매각합니다. 자구계획엔 △동부인천스틸 △동부특수강 △동부발전당진 △동부익스프레스 △동부하이텍 △동부메탈 △동부당진항만 등 계열사 매각과 김 전 회장의 1000억원대 사재 출연 등이 담겼습니다. 이 중 동부하이텍과 동부메탈 등 일부 계열사의 매각은 불발됐습니다.


DB그룹이 2000년대 처했던 상황과 DB하이텍이 2021년 처한 상황이 유사합니다. 시장 전망은 좋아 보이는데 확신하기엔 리스크가 잔존해보입니다. 과거 DB그룹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투자를 감행했고 그룹의 뿌리부터 흔들렸죠.


DB하이텍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과거 투자 실패를 딛고 1조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할까요 아니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머뭇거릴까요. DB하이텍이 반도체 호황기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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