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나간 마라톤 대회..달리는 기쁨을 깨닫다

조회수 2021. 4. 16. 19: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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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여행은 의외의 만남이나 사건 등을 통해 다양한 기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어떤 장면은 순간을 갈무리한 듯 오래도록 뇌리에 남기도 한다. [디카폐인]은 여행에서 경험한 인상적인 순간이나 장면을 공유하는 코너다. 여행이 멀어져 버린 지금,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둔 기억의 조각을 꺼내 봤다.
출처: (픽사베이 제공)

언젠가부터 달리기를 싫어하게 됐다. 어릴 때는 반 대표로 운동회에 나갔을 만큼 잘 뛴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100m 달리기였다. 기록을 0.1초라도 줄여야 한다는 긴장감과 부담감이 컸기에 즐길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리기는 해결해야 할 도전과제가 됐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흥미를 완전히 잃게 됐다.


다시 달리게 된 것은 의외의 출장 때문이었다. 몇 년 전, 교토에서 열린 국제 마라톤 대회 취재를 가게 됐다. 이왕 가는 김에 직접 뛰어보라는 지시도 함께였다. 달리기라니 탐탁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준비를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감에 쫓기다 아침 조깅 한번 못해보고 떠나게 됐다.


대회 전날, 세계 각국에서 온 취재진과 함께 대회 조직위의 안내를 받아 버스를 타고 마라톤 코스를 돌아봤다. 대회 등록을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자원봉사자 등을 취재하다 보니 현지에서도 뛸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대회 당일 아침이 밝았다. 초봄이라 꽃은 피었지만 날씨는 쌀쌀했다. 뛰어야 하니 옷을 두껍게 입지 못해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아무리 일로 왔다지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빨리 마치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가장 짧은 코스인 5㎞를 달리기로 했지만 그것도 길게 느껴졌다. 조직위 관계자는 뛰다 보면 5㎞ 안내판이 나올 것이라며 거기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교토 마라톤 대회 모습

이런저런 식전 행사가 지나가고 마침내 출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나도 그들 틈에 섞여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경기장을 나오자 교토 시내 교통은 완전히 통제된 상태였다. 대회 조직위 관계자는 “완전히 뻥 뚫린 교토 시내를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기회”라고 했는데 사실이었다.


금방 지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리 힘들지 않았다. 사람들과 한데 뭉쳐 달려서 속도를 낼 수도 없고, 낼 필요도 없었다. 특이한 것은 사람들이 거리 응원을 많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시위도 많지만 일본에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라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도로는 구경을 나온 인파로 가득했다. 

응원을 나온 교토 시민들

길가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은 손을 뻗어 참가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힘내라!”고 외쳐댔다. 어르신들은 일본 전통 복장을 하고 북을 치며 큰 소리로 힘을 보탰다. 어린아이들도 아빠 품에 안겨 손을 흔들었고, 젊은이들은 희한한 분장을 하고 거리 응원을 펼쳤다. 교토 시민 전체가 마라톤이라는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보이는 빌딩 곳곳에는 끝까지 힘내라는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뛰고 있자니 힘이 별로 들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시원한 바람을 쐬며 즐겁게 달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전에는 사람들이 응원을 왜 하는지 몰랐다.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란 것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마치 나 하나에 쏟아지는 듯한 응원을 받고 있자니 힘이 절로 났다. 또한 비좁고 고풍스러운 교토 시내를 막힘없이 내달리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교토 료안지

어느 덧 료안지(龍安寺)를 지나고 있었다. 물 없이 돌과 모래를 이용해 자연을 표현하는 정원으로 유명한 절이다. 컨디션으로 봤을 때 얼마 오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현재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고 눈을 의심했다. 6㎞ 지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회 관계자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5㎞를 이미 넘어선 뒤였다. 그렇다고 달려오는 인파를 헤치고 역주행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연락 끝에 미팅 장소를 8㎞ 지점으로 다시 정했다. 


평소 달리기를 즐기지도 않았지만 의도하지 않게 오버한 셈이 됐다. 다시 정한 약속 장소에 도착한 뒤 걸음을 멈췄다. 기본적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8㎞나 달린 탓에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호텔에 도착한 뒤에는 무릎과 종아리가 퉁퉁 붓기 시작했다. 출장을 다녀온 후 한동안 절뚝일 정도였다.

교토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

고생은 했지만 내부에서 뭔가가 바뀌었다.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아버린 것이다. 과거에는 경쟁과 기록을 위해서만 달렸다. 하지만 대회 참가 이후로는 자연을 벗 삼아 즐겁게 달리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정기적으로 한강공원에 나가 뛰기 시작했고, 자발적으로 국내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기록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달리는 기쁨을 누리며 천천히 달렸다. 우연히 참가한 마라톤 대회가 삶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팬데믹 이후에는 대규모로 열리는 단체 마라톤 대회가 사라져 버렸다. 대신 각자 뛴 다음 대회 공식 홈페이지에 본인의 GPS 기록을 입력하는 방식이 일반적이 됐다. 다 함께 어울려 뛰는 즐거움을 언제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점점 날이 따뜻해지는 이때,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내달리던 시절이 더욱 더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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